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3월 <나가요 미스콜>, <스케치>, <청춘학당: 풍기문란 보쌈 야사> 등 청소년관람불가 멜로물이 극장가에 연이어 등장, ‘에로물 마니아’들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개봉 후 관객의 반응은 싸늘했다. 포털 사이트 네티즌 평점도 6점 아래였다. “주연배우는 벗지 않는다, 에로영화인데 야하지 않다, 내용도 없고 볼거리도 없다, 낚시 영화다” 등 관객들의 관전기는 실망 그 자체였다.
에로영화의 효시는 1982년 <애마부인> 시리즈부터다. 전두환 정권의 이른바 3S 정책으로 에로영화가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애마부인>은 13편까지 이어졌다. 이후 배우 이대근의 활약이 돋보이는 <변강쇠>, 숱한 톱스타를 배출한 <뽕> 시리즈가 인기를 끌었다. 당시 주연배우였던 이미숙, 예지원 등은 에로영화 한 편으로 톱스타 반열에 올랐다.
특히 1990년대 들어서는 전문 프로덕션이 시장에 생기면서 현대를 배경으로 한 에로영화가 큰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극장 개봉보다 홈비디오(VCR)용의 저 예산 에로영화가 이때부터 관심을 받았다. 전문 프로덕션에선 <야시장>, <정사수표>, <젖소부인 바람났네> 등을 대표 작품으로 내세워 큰 수확을 얻었다. 한때 홈비디오 시장은 전문 마니아들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끌어서 성인문화의 한 축을 이루기도 했다.
그런데 홈비디오용 에로영화 시장에 과부하가 걸리면서 감독들은 다시 극장 개봉을 목표로 한 영화를 만들었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를 필두로 <해피엔드>, <노랑머리> 등이 제작되면서 에로영화의 영역이 확대되는 듯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90년대 초반의 홈비디오 전성시대를 이을 만한 큰 수확물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영향으로 에로영화 시장은 2000년대 비디오 및 DVD 시장이 급격히 몰락함과 동시에 와해돼 버렸다. 서울 지역의 한 DVD 도매업자는 “비디오 및 DVD 시장에서 에로영화는 전멸했다”고 말했다. 앞서의 도매업자에 따르면 “80~90년대 우리 가게에서 에로비디오 및 DVD 판매량은 한 편당 100개 이상을 기록했지만, 현재는 한 달 총 DVD 판매량이 평균 15개도 못 미친다. 게다가 새롭게 제작된 작품이 아니라 예전 작품을 재탕하는 수준이라 이 시장은 거의 죽었다고 보면 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전문 프로덕션들도 경영난을 이기지 못해 차례로 문을 닫았다. 한때 <젖소부인 바람났네> 시리즈로 에로영화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선점했던 ‘한시네마타운’ 대표 한지일 씨는 프로덕션 사업을 접은 이후로 영화계에 적을 두고 있지 않다. 그는 현재 ‘케빈 정’으로 개명한 뒤 미국 한인사회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어려운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10여 년 간 에로영화는 저작권료 수입이 분명하지 못한 인터넷 VOD용 또는 다운로드용 야한 동영상(야동)으로 전락해 생명줄을 겨우 이어나갔다. 그간 스타 마케팅을 내세운 청소년관람불가(청불) 영화, 예술성을 인정받은 유명 감독의 작품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영화라는 자격조차 얻지 못했다.
그런데 암흑기가 끝이 없을 것 같던 에로영화 시장에 새로운 돌파구가 나왔다. 이동통신사와 케이블업체의 주도로 IPTV 및 디지털케이블TV 시장이 극장 외 부가시장으로 자리 잡으면서 에로영화에도 공식적으로 2차 판권 시장이 형성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에로영화의 전망은 그리 밝지 못하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견해다. 사실 에로영화가 IPTV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다. 올레TV 측이 밝힌 자료에 따르면 전체 VOD 매출에서 에로영화는 5% 수준을 유지해 왔는데 지난해 하반기부터는 이마저도 감소 추세로 돌아선 것으로 나타났다. SK브로드밴드 측에선 “성인콘텐츠는 예민한 분야로 이와 관련된 정보는 외부에 일체 유출한 적이 없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IPTV 업체들에겐 에로영화가 그다지 반가운 콘텐츠는 아닌 모양새다. 아무래도 가정에서는 청소년들에게 노출될 염려가 있고, 한국의 성문화가 아직까지도 그리 개방적이지 않아 에로영화에 대한 ‘클릭수’가 높지 않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최근에는 에로영화 시장에 뛰어들었던 감독들도 줄줄이 실패의 쓴맛을 보았다. 기자는 최근 지난 2011년경 에로영화 제작에 참여했던 A 감독에게 업계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에로영화에 학을 뗀 사람”이라고 스스로 혀를 내둘렀다. 그는 “지금의 제작 환경도 당시와 별반 다를 게 없다”면서 “80~90년대 에로영화 전성기가 다시 나타날 거라고요? 어림없는 소리”라며 손사래를 쳤다.
우리나라 에로영화 시장은 음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게 그의 주장. 근거는 이러했다. 첫째, 현재 에로영화 제작이 감독의 생계유지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에로영화가 2000년대 초반 이후 누구나 찍을 수 있는 ‘야동’ 수준으로 전락하면서 전문 감독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그도 그럴 것이 테이프도 필요 없는 6mm 카메라 1대, 촬영시간 5시간, 제작비 300만 원을 들여 만든 영화가 손익분기점은 넘기 때문에 단순히 돈을 목적으로 제작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는 곧 에로영화의 질적인 하락을 불렀다. 하지만 양적으로는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원인이었다.
IPTV도 에로영화가 손익분기점에 도달하는 기간을 단축시키는 데에 일조했지만, 고정 시청자 층이 두텁지 않아 에로영화 감독이 흥행을 기대할 수 있는 매체는 아니다. 앞서의 A 감독은 “에로영화 감독 스스로에게 에로영화는 영혼을 담은 작품이 못된다. 이들은 부끄러워서라도 실명으로 나올 의지가 거의 없을 것”이라며 자신도 익명으로 인터뷰하는 이유가 이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또 그는 “<방자전>의 김대우 감독, <아티스트 봉만대>의 봉만대 감독은 여타의 에로영화 감독들과는 다른 세계에 있다”며 “이들은 내러티브, 미장센 등의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구성된 한 편의 ‘작품’을 만드는 ‘상업·예술’ 감독”이라고 평가했다.
둘째, 배우 캐스팅이 어렵다. 1990년대 중반만 해도 에로영화는 배우의 길로 들어서는 지름길이었다. 당시 에로배우 출신들은 작품에 애정이 높았고, 스타성과 연기력을 겸비했다. 지금 스타성을 지닌 배우들은 에로영화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으며, 에로를 전문으로 하는 무명 배우들은 남녀 통틀어 40명 안팎으로 캐스팅 범위 역시 좁다. 또 무명 에로배우들은 감정, 발음 등 연기의 기본기를 배울 기회가 없어 작품의 예술성을 높이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고 한다.
앞서의 감독은 이에 대해 “A급 배우 캐스팅에 실패하면 제작비 조달이 어렵고, 적은 예산으로 무명의 배우를 주연으로 기용하게 되면 결코 흥행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배우들이 예전처럼 에로영화에 대한 인식만 바꿔도 감독들은 큰 힘을 받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에로영화 제작사도 제작의 어려움을 성토하는 실정이다. 연간 10편 이상의 에로영화를 제작·배급·수입하는 케이알씨지(KRCG)의 한 관계자는 “야동이 인터넷에서 쉽게 접하는 콘텐츠가 되면서 에로영화 실수요자들의 입맛이 변했다”고 분석했다. 스타배우가 나오는 19금 영화에 대해선 노출신이 거의 없는 ‘에로티시즘’ 영화라고 불렀다. 그는 “에로영화도 시대에 맞춰 자극적인 소재, 배우들의 과감한 신체노출을 담을 필요가 있다”며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하지만 정부 심의에 이어 공룡기업의 심사기준까지 맞추느라 수요자 니즈를 따라잡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설명도 이어졌다. 앞서의 관계자는 “영화진흥위원회의 심의를 통과하더라도 IPTV나 포털에서 별도의 기준을 두고 있어 우린 이중 기준에 맞춰 제작하고 있다. (공룡기업들이) 개방적인 편이 아니니까 에로영화가 발전하려고 해도 길이 막혀있는 것”이라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이에 IPTV 등 부가시장 업체들은 시청자들에게 양질의 콘텐츠를 제공하려면 자체 선별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올레TV 한 관계자는 “IPTV는 가구 단위로 가입하는 서비스인데다 성인콘텐츠의 주 이용자층이 40~50대 남성이다”라며 “노출수위보다는 영상의 화질, 스토리 등에 중점을 두고 작품을 선별하고 있다”고 밝혔다.
우리나라 에로영화 시장이 양지로 나올 수 없는 배경에 대해 관련 업계들은 저마다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런 이유에 기술의 발전으로 에로영화의 제작 및 공급 환경은 용이해졌지만, 시너지 효과는 창출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의 엇박자 속에서 양질의 콘텐츠에 대한 시청자들의 갈증만 높아지고 있다.
이시연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