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정 씨는 점점 변해갔다. 불우했던 가정환경 탓에 난폭해져갔고, 청년이 된 정 씨는 강도, 폭행 등으로 전과3범이 돼 있었다. 급기야 집까지 나와 모텔, 찜질방, PC방 등을 전전하며 생활했다. 변변한 직업이 있던 것도 아니다. 그저 그때그때 일하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평범한 20대였던 설 씨가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두 사람은 수년간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설 씨는 정 씨가 마음을 잡기를 바라며 1년여 전부터 다시 사귀었다.
정 씨의 주장에 따르면 두 사람은 결혼까지 고민하는 사이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설 씨가 전화를 잘 받지 않는다는 이유로 두 사람은 자주 싸웠다. 결국 올해 초 설 씨는 정 씨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이별통보에도 정 씨의 집착은 계속됐다. 지난 3월에도 설 씨의 집이 비어있는 틈을 타 몰래 들어와 설 씨의 이불 속에 포장용 테이프와 칼을 놓아두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설 씨의 아버지는 정 씨를 따로 만나 “딸에게 집착하지 말아라. 마음 정리해서 놔줘라”고 여러 번 타일렀다.
정 씨는 수개월이 지나도록 마음을 정리하지 못했고 스토킹을 반복했다. 그런 정 씨의 모습이 안타까웠던 동네 선배들은 설 씨에게 새로운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얘기를 전했다. 포기할 거라는 지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정 씨의 행동은 더 엇나갔다. 정 씨는 설 씨를 살해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떻게 범행을 할지 일주일 동안 계획했다. 정 씨가 떠올린 건 방화였다. 셀프주유소에서는 휘발유를 사도 인적사항을 남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생각해냈고 곧 실행에 옮겼다. 지난 13일 설 씨는 인근에 있는 24시간 셀프주유소에서 9000원을 주고 휘발유 5리터를 샀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2리터짜리 페트병 세 개에 휘발유를 나눠 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투숙하던 모텔 방에 휘발유를 숨겨놓고 술자리로 향했다.
이날 밤 정 씨는 동네 형 두 명과 함께 술을 마셨다. 지인들은 정 씨에게 여자친구를 그만 잊으라고 말렸다. 그러나 질투와 복수심이 극에 달한 정 씨를 말릴 수는 없었다. 새벽이 다가오자 정 씨는 범행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술자리를 나서 모텔로 돌아가 휘발유를 가져왔다.
13일 새벽 4시 정 씨는 설 씨의 주택이 위치한 길가 건물 뒤편으로 숨어들어갔다. 설 씨의 집 건물은 앞 건물과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날 수 있을 만큼의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었다. 어떤 일을 벌여도 길을 지나는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구조였다.
설 씨의 방은 1층이었다. 그는 두 평 반 남짓한 방에서 언니와 나란히 누워 자고 있었다. 더운 날 밤이라 창문은 열려있었다. 정 씨는 휘발유를 한꺼번에 뿌리기 위해 페트병의 윗부분을 칼로 잘랐다. 적지 않은 휘발유가 방에 쏟아졌고, 불을 붙이는 순간 자매의 작은 방은 불길로 가득 찼다. 이웃주민들은 “불이 삽시간에 번져서 소방차가 왔을 땐 이미 집이 거의 다 탄 상태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정 씨의 앙심에 화를 입은 건 설 씨가 아닌 설 씨의 언니(30)였다. 자다가 불길이 온몸에 번져 설 씨의 언니는 그 자리에서 숨졌다. 설 씨 역시 몸의 70% 정도 범위에 2~3도 화상을 입었다. 현재 설 씨는 의식은 찾았으나 말은 하지 못하는 상태다. 옆방에서 잠을 자던 설 씨의 어머니 김 아무개 씨(52)도 어깨와 팔에 큰 화상을 입었고, 이웃집에서 자던 박 아무개 씨(32)도 연기를 마시고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다. 이날 집을 비웠던 설 씨의 아버지는 화를 피할 수 있었다.
10평 남짓한 설 씨 자매의 집은 잿더미로 변했다. 이웃 주민은 “16일에 현장검증을 왔었다. 자매의 아빠도 왔더라. ‘내가 그날 같이 집에 있었더라면’이라며 안타까워했다. 큰아이는 죽고, 작은아이가 많이 다친 데다 집까지 다 타버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며 막막해하더라”고 안타까워했다.
방화로 추정되는 불이 나자 설 씨의 아버지는 단번에 정 씨를 떠올렸다. 경찰에게 “둘째와 남자친구의 관계가 심상치 않았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정 씨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꺼 위치추적을 피하고 도주하는 치밀함까지 보였기 때문이다. 경찰은 정 씨가 전날 밤 동네 지인들과 술자리를 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이들을 통해 정 씨를 설득했다. 지인들의 설득에 마음을 바꿔 범행 만 하루 만인 14일 새벽 5시 경찰에 찾아와 자수함으로 정 씨의 ‘엇나간 사랑’은 막을 내렸다.
서윤심 기자 hear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