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살인의 추억>의 한 장면. | ||
사건은 그 참혹성으로도 시민들을 몸서리치게 했지만 그 수법의 대담함과 끈질김에 경찰도 머리를 내저었다. 경찰의 수사가 계속되고 있는데도 범인은 이를 비웃듯 반경 3km 안에서 태연히 살인을 계속했다. 범인은 10대 소녀건 70대 할머니건 가리지 않았다. 경찰은 범인의 DNA도 채취하고 목격자도 확보하고 몽타주까지 그렸지만 범인을 검거하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남자, 당시 25~27세쯤으로 지금은 40대 중반, 168cm 정도의 키에 왜소한 체구, 245mm 정도의 신발 사이즈, 눈이 날카롭고 코가 오뚝한 차가운 인상. 경찰이 목격자의 진술을 토대로 그린 범인의 현재 모습이다.
<일요신문>이 공소시효 만료를 앞두고 현지를 취재하던 중 흥미로운 주장 하나를 들을 수 있었다. 이미 범인은 숨졌을 것이라는 추정이었다. 이 주장의 주인공은 당시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담당했던 한 수사관.
그는 “영화 ‘살인의 추억’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픽션이지만 실제 화성 연쇄살인 사건에도 유력한 용의자는 있었고 나는 아직도 그 사람이 범인이라고 생각한다”며 말을 시작했다. 이 수사관은 “그 용의자의 DNA 일부가 분석 결과 범인의 것과 일치하지 않았던 것은 DNA가 훼손됐기 때문일 수도 있다”면서 “이 용의자는 한 달 동안 집에서 술만 마시다 이미 세상을 떴다”고 거듭 주장했다. 과연 이러한 주장은 얼마나 신빙성을 갖고 있을까. 당시 사건 정황으로 돌아가 보자.
화성 연쇄살인 사건은 1986년 9월 15일부터 1991년 4월 3일까지 화성시 태안읍을 중심으로 반경 3km 안에서 14세에서 71세에 이르는 10명의 부녀자가 살해된 사건이다. 이 중 8차 사건의 범인은 잡혔지만 다른 사건과의 연관성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8차 사건을 두고 일부에서는 일종의 모방 범죄로 화성연쇄살인 사건에서 제외된다고 말하고 있다. 반대로 화성에서 좀 떨어진 수원시 화서 전철역 부근 논에서 1987년 12월 24일 동일한 수법으로 살해당한 김 아무개 양(당시 19)이 동일범의 소행이라는 의견도 있다.
앞에서 언급한 한 수사관의 말처럼 화성 연쇄살인 사건에도 많은 용의자들이 떠 올랐고 실제로 몇몇은 자신이 범인이라고 자백까지 했다. 그러나 결국 증거가 없거나 불일치해 모두 혐의 없음으로 밝혀졌고 이들 용의자 가운데 3명이 이미 사망했다. 이 중 1명은 경찰의 강압 수사로 사망했고 1명은 자살, 1명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사실 어느 누구도 이들이 범인이었다거나, 범인이 아니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다.
범인은 5차 사건에서 결정적인 증거가 될 자신의 DNA를 남겼지만 어느 용의자도 이 DNA와 일치하지 않았다. 연 인원 205만여 명의 경찰 수사 인력이 수사 대상이었던 2만여 명을 직접 조사했고 4만여 명의 지문을 대조했으며 580여 명의 DNA 검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목격자의 진술을 토대로 몽타주가 작성됐고 전국에 수배전단지가 뿌려지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1986년부터 1991년까지 5년간 화성연쇄살인을 수사해 왔고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가 그 역을 맡았던 하승균 씨(60)가 그의 수사기록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범인을 목격한 사람은 세 명. 용의자로부터 성폭행 당한 뒤 유일하게 생존한 여성과 7차 사건을 저지른 후 범인이 타고 간 버스 운전사와 안내양이었다. 이들의 진술은 모두 일치했다. 당시 용의자의 인상착의는 25~27세쯤 되는 젊은 남자로 168cm의 키에 왜소한 체구를 가졌다. 머리 모양은 방위병 정도의 짧은 상고 머리였으며 눈이 날카롭고 코가 오뚝해 인상이 차갑다는 것이었다.
▲ 범인의 몽타주와 이를 토대로 만든 현재의 범인 얼굴. KBS 화면 촬영 | ||
당시 경찰은 버스 운전기사와 안내양을 한 달 동안 수사팀에 합류시켜 수원시내 25개 동사무소는 물론 화성시 태안읍 등 15개 읍사무소에서 25~35세 남자들의 주민등록사진을 모두 확인하게 했지만 결국 범인을 밝혀내지 못했다. 수사 대상자 5만여 명의 기록은 여기서 나온 것이었다.
그 사이 수사본부장인 화성경찰서장은 두 번이나 교체됐고 수사요원도 100여 명까지 늘었다. 전국에서 모여든 베테랑 형사들이었다.
당시 경찰은 제보를 바탕으로 용의자를 찾아내는 한편, 성도착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의 신병을 확보해 오랜 기간 감시하기도 했다. 밤에 여자들 뒤를 미행하다가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 달려들어 껴안는 사람, 초저녁에 남의 집 담을 넘어 창호지에 구멍을 낸 후 안방을 훔쳐보는 사람. 마당에 널어놓은 여자의 속옷을 훔쳐 자기 집에 보관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 대상이었다. 늦은 시간 으슥한 곳에 여경을 투입해 범인을 유인하는 방법도 써보았다. 하지만 범인은 잡히지 않았고 ‘범인은 근처 미군 부대 소속 군인이다. 이미 한국을 떠났다’, ‘경찰 중 한 사람이다’는 등 범인에 대한 무성한 소문만 퍼져나갔다.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허를 찌르는 범인의 대담함과 증거를 남기지 않는 치밀함이 만든 소문들이었다.
그리고 2006년 3월 현재 살아있다면 범인은 어떤 모습일까. 당시 목격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작성한 몽타주가 확실하다면 그는 168cm의 키에 245mm 정도의 신발 사이즈를 가진 40대의 왜소한 남성일 것이다.
현재 화성연쇄살인사건은 화성경찰서 강력3팀을 전담반으로 구성해 5명이 수사를 담당하고 있다. 안광헌 반장은 “10차 사건의 경우 마을이 이미 신도시에 편입돼 재개발됐고 주민들 또한 모두 이주해 현장에서 얻을 것은 없다”면서 “지난 2005년 11월 14일 9차 사건의 공소시효 만료 때 이 연쇄 살인 사건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또 이제 남은 것은 범인이 남긴 정액에서 추출한 DNA를 대조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전했다.
화성경찰서는 얼마 전 11명의 DNA 분석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의뢰했다. 화성연쇄살인 당시 경기지방경찰청 형사계장으로 있다가 화성 경찰서장으로 부임한 최원일 서장은 지난 14일 “우리나라에 DNA 분석 기술이 늦게 도입돼 일본에 분석을 의뢰하면서 과신한 면이 없지 않다”며 “또 범인의 정액과 피해자의 질액이 섞인 상태에서 추출한 증거물로 범인이 B형이라는 것을 단정 지을 수 없다는 의견이 있어 처음부터 수사기록을 검토했고 그 때 B형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제외됐거나 DNA 검사를 하지 않은 용의자들을 재조사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최근 확인한 결과 안타깝게도 검사 결과는 모두 ‘불일치’로 판정됐다. 최원일 서장을 비롯한 전·현직 수사관들은 “공소시효가 만료된 이후 수사를 한다 해도 그것은 마지막 남은 의지일 뿐”이라며 아쉬움을 표하고 있다.
[화성연쇄살인마 공개 수배]
키 : 168㎝
발 사이즈 : 245㎜
특징 : 왜소한 체격의 40대
당시 목격자 “눈 날카롭고 코 오뚝해 차가운 인상”
양하나 프리랜서 han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