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기록은 깔끔했다. 본인이 자백하고 증인 진술들도 일치됐기 때문이다. 그는 검사에게 희망을 걸었다. 많이 배운 사람이니까. 그러나 검사는 사정을 호소하는 그에게 화를 냈다. 자백해 놓고 귀찮게 굴기 때문이었다.
판사들도 다르지 않았다. 3심제가 있지만 컨베이어에 실려 가는 물품처럼 자동 확정이었다. 대법원 판사는 얼굴도 보지 못했다. 기록만 보는 높은 법관이기 때문이다. 어려서 감옥에 들어가 어느덧 나이 사십이 가깝게 된 그는 끓인 된장찌개를 한번 먹어보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착한 판검사들이 농락당하는 경우도 봤다. 돈을 많이 가진 악마 사업가가 있었다. 그는 한 사람쯤은 법으로 똘똘 말아 지옥으로 보내기가 누워서 식은 죽 먹기라고 했다. 그가 연출을 맡아 한 사람에게 고소를 하게 하고 다른 여러 명을 참고인으로 등장시켜 앵무새처럼 일치된 진술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순진한 검사와 착한 판사는 여러 사람의 일치된 진술을 당사자 절규보다 훨씬 좋아하더라는 것이다. 그럴듯한 논리와 증거를 제공하면서 검사와 적당한 유대관계를 형성해 놓으면 법은 철저히 자기편이라고 했다.
그는 자기가 쳐 놓은 덫에 걸린 사람에게 수십억 원의 뒷돈을 요구하기도 했다. 감독인 그가 연기자로 등장시킨 증인들의 대사를 바꾸면 무죄가 되기 때문이다. 제단 뒤에서 벌어지는 악마들의 연출을 법관들은 모른다. 그런 현상도 대법원 판결과 진실이 다른 경우였다.
일반적인 재판도 마찬가지다. 소송을 여러 번 경험했던 한 여성은 재판의 핵심을 이렇게 정의했다. 법정에서 거짓말대회를 하고 판사들은 더 그럴듯한 논리를 가진 사람의 손을 들어주는 게 재판이더라고. 그 말도 일리가 있다. 법관생활을 오래한 한 법원장은 결국 논리 쪽으로 도망할 수밖에 없는 게 판사의 입장이라고 고백했다.
가짜들이 설치는 세상이다. 가짜가 진짜보다 훨씬 논리적이고 배우를 뺨칠 정도로 연기를 잘한다. 생명 없는 기록과 메마른 논리로 만들어지는 대법원 판결문은 실체적 진실과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조폭의 고문이라고 해서 징역을 다 살고 나온 한 인물이 공개적으로 도전장을 냈다. 대법원 판결은 유죄로 확정됐지만 이제부터 진실게임을 해보자는 것이다. 수레바퀴 앞에서 사마귀가 싸우자고 폼을 잡는 격이다. 여론이 그의 편이 아니고 사법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에 던져진 의미 있는 화두라는 생각이 든다. 논리를 앞세우다 진실을 왜곡한 엉뚱한 대법원 판결문을 많이 보았다. 법관의 고질적인 불신증세가 절규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제도는 그럴듯해도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고 눈에 비늘이 끼면 봐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게 된다.
판사에게 신적인 걸 원하는 건 아니다. 솔로몬의 지혜도 바라지 않는다. 그들이 귀를 열고 법대 아래 있는 사람의 마음을 보려는 노력이 있었으면 좋겠다.
엄상익 변호사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