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치훈 9단
제한시간 각 1시간에 1분 초읽기 5회이며 우승 상금은 500만엔, 준우승은 150만엔. 조 9단은 창설 첫 해에도 우승했다. 제2기는 왕밍완 9단, 3기는 이번에 조 9단과 대결한 고바야시 사토루 9단. 고바야시 고이치 9단과 구별할 겸 국내에서는 ‘사토루’라는 애칭으로 통한다. 일본 바둑의 해외보급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쳤던 누이 고바야시 치즈(小林千壽·60) 5단, 다카유키(孝之·58·준기사) 3단, 겐지(健二, 56) 7단과 함께 4남매 기사로 유명하며 젊었을 때 귀공자풍 꽃미남 외모에 서글서글하고 호방한 두주불사 스타일이어서 국내외에 인기가 있었고, 특히 여성 팬도 많았는데, 몇 년 전 류시훈 9단과 술자리에서 한바탕 한 일로 점수가 좀 깎였다.
조 9단의 새로운 승전보를 들으면서 새삼 실감한다. 일본 바둑의 마지막 황제는 조치훈이었다는 것. 일본이 앞으로 옛날의 영화를 다시 누리게 될 날이 올지는 모르지만, 한-중-일의 패자(覇者) 순환의 법칙에 따라 그런 날이 올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일본 바둑의 전성기는 조치훈과 함께 막을 내렸고, 조치훈의 뒤를 이어 고바야시 고이치가 일본 바둑을 지배하며 대표 노릇을 한 적이 있었으나 이후 일본 바둑의 쇠락을 본다면 그건 가령 어떤 황혼의 후렴 같은 것이었다.
조치훈의 비장미는 숙명이었다. 그의 역정이 그랬고, 가끔씩 그가 남긴 독백은 치명적 울림으로 우리의 심금을 흔들었다. 우리는 가슴 졸이며 그의 소식을 기다렸다. 지면 슬펐는데, 이겨도 슬펐다. 그는 바둑을 두면서 슬픔을 연주하는 것 같았다. 한국 바둑은 그로부터 각성되었고, 돌이켜보면 우리는 그를 통해 일본과 화해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광구 객원기자
기막힌 ‘배붙임’ 소개하는 바둑은 73번째 타이틀의 현장이다. 조치훈이 흑. 처음부터 타격전이었고, 지금도 우상귀에서 복잡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흑의 세력권에 백이 도발하자 흑이 공격하고 백이 타개하는 장면. <1도> 백1-3으로 끊고 빠졌다. 백은 이걸로 타개가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흑4가 백을 창백하게 만들었다. 족보에 있는 맥점으로 크게 분류하자면 ‘배붙임’의 일종인데, 그게 여기서도 통했다. 아니, 조 9단의 수읽기가 그게 통하도록 만들었다. <2도> 흑1로 그냥 막으면 백은 2에서 6으로 간단히 산다. 흑이 먼저 3-5로 살아야 하니까. <3도> 흑1쪽에서 막으면 그만 아닌가? 그런 것 같지만 아니다. 백2 나가고 4쪽을 끊는 맥점이 있다. 흑5면 백6-8로 패. 흑진에서 이런 패가 생기면 안 된다. 그런데 A 자리에 흑돌이 있으면 백8 때 흑B로 이으면서 단수. 백C로 이어야 하니 거기서 흑D로 몰면 된다. A 자리의 흑돌, 그게 <1도>의 흑4다. 백6 때 흑7로 E에 따내면 백7로 몰아 역시 패다. <4도>는 실전진행. 백1-3으로 뚫고 내려갈 때 흑2-4로 따라가면서 꾹꾹 막은 것이 준비된 후속대책이었다. 백5를 기다려 흑6으로 막아 백의 준동을 제압하면서 승기를 다졌다. 흑6 다음 백A는 흑B 이하 분호 순으로 유가무가. <5도>는 마지막 전투 장면이다. 백이 하변에서 중앙을 거쳐 상변까지 길게 이어진 흑 대마를 쫓고 있다. 좌상귀에서 백1로 단수. 흑 두 점이 잡히면 흑 대마는 자체에서 살 수도 없고, 좌상귀 아군과 연결할 수도 없다. 잡힌 건가? 흑2로 끊어도 백3쪽을 이으면 흑이 안 되는 것 같다. <6도>는 실전진행. 흑1로 나와도 백2로 돌려치는 수가 있어 흑은 한 집을 만들 수가 없다. 그러나 조 9단은 다시 한 번 <1도> 흑4와 비슷한 묘책을 강구해 놓고 있었다. 흑5! 이것도 형태상으로는 배붙임의 변형이다. <7도>도 실전진행. 백은 1로 몰았고 흑은 2로 몰아 석 점을 버리면서 선수로 연결한 후 유유히 4로 날아올랐다. 승리를 굳히는 한 수. 조 9단의 당선이 확실시되었다. <6도> 흑5 때 <8도> 백1쪽으로 반발해 나오면? 흑2-4-6으로 회돌이치고(백7은 흑 자리 이음) <9도> 흑1로 이쪽에서 몰아 나가 흑5까지 죽죽 밀고 7로 날일자한다는 것. 거꾸로 백이 헤어날 길이 없어 보인다. 계속해서 <10도> 백~5로 수상전을 해보자고 버틸 수는 있겠으나 흑6부터 좁혀 들어가는 것으로 백이 안 된다. <9도> 흑5 때 백이 <11도> 1로 따내면? 흑2-4 다음 6쪽을 내려서 이건 더 알기 쉽게 백이 잡힌다. 백7-9에는 흑8-10으로 이단젖히기. 새삼스럽게 밝혀둘 것이 있다. 그는 한국말을 더듬지만 일본으로 귀화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눌변이 웅변을 압도할 수 있다는 것도 일깨워 주었던 조치훈이다. 그가 아직 바둑판 앞에 앉아있는 것은 아직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 더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