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성희롱 운전자를 목격한 여성 요금징수원은 10명 중 6명에 이른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송미옥 씨(여·55)의 일터는 수도권의 한 고속도로 가운데 위치한 0.5평(1.65㎡)짜리 부스다. 톨게이트 요금소에서 14년째 징수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송 씨는 다양한 운전자들을 만났다. 이름표를 보고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건네는 고객이 있는가 하면 장거리 운전 스트레스를 징수원에게 욕설로 풀어놓는 고객도 있다. 그중 여성 요금징수원들이 가장 피하고 싶어 하는 진상고객은 성희롱 운전자들이다. 송 씨는 “명함을 건네거나 손잡고 안 놔주는 사람은 그나마 양반이다”라며 “이제 차만 들어와도 그런 분위기(성희롱 운전자)를 감지할 수 있다”며 혀를 찼다.
직원들이 목격한 성희롱 운전자들 대부분은 하의를 벗은 채 요금소를 찾는 경우가 많다. 넥타이까지 맨 말쑥한 차림의 운전자가 하의를 탈의한 채 성기를 노출한 장면을 보면 누구라도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상의와 하의를 다 입고서도 은밀한 부위만 노출하는 사람도 있다. 송 씨는 “우리같이 나이가 좀 있는 직원들은 호통을 치고 운전자를 혼내기도 한다. 하지만 나이 어린 직원들은 감당하기 힘든 충격을 받는다. 너무 놀라 구토를 하는 직원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차안에서 포르노 같은 음란물을 직원들이 잘 보이는 위치에 틀어놓는 진상 운전자도 자주 목격된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직원들은 못 본 체 넘어가려 하면 끈질긴 운전자는 “쓰레기 좀 버려달라” “○○○씨(직원들은 이름표를 착용하고 있다)”하는 식으로 음란물로 시선을 유도한다. 틀어놓은 음란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여기 좀 봐봐”라며 노골적으로 희롱하는 운전자도 있다.
그나마 햇빛이 쨍쨍한 날이면 좀 안심이 된다. 이들 성희롱 운전자가 요금소에서 목격되는 날은 대부분 비가 오기 전 궂은 날씨가 대부분이다. 송 씨는 “그런 사람들은 아침·저녁 할 것 없이 시간은 안 가리면서 우습게도 날씨는 가리는 것 같다. 화창한 날에는 그런 일(성희롱)이 줄어드는 편이다”라고 덧붙였다.
인적이 드문 길목이나 여중·여고 인근에 자주 출몰하는 ‘바바리맨’은 많았지만 ‘고속도로 위의 바바리맨’은 아직은 생소하다. 하지만 송 씨는 자신이 요금소에서 징수원 일을 시작했던 14년 전부터 성희롱 문제는 빈번하게 일어났다고 말한다. 지난 2010년 전국톨게이트노조가 결성되면서 요금소 성희롱 문제가 수면위로 떠올랐을 뿐이라고 했다. 현재 전국톨게이트노조 위원장이기도 한 송 씨는 “과거 이런 성희롱 문제는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해 직원들끼리도 잘 이야기도 하지 못했다. 회사에도 차마 입으로 전달하기 힘든 시절이 있었다”며 “24시간 운영에 징수원 대부분이 여성이라 성희롱 문제에 취약한 부분이 있었다. 이런 성희롱 문제는 예전부터 죽 있었던 일이지만 노동조합이 생기면서 이제 막 공론화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송 씨도 14년간 근무하면서 여러 차례 성희롱 운전자를 마주한 경험이 있었다. 처음 성희롱 운전자를 마주했을 때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해 숨이 턱 막혔다고 한다. 근무지를 이탈하면 뒤에 오는 고객이 기다릴까 성희롱 운전자를 뒤쫓아가지도 못했다. 이제 송 씨는 성희롱을 하려는 운전자가 나타나면 호통도 치고 강하게 항의해 사과를 받아낼 정도의 대처방법도 터득했다.
2010년 전국톨게이트노조가 생기고 나서야 그간의 성희롱 문제를 털어놓을 수 있는 창구가 생겼다. 2011년 국정감사에서는 요금소 직원 10명 중 6명이 성희롱당한 경험이 있다는 사실이 지적되면서 여론의 공분을 샀다. 지난해부터는 요금소에 블랙박스가 설치되고 성희롱을 방지하는 CCTV가 설치돼 있다는 안내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후 성희롱 운전자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한국도로공사 최영만 영업부 차장은 “전국 톨게이트 요금소에 블랙박스를 설치하고 있다. 현재 71개소에 설치돼 있는데 7~8월 중에는 설치범위를 더욱 확대할 예정”이라며 “올해 초 경남지역에서는 근무자가 증거를 확보, 적극적으로 신고해 형사고발된 경우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요금소에 설치된 블랙박스는 성희롱 발생시 운전자의 모습을 녹화할 수 있도록 돼있다. 위급시 버튼을 누르면 성희롱 운전자의 모습이 고스란히 녹화돼 저장된다. 저장된 화면은 형사고발 등 법적 조치를 위한 증거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최근에는 근무표를 기록하면서 성희롱이 일어난 상황과 차번호, 성희롱 행위까지 기록해 보고하는 시스템도 마련됐다.
하지만 송 씨는 지난해 블랙박스 설치 이후 성희롱 운전자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아직은 회사나 직원들이 사법처리에 소극적이라고 지적한다. 송 씨는 “블랙박스가 생기면서 확실히 성희롱이 줄었다. 현재 성희롱 상황을 기록하고 보고하는 것으로 돼 있지만 사법처리로 이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우리가 보고한 성희롱 기록들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그 과정도 공개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송 씨는 “직원들이 살구색 바지나 그 비슷한 색만 봐도 깜짝깜짝 놀란다. 일종의 트라우마다”라며 “과거에는 생계가 걸려있어 ‘그냥 버티자’ 하는 생각뿐이었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직원들이 받았을 충격을 치료하는 상담치료가 병행되고, 성희롱 운전자는 끝까지 추적해서 법적인 책임을 묻는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