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병 9단(왼쪽)이 김일환 9단을 11집반 차이로 크게 이기며 시니어 국수전 우승컵을 들었다.
‘시니어 바둑 클래식’은 만 50세 이상의 프로기사들을 위한 기전. 이번 7월의 ‘시니어 국수전’에 이어 ‘시니어 왕위전(9월)’ ‘시니어 기왕전(11월)’ ‘시니어 국기전(내년 1월)’ ‘시니어 기성전(내년 3월) 등 홀수 달에 5번의 단기 토너먼트를 치러 각각 우승자를 가리고, 마지막에 5회 토너먼트 상위 입상자 8명이 ‘왕중왕전(내년 5월)’을 벌인다. 각 토너먼트 우승 16점, 준우승 8점, 4강 4점, 8강 2점, 16강 1점이며 점수가 같으면 단 서열 상위자 우선이다. 단 서열은 9단→초단 순이고, 단이 같으면 입단을 누가 빨리 했느냐, 입단 시기도 같으면 누가 나이가 많은가로 정한다.
5회의 토너먼트는 각각 1주일 안에 끝난다. 스피디한 진행이 박진감을 높여 줄 것으로 보인다. 왕중왕전 우승상금은 1000만 원, 준우승 400만 원. 단기 토너먼트는 우승 400만 원, 준우승 200만 원.
단기 토너먼트 이름들에서 정감이 묻어난다. 사라진 줄 알았는데 다시 나타나다니 반갑다. <조선일보>의 기왕전은 1996년에 ‘LG배 세계기왕전’으로 문패를 갈았고, <중앙일보> 왕위전, <경향신문> 국기전, <세계일보> 기성전은 사라졌다. 한국 바둑의 중흥과 도약에 발판이 되었던 기전들이다. 이번 시니어 국수전에 참가한 50세 이상의 프로기사는 57명. 이들은 사라진 잊고 있었던 기전들이 다시 나타난 것을 보면서 문득 추억에 잠겼다.
김일환 9단과 최규병 9단이 조훈현 9단과 서봉수 9단을 동반탈락시키며 뜻밖에(?) 주연을 맡아준 덕분에 시니어 바둑 클래식은 첫 무대부터 인기몰이에 성공했다. 시니어라면 뭐니뭐니해도 조훈현 9단과 서봉수 9단인데, 준결승에서 김일환 9단이 조 9단을, 최규병 9단이 서 9단을 제압한 것. 시니어 쪽에서는 오랜 세월 난공불락이었던 조-서였으나 최 9단은 지난해에 제4기 ‘대주배’ 4강전에서 서 9단을 꺾었다. 결승에서 조훈현 9단에게 져 준우승에 머무르긴 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조-서가 넘을 수 없는 벽은 아니라는 자신감을 얻었고, 이번에 그걸 확인한 셈.
그런데 팬들을 더욱 흥분시킨 사람은 최 9단보다 김일환 9단이었다. 조훈현 9단과는 과거에 열 번인가 열한 번인가 만난 기억은 있지만 이긴 기억은 없다. 그런데 이날은 백을 들고 시종 부드럽게 밀어붙였다. 조 9단은 흔들었으나 김 9단은 흔들리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최 9단의 우승을 위해 가장 어려운 상대를 잡아 준 것.
최규병 9단
‘스피디한 진행’을 표방한 대회답게 결승전이 끝나자 바로 시상식이 열렸고, 강명주 이사(지지옥션 회장)는 두 주인공에게 상패와 상금 보드를 전하면서 “0을 하나 더 붙여드리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2층 기자실에서 인터뷰. 최 9단은 환한 얼굴로 대답을 길게 해 주었다. 한 마디를 물으면 친절하고 자세하게 열 마디 이상으로 대답해 주었다. 최 9단은 이번이 두 번째 우승. 1999년에 출범한 맥심커피배(입신연승최강전)의 첫 번째 우승자였다. 9단만 참가하는 대회였는데, 최 9단은 그때 막 9단이 되어 있었다. 이번에도 최 9단은 시니어 중에서 김성래 5단과 함께 1963년생으로 만 50세를 갓 넘은 막내다. 맥심커피배 때도 그랬고 이번에도 처음 생긴 대회에 턱걸이로 출전해 우승한 것. 본인은 “메이저 기전도 아닌데… 크게 내세울 건 없다”고 말하지만, 어쨌든 그것도 이색 기록이다.
시니어 기사들이 다시 공부하고 있다. 그리고 역시 공부하는 사람, 평소 인터넷이든 뭐든 바둑과 떨어지지 않는 사람이 당연히 이긴다. 나이로 볼 때 최 9단 뒤는 유창혁 9단인데, 1966년생이니 만 50세 이상 시니어에 들어오려면 2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유 9단 뒤로는 터울이 크다. 40대 프로기사가 적다는 뜻이다. “유 9단은 시니어 바둑 클래식이 혹시 2년 안에 없어질까봐 걱정하는 눈치…^^”란다.
“저보다는 영찬이가 좀 열심히 해 주면 좋겠는데, 공부하는 모습이 성에 차질 않네요…^^ 저는 어릴 때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4학년 땐가 5학년 땐가 외할아버지 집에서 공부를 했는데, 지쳐서 깜빡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외할아버지가 지나치시면서 그럴 거면 집어 치우라고 하시더군요. 잠결에 그 말씀을 듣고 벌떡 일어났던 기억도 있습니다. 프로기사가 공부하는 양태는 두 가지입니다. 열심히 하는 것과 목숨 걸고 하는 것. 연구생 정도까지는 열심히 하면 된다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일단 프로가 되면 그때부터는 목숨 걸고 해야 합니다. 그런 각오로 한 6개월 공부하다 보면 본인이 느껴집니다. 효과도 나타납니다. 어릴 때 열심히 했는데도 연구생 시합에서 29연패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더 열심히 했더니 그 다음부터는 계속 이기더군요…^^”
그랬다. 청년 프로기사 최규병의 대국 모습에는 비장감이 넘쳤다. 의자에 올라가 무릎을 꿇고 앉은 자세로 마지막 초읽기에 몰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 모습은 1975년 일본기원 선수권전에서 사카다 9단과 5번기를 겨루던 18세 조치훈의 모습과 그 프로필, 그 실루엣이 너무나 똑같았다. 관철동 한국기원 5층은 예선대회장이었다. 거기서 나는 몇 번씩이나 최규병을 조치훈으로 착각하곤 했다. 그 집념이 쉰 넘어 꽃을 피우는 것 같아 반갑기 그지없다.
이광구 객원기자
시니어 국수전 결승 흑 - 최규병 9단 백 - 김일환 9단 백3은 ‘이적수’ 백이 그냥 5로 호구쳐 지킬 때 흑이 실전처럼 6으로 뛰든가 하는 수로 중앙 말을 돌보면 백은 우변을 공략할 수 있다. 흑4의 곳에 붙이고 흑A로 젖힐 때 백B로 맞끊기만 해도 무조건 수가 나는 곳이라고 한다. 또 흑이 그를 방비하면 백은 C 정도로 하변을 다지면서 중앙 흑말에 대한 공격을 계속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국후 김 9단도 웃었다. “나도 왜 그걸 두었는지 모르겠어요. 정신이 없었거든요.” 실전은 흑4로 우변을 고스란히 보전하고 6으로 백7을 불러 중앙 흑말을 선수로 안정시킨 데다가 우하귀 8의 곳, 공수의 요소까지 차지한 것. “그냥 백5로 두고 하변과 우변을 맞보았으면 누가 이길지 모르는 긴 승부였는데, 백3의 엄청난 이적수로 대세는 일거에 기울었고, 여기서부터는 백이 차이를 좁히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