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혁 해설위원.
“물론 기억난다. KIA로 트레이드된 이후의 시즌이었으니까 2003년 정도 된 것 같다. 당시엔 손혁이란 이름보다 아내가 된 프로골퍼 한희원의 남자친구로 더 유명했었다(웃음). 2003년 12월 결혼 후 2004년 4월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진짜 세월이 후다닥 흘러간 것 같다. 벌써 10년 전의 일이 됐으니 말이다.”
―당시 미국에서 투수 인스트럭터 교육을 받다가 3년이나 지난 후에(2007년) 볼티모어 산하 마이너리그팀과 계약을 맺기도 했었다. 물론 부상 재발로 선수 생활을 다시 이어가진 못했지만.
“볼티모어 마이너리그 스프링캠프에 합류해선 재활조에 있었다. 그 후 지금 (윤)석민이가 몸담고 있는 트리플A 경기에는 세 번 정도 등판했던 것 같다. 당시 어깨 부상을 당했다. 운동량이 부족한 상태에서 욕심을 부리다 탈이 난 것이다.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기에 과감히 선수생활을 포기했다. 수술하고 재활해서 다시 마운드에 오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선수로서의 아픔은 있었지만, 짧은 기간 동안 마이너리그 선수들의 생활을 제대로 보고 겪을 수 있었다.”
―지금 노폭 타이즈에 몸담고 있는 윤석민의 선배인 셈이 됐다. 평소 윤석민과는 연락을 주고 받나.
“석민이가 좋은 상태라면 자주 연락하겠는데, 그렇지 않다 보니 문자만 주고받고 있다. 최근에 다시 부상자명단에 올랐다고 해서 걱정했음에도, 정작 그 자신은 씩씩하게 잘 이겨내고 있더라. 한국에 있을 때와는 달리 마인드가 굉장히 건강해졌다. 조급해 하지 않고, 안 좋은 얘기에 귀 기울이지 않고, 예전의 폼을 되찾아가고 있는 과정을 통해 배우는 게 많다고 했다. 석민이가 힘들어진 배경에는 볼티모어와의 너무 늦은 계약도 한몫했다. 미국행을 선언하고 메이저리그 계약을 기다리면서 혼자 훈련을 했었고, 스프링캠프에 뒤늦게 합류하면서 리듬을 잃어버린 게 아닌가 싶다. 더욱이 생전 처음 경험하는 외국 무대라 우리가 모르는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어차피 올해는 큰 기대를 할 수 없다. 메이저리그에서 시작하는 내년부터가 중요한 해이니, 잘 준비해서 제대로 된 몸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으면 좋겠다.”
―포털사이트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운동선수들이 제일 부담스러워하는 게 글쓰기인데….
“방송은 그냥 휘리릭 지나가지만, 글은 두고 두고 남는다는 차이가 있다. 더욱이 (류)현진이 리뷰 방송은 그 자료와 내용들이 저장되지 않고 흘러가는 게 아까웠다. 그래서 쓰기 시작했다. 솔직히 기자들처럼 문맥이나 맞춤법은 완벽하지 않아도, 투수 출신이다 보니 기자들의 시각과는 글 내용이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문법이나 맞춤법이 틀리면 공부 못한 거 티 나는 것 같아 은근 신경 쓰이더라. 다행이 반응이 좋다. 선수시절에는 내가 ‘안티’를 몰고 다니는 선수였는데, 지금은 그 반대가 됐다(웃음).”
―류현진과는 경기 전후로 자주 연락하는 걸로 알고 있다. 류현진이 자신의 투구와 관련해 질문을 하는 선배는 손 위원밖에 없지 않나.
“글쎄, 현진이가 나 외의 또 다른 선배나 지도자에게도 물어보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지난해부터 야구와 관련된 대화를 많이 했다. 현진이는 주로 경기 마치고 문자로 ‘코치님, 제 구속이 어땠어요?’ ‘공 끝은 어떠했던 것 같아요?’ ‘이전과 다른 거 찾으셨어요?’ 등등의 질문을 해온다. 그럴 땐 내가 생각한 내용을 정리해서 보내는데, 그 후에도 계속 질문을 해오는 걸 보면 야구와 관해서만큼은 더 완벽해지고 싶어 하는 욕심이 있는 선수임이 분명하다.”
―최근 류현진이 ‘고속 슬라이더’를 새로 장착했고, 3경기에서 큰 효과를 봤다. 그 대신 그의 주무기인 체인지업의 위력이 감소됐다는 지적을 받았다.
“다저스의 클레이튼 커쇼도 커브와 슬라이더는 기가 막히게 던지지만, 체인지업은 제대로 못 던진다. SK 김광현도 슬라이더만큼 체인지업의 제구가 안 돼 고민이 많았던 친구다. 즉,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의 투구폼이 다르다보니 둘 다 잘 던지기가 어렵다. 고속 슬라이더를 던지기 위해 팔의 각도를 높였는데, 그 상태에서 효과적인 체인지업을 던지기가 힘들다는 얘기다. 이 점은 현진이도 인지하고 있고, 영리한 선수라 곧 그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것이라고 믿는다. 분명한 건, 현진이의 체인지업이 살아나지 않는다면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고속 슬라이더가 위력적이라고 해도 체인지업을 섞어주지 않으면 효과가 반감된다. 선수 스스로 연습을 통해 실마리를 찾아갈 것이라고 믿는다.”
고속슬라이더를 장착한 류현진이 메이저리그에서 맹활약하고 있다. 미국에서 류현진을 만나고 온 손혁 해설위원이 직접 류현진의 슬라이더 그립(왼쪽)과 체인지업 그립(오른쪽)을 보여줬다.
―지금 LA 다저스 선발 로테이션을 보면 오른손 투수인 그레인키 다음에 왼손 투수 커쇼, 그리고 류현진이다. 지난 시즌에는 커쇼-그레인키-류현진이었는데, 어떤 차이가 있다고 보나.
“개인적으론 지난 시즌의 로테이션이 현진이한테는 유리했을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왼손 투수가 이어서 등판하면 상대 타선에선 그 공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 즉 커쇼의 슬라이더를 경험한 타자들이 다음날 등판한 류현진의 슬라이더는 쉽게 공략할 수 있다는 얘기다. 더욱이 다른 선수도 아닌 커쇼 아닌가. 메이저리그 2년차인 류현진이 사이영상을 수상한 다저스의 에이스 다음에 등판한다는 건 굉장히 부담스러울 텐데 그걸 극복해내는 모습을 보고, 감탄이 절로 나왔다. 7월에 LA로 출장 가서 매팅리 감독을 비롯해 허니컷 코치, 포수 A.J.엘리스를 만났는데, 모두 류현진에 대한 칭찬이 엄청났었다. 단순한 립 서비스가 아니라 진심으로 현진이를 좋아하고 실력을 인정하고 존중해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류현진이 2이닝에 8실점을 하고 강판당해도 코칭스태프들은 ‘왜 저럴까’란 생각보다 ‘맞을 때가 됐으니까’라고 받아들인다고 했다. 다저스에서 차지하는 현진이의 위치가 지난 시즌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커졌고, 단단해졌다.”
―류현진이 지난 시즌에 비해 어느 부분에서 진화가 됐다고 보나.
“메이저리그에서 생존하는 법을 몸으로 느꼈고, 그에 맞는 공을 개발해냈다. 지난 시즌 때만 해도 현진이는 새로운 공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주무기 체인지업이 잘 먹히는 상황에서 굳이 다른 걸 연구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올 시즌 체인지업이 맞기 시작하자 현진이는 그제야 변화를 감지했고 허니컷 코치, 커쇼로부터 커브와 슬라이더를 배워 일주일 만에 신무기로 만들어 버렸다. 정말 대단한 일이다. 나도 투수를 했지만, 그토록 빠른 시일에 새로운 구종을 추가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현진이는 해냈고 앞으로 그 공을 잘 써먹을 것이다. 현진이가 훈련하는 걸 보면 대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대표팀 인스트럭터로 있을 때 느낀 건 훈련 많이 한다고 소문난 (정)근우보다 더 열심히 연습을 했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구종을 일주일 만에 실전에서 던진다는 게 어느 정도로 어려운 일인가.
“슬라이더나 체인지업을 던질 때 그립을 잡는 위치가 다르다. 그런데 현진이 말로는 그 그립은 중요하지 않다고 하더라. 똑같은 그립을 잡아도 투수에 따라 던지는 방법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커쇼로부터 슬라이더 그립 잡는 법을 배웠지만 지금의 고속 슬라이더는 ‘류현진 스타일’로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 그런 공을 연습만 하는 것도 아니고 타자를 세워 놓고 던져서 성공시킨다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다. 메이저리그 타자를 세워 놓고 일주일 동안 연습한 공을 직접 던진다? 이건 내가 아는 지식에선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현진이는 멋지게 해냈다. 현진이는 자기 공에 대한 믿음이 있다. 그리고 그 공에 대한 집중력이 놀라울 정도로 좋다.”
―고속 슬라이더를 계속 던질 경우 어깨에 무리가 와 부상 위험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 점도 현진이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현재로선 어깨에 전혀 부담이 없다고 했다. 만약 불편했으면 아예 던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현진이랑 얘길 나누다 보면 기술적인 면에서 공부도 되지만, 심리적인 면에서 배울 점이 많다. ‘어떻게 해야 저토록 무덤덤할 수 있지?’ ‘공부 안하는 것처럼 보여도 밤새 공부하는구나’ ‘난 저 나이 때 저런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와, 정말 무서운 놈이다’ 싶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간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은 내가 현진이로부터 배우는 게 훨씬 많다. 현진이가 등판하는 날은 그래서 더욱 설렌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