재력가 송 아무개 씨 살해를 사주한 혐의로 구속된 김형식 시의원이 지난 3일 서울 강서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되는 모습.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내가 너 얻어먹은 거보다 내가 너 사준 게 더 많아. 너 언제 며칟날 밥 얻어먹은 거 내가 다 기록해놨어!”
강서구 알부자 송 씨가 생전에 강서 지역 한 의원에게 했다는 말이다. 이미 송 씨의 ‘장부’는 강서 지역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아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였다. 전언에 따르면 송 씨는 돈을 받지 않는 구의원을 따로 불러 “다른 사람은 다 받는데 왜 당신은 안 받느냐”며 장부를 보여주곤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송 씨의 장부를 지칭하는 이름은 다양하다. ‘매일기록부’라고 부르는 게 대표적이다. 송 씨는 직접 장부 표지에 매일기록부라고 써 붙였다. 매일매일 모든 것을 기록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실제로 장부는 1991년 말부터 송 씨가 만난 사람의 이름, 전달한 금액, 향응인지 식사인지, 접대 방식 등이 세세하게 쓰여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송 씨는 매일 하루를 마감하기 전 책상 위에 앉아 장부를 꼼꼼하게 작성했다.
송 씨의 한 지인은 “송 씨가 자신이 치부책을 갖고 있다며 치부책의 존재를 은근히 자랑했다. 가끔씩 ‘치부책’에 누가 얼마나 먹었는지 다 적혀 있다고 얘기하곤 했다”고 밝혔다. 지역 정치인 등 유력인사들의 약점을 자신이 쥐고 있다는 자신감으로 해석된다. 그만큼 송 씨는 매일기록부를 적은 지난 23년 동안 수많은 지역 유력 인사들을 접촉하고 접대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강서구에 있는 재력가 송 씨의 웨딩홀.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무엇보다 송 씨의 매일기록부에 적힌 인사가 과연 누군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검찰에 따르면 김형식 서울시의원뿐만 아니라 또 다른 시의원들, 강서구 의원, 세무공무원 등 정관계 인사들이 다수 포함된 것으로 전해진다. 항간에서는 “유력 인사들이 최소 ‘10여 명’ 가까이 된다”라는 전언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검찰에서는 “10여 명이 있는지는 확인해줄 수 없다. 검찰이 장부를 입수해 확인 중이다. 현재 수사관들의 모든 언론 접촉은 금지한 상태”라며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한편 매일기록부에 나타난 자산가 송 씨의 ‘돈 씀씀이’도 주목할 부분이다. 과거 송 씨는 돈 문제 때문에 지역 주민과 법정 소송을 벌일 정도로 재산을 매우 중요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송 씨 아들은 “10원짜리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는 사람”이라며 아버지를 설명한다. 그만큼 로비 역시 송 씨 성격상 ‘철저한 목적과 대가성’ 없이는 절대 행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시각이 대체적이다.
실제로 송 씨는 장부를 지나칠 정도로 꼼꼼히 작성했다. 빼곡하게 적은 내용에는 세금과 사무실 운영비를 포함해 가족 외식비, 손자 용돈까지 적어 놨다고 한다. 자신에게 지출한 금액도 가계부 형식으로 적었는데, 자신이 무엇을 먹었는지, 심지어 바나나 우유 하나를 사먹은 것까지 적어 놨을 정도였다. ‘3000억 원’ 자산가 치고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송 씨를 살해한 팽 아무개 씨.
이렇게 소액에도 전전긍긍한 송 씨였지만, 유독 김형식 의원에게만큼은 거액을 퍼다 준 흔적이 보인다. 매일기록부에 따르면 김 의원의 이름은 총 20번이나 등장한다. 모두 건넨 금액을 합하면 ‘5억 9000만 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앞서의 ‘자린고비’ 정황에서 나타난 송 씨의 성격상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때문에 경찰에 따르면 송 씨의 아들이 송 씨가 살해당한 이후 매일기록부를 보고 “범인이 혹시 정치인 아니냐”고 물어본 것으로 전해진다. 송 씨가 김 의원에게 이렇게 거액을 전달한 것을 송 씨와 가장 가까운 아들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그때부터 ‘많은 돈을 받은’ 김 의원을 의심한 것이다. 하지만 경찰은 당시 김 의원이라고 범인을 파악하면서도, 내사 단계라 얘기를 하지 못했다. 이때는 팽 씨가 중국에서 붙잡힌 뒤, 경찰이 중국공안으로부터 ‘김 의원의 살인교사 혐의’에 대한 첩보를 중국공안으로부터 입수한 상태였다. 경찰은 송 씨 아들에게 “아직은 모른다”고 답하면서도 속으로는 깜짝 놀랐다는 후문이다. 결국 송 씨가 이렇게 김 의원에게 거액을 전달한 배경에는 송 씨가 김 의원에게 큰 부탁을 했거나, 김 의원을 상당히 신뢰한 게 아니냐는 분석이 힘을 얻는다.
최근 새롭게 드러난 것은 매일기록부에 ‘중앙 정치인’까지도 언급돼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송 씨의 정치후원금 기부 내역인데, 송 씨는 2005년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현 새정치민주연합) A 의원에게 200만 원, B 의원에게 500만 원을 기부한 데 이어, 2009년에는 집권여당인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C 의원에게 500만 원을 기부한 것으로 검찰이 확인했다. 검찰은 이를 송 씨가 정관계 유력 인사들에게 줄을 대려 한 정황으로 보고 해당 인사들을 모두 수사선상에 올려놓은 상태다.
검찰은 지난 11일에는 해당 인사들의 계좌 추적에 착수하며 수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또 송 씨의 매일기록부에 등장하는 공무원들의 인사기록 카드도 안전행정부로부터 넘겨받아 분석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공무원들이 실제 송 씨나 김 의원의 청탁을 받고 영향력을 미칠 만한 자리에 있었는지 확인해 보겠다는 의지다. 검찰 수사의 칼끝이 최종적으로 어디까지 향할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