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대구유니버시아드에 파견된 북측 응원단. 당시 언론들은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전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그런데 부산항에 만경봉호가 들어온 직후 북측으로부터 긴급요청이 들어왔다. 주요 행사나 회담 시 남북 사이의 의사소통을 담당하는 연락관을 통해서였다. 북측 관계자는 “광목을 좀 많이 구해달라”고 우리 측에 말했다. “가급적 많은 량을 구해줬으면 좋겠다”는 입장을 밝히는 얼굴에는 곤혹스런 표정이 역력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광목천을, 그것도 적지 않은 물량을 요구하는지 의문이었다. 가급적 북측을 잘 대접하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지원해주라는 지침에 따라 남측 관계자들은 충분한 양의 광목을 구입해 숙소인 만경봉호에 건넸다. 당시 통일부 관계자는 “광목이란 천이 널리 쓰이지 않기에 부산 재래시장 포목상 몇 곳을 돌아다닌 끝에 넉넉한 물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며칠 뒤 남북한이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우리 측 관계자가 북한 인사에게 광목의 용도를 물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북측은 “그건 우리 에미나이들 달거리 하는데 썼다”고 털어놨다. 많은 여성들이 응원단에 포함되다보니 이들의 생리현상을 처리하기 위한 문제에 연락관들이 나서야 했던 것이다.
이런 북한의 여성 응원단이 다시 남한을 찾는다. 이번엔 9월 인천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이다. 북한 응원단의 남한 방문은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과 이듬해 8월 대규유니버시아드에 이어 세 번째다. 북한은 이번 아시안게임에 일찌감치 선수단과 함께 응원단을 파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지난 10일에는 북한 올림픽위원장이 판문점을 통해 대남통지문을 보냈다. 아시안게임조직위원장에게 보낸 통지문에서 북한은 판문점 지역에서 실무회담을 열자고 제의했다.
눈에 띄는 건 “선수단과 함께 큰 규모의 응원단을 보내기로 했다”는 통지문의 구절이었다. 북한이 상당한 규모의 응원단을 파견할 것임을 예고한 것이다. 정부 당국은 북한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이 과거보다 더 많은 숫자를 보내 이른바 ‘통 큰 정치’를 부각시켜려 할 가능성에 대비하고 있다. 북한 측은 선수단 못지않게 응원단 파견 문제에 공을 들여온 모양새다. 이미 짭짤한 재미를 봤기 때문일 터.
북한이 응원단 문제에 몰두하고 있는 건 김정은의 부인 이설주가 과거 인천에서 열린 국제스포츠 행사에 응원단원으로 다녀간 것과 무관치 않을 것이란 진단도 나온다. 이설주는 2005년 9월 인천에서 열린 16회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에 청년학생협력단 소속으로 왔다. 남한 방문 경험이 있는 이설주가 이번 응원단 파견 문제와 관련해 김정은에게 조언하고 있을 것이란 관측도 대두한다.
김정은 위원장과 부인 이설주. AP/연합뉴스
여기에는 이설주와 동갑인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도 관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김여정은 최근 공개적으로 김정은을 수행하면서 보좌역을 담당하고 있다. 정보당국은 노동당 선전선동부 과장을 맡고 있던 김여정이 최근 부부장(차관급)으로 격상돼 핵심 참모로 수행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김정은의 내조와 외조를 분담하고 있는 올케 이설주와 시누이 김여정이 의기투합해 노동당의 선전선동 담당 간부들과 미녀 응원단을 활용한 대남전략을 짜고 있다는 얘기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모란봉악단을 비롯한 인기 악단이나 단원 일부를 응원단에 포함시켜 보낼 가능성도 있다고 점친다. 가창력에 미모까지 갖춘 스타급 가수 공연을 내세운 모란봉악단은 요즘 평양에서 폭발적 인기를 얻고 있다. ‘평양판 걸그룹’으로 불리는 이들은 무대를 내려와 주민들에게 악수를 청하고 사진을 찍는 모습도 드러내 이전과는 다른 차원이란 평가가 나온다.
창단 2년 만의 이런 급부상은 2012년 7월 창단공연 때 이미 예고됐다. 이설주가 북한 퍼스트레이디로 데뷔를 할 때 그 무대를 모란봉악단 공연관람으로 삼았다는 점에서다. 모란봉악단 공연에는 ‘음악정치’로 불리 김정은의 통치코드가 숨겨져 있다. 이미 ‘노래폭탄’이란 표현도 등장했다. 북한이 이들을 파견해 또 한 번의 미녀 응원단 바람을 불러일으키려할 것이란 얘기다.
이번 북한 응원단의 인천 체류 생활은 12년 전 부산아시안게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부산 체류 때 응원단의 생활은 잘 짜인 규율에 맞춰 이뤄졌다는 게 당시 북측 안내를 담당한 관계자의 귀띔이다. 매일 오전 6시쯤 기상해 잠자리를 정리하고 세면과 화장을 한 뒤 오전 7시 30분부터 조별로 아침식사를 했다. 숙소인 만경봉호 4층에 있는 식당에는 10명 정도가 둘러앉아 식사할 수 있는 테이블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아침식사는 뷔페식 한정식이 제공됐는데, 불고기·국·나물·잡채·김·김치 등이 주요 메뉴였다. 점심때는 산채비빔밥이나 냉면도 나왔다는 게 당시 관계자의 말이다.
아침식사 후에는 인공기·한반도기·딱딱이 등 응원도구가 든 가방을 챙기고, 조직위가 제공한 대형 버스에 나눠 타고 북한 팀 경기가 열리는 경기장을 찾는다. 취주악단이 연주하는 ‘휘파람’이나 ‘옹헤야’ 등 경쾌한 노래와 무용수 4명의 율동에 따라 응원을 펼친다. 밤늦게까지 경기가 있는 날이면 1만 원대의 도시락으로 점심과 저녁을 해결하기도 했다. 오후 10시께 전후해 배로 돌아오는 응원단은 조별로 간단한 정리 모임을 한 뒤 땀범벅이 된 몸을 씻기 위해 목욕탕으로 향한다. 만경봉호는 4층에 15명 정도가 입욕할 수 있는 탕과 10여 개의 샤워기가 설치된 목욕시설을 갖추고 있다. 응원단은 11시쯤 잠자리에 들었다. 며칠 지나면서 파김치가 돼 쓰러지는 단원도 적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사실 여성들은 북한 체제의 변화를 이끄는 데 중심역할을 해왔다. 특히 20~30대 젊은 여성들의 경우 남북교류 과정에서 주목받아왔다. 금강산 관광 당시 우리 관광객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던 현대아산 측 여성 관광조장들은 북측에서 나온 여성 안내원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우리 관광조장들의 전언에 따르면 북한 안내원들은 남측 여성들의 화장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현대아산 조장들의 얼굴을 가까이서 유심히 쳐다보다가 “언니! 왜 말짱한 눈썹은 빡빡 밀어버렸습네까”라고 묻기 일쑤였다. 북측의 금강산 현지 관광해설 노하우를 전수받기 위해 합숙교육까지 거치면서 ‘언니, 동생’하며 지내게 되자 호기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우리 조장들은 북측 안내원들에게 친절하게 설명하고 화장법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북측에 “눈썹 끝부분을 밀어내고 아이펜슬로 본래보다 좀 더 크게 윤곽을 그려봐. 눈매가 훨씬 서글서글해지고 시원해 보일거야. 서울에서 우리 또래 애들은 대개 이런 식으로 하는데…”라며 귀띔해주자 솔깃해하는 표정이었다는 얘기다.
초기에는 “아이펜슬은 또 뭡네까”라며 의아해하기도 했지만 ‘눈썹화장을 하는데 쓰는 연필’이란 설명에 금방 이해하더란 것이다. 이후 북측 안내원들은 남한식 눈썹화장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현대아산 관광조장들 사이에선 북한의 안내원들에게 주는 선물 중 인기품목의 하나로 눈썹 면도용 칼과 아이펜슬이 꼽히게 됐다. 금강산 관광이 북한 처녀들이 ‘남조선 여성’들의 스타일을 따라 배우는 현장학습장으로 자리한 것이다.
2002 부산아시안게임 때 문제가 된 생리대 문제는 금강산에서도 벌어졌다. 현대아산의 한 관광조장은 또래 북측 여성 안내원에게 일회용 생리대를 줬다가 낭패를 겪었다고 한다. 한번 쓰고 이를 다시 사용하는 줄 알고 물에 넣었다가 뻣뻣하게 굳었다며 따지듯이 “왜 쓰지도 못할 물건을 줬느냐”고 따지는 북측 안내원을 보며 웃음을 참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 파견된 북한 응원단.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하지만 그뿐이었다. 3월 말 북한은 대남 비방과 위협으로 다시 돌아섰다. 박근혜 대통령의 독일방문 기간 중 이뤄진 드레스덴 대북제안도 거부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불거진 북한의 아시안게임 참가는 일각에서 우려도 낳았다. 극도로 대치하고 있는 남북관계를 감안하면 성사가 쉽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였다. 정부는 국제 스포츠 행사에 참가하기 위한 북한 주민의 남한 방문이나 우리 국민의 방북은 원칙적으로 허용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지난해 7월에는 북한 여자축구대표팀이 국내에서 열린 동아시안컵축구대회에 참가했고, 두 달 뒤엔 평양 아시안컵역도선수권대회에 한국 선수들이 출전했다. 이런 방침에 따라 북한 선수단의 인천 방문은 사실상 결정된 상태고, 응원단의 경우 체류일정이나 규모, 공동응원 여부와 같은 구체적인 활동 내역을 둘러싼 문제를 남북 간에 논의할 협의만 남겨두고 있는 상황이다.
1990년 경평 축구대회나 1991년 세계탁구선수권 남북 단일팀 출전은 남북 긴장 완화와 교류 증진의 촉매가 되기도 했다. 북한의 이번 인천아시안게임 선수단과 응원단 파견도 남북관계의 물꼬를 트는 촉매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의 호전적 행보가 누그러지지 않는다면 ‘찻잔 속의 폭풍’에 그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당장 북한은 아시안게임을 내세워 한미가 매년 8월 실시해온 을지프리덤가디언(UFG)연습을 중단하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정부는 국제스포츠 교류 차원의 선수·응원단 방문은 허용하지만 이를 빌미로 한 평화공세나 도발에는 강력하게 대처한다는 입장이어서 한바탕 격돌을 예고하고 있다. 아시안게임을 둘러싼 박근혜 정부와 김정은 정권의 치열한 기싸움은 여름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이영종 중앙일보 외교안보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