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위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래디컬 SR8LM, 포르셰 918 스파이더, 파가니 존다 R.
뉘르부르크링(Nürburgring)은 독일 중서부 라인란트팔트주 뉘르부르크(Nürburg)에 있는 레이싱 서킷(circuit:경주용 환상 도로)이다. 흔히 ‘링’(The Ring)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링’은 독일어로 원형 시합장이나 환상 도로를 의미한다. 일반인에겐 다소 낯설지만, 뉘르부르크링은 카 마니아 사이에서 ‘모터레이싱의 성지’로 통한다. 그만큼 유서 깊고 사연도 많은 트랙이기 때문이다.
‘위키백과’에 소개된 뉘르부르크링의 탄생 배경은 흥미롭다. 그 뿌리는 1920년대에 ‘ADAC’라는 유럽 최대 자동차 클럽이 주최하던 ‘아이펠레넨’ 경주와 닿아 있다. 아이펠레넨은 뉘르부르크 근방 아이펠 산맥의 공공도로를 달리는 경주였는데, 험난한 산악지형으로 인해 전용 서킷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여기에 당시 바이마르공화국 정부의 ‘실업자 구제사업’이 절묘하게 맞물려 ‘전용 서킷’인 뉘르부르크링 건설이 시작됐다고 한다. 2년간의 대공사 끝에 1927년 완공된 뉘르부르크링은 이듬해 독일 그랑프리 전용 서킷으로 선정되고 각종 자동차 경주를 개최하면서 명소로 떠오르게 된다. 메르세데스-벤츠의 경우 1929년 고급형 자동차를 출시하면서 모델 이름을 ‘뉘르부르크’라고 짓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잠시 주춤했던 뉘르부르크링의 ‘질주’는 1951년 FIA(국제자동차연맹)의 공식인증을 받고 F1(포뮬러 원) 트랙으로 선정되면서 화려하게 이어진다. 독일 그랑프리, 유럽 그랑프리 등 각종 대규모 대회가 열리고, 아르헨티나 출신 후안 마누엘 판지오(F1 월드챔피언십 5회 우승), 영국 출신 재키 스튜어트(F1 월드챔피언십 3회 우승) 등 전설적인 드라이버가 탄생하면서 뉘르부르크링의 명성도 한껏 높아지게 된다.
독일 레이싱 서킷 ‘뉘르부르크링’은 고저 차가 큰 산악지대를 아우르고 있어 ‘녹색지옥’이란 별명이 붙었다. 출처=www.nuerburgring.de
그러나 뉘르부르크링의 명성 뒤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초창기 뉘르부르크링은 크게 북쪽 서킷인 ‘노르트슐라이페’와 남쪽 서킷인 ‘쥐트슐라이페’로 이루어졌는데, 산악지대를 아우르고 있어 험난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최대 300m가 넘을 정도로 코스의 고저 차가 크고, 수많은 코너가 곳곳에 자리해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오죽했으면 F1 영웅이던 재키 스튜어트가 ‘녹색 지옥’(Green Hell)이란 별명을 붙였을 정도였다. 위험하고 난이도 높은 서킷이란 점은 뉘르부르크링의 매력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했다. 급기야 1970년 이곳에서 열린 F1 네덜란드 그랑프리에서 사망사고가 일어나면서 F1 선수들이 뉘르부르크링 F1 대회를 보이콧하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이후 안전성을 높이기 위한 대대적인 트랙 보수가 이어졌지만, 뉘르부르크링의 역사는 불운의 사고로 다시 한 번 얼룩지게 된다. 결국 빈번한 사고와 논란으로 인해 뉘르부르크링은 F1 서킷에서 제외되는 수모를 겪기에 이른다. 절치부심한 뉘르부르크링 측은 1984년 F1 서킷용 대규모 공사를 벌여 새로운 남쪽 서킷인 ‘GP(그랑프리의 약자)-슈트레케’를 만들어낸다. 이전의 남쪽 서킷에 비해 노폭을 넓히고 고저차도 줄여 안전성을 높인 트랙이었다. 뉘르부르크링은 GP 슈트레케 완공을 계기로 다시 F1 대회를 개최하며 성공적으로 세계 레이싱 무대에 복귀하게 된다.
북쪽 서킷인 ‘노르트슐라이페’ 역시 1970년대 이후 수차례의 공사를 통해 코너 수를 줄이고 노폭을 넓히게 된다. 흔히 뉘르부르크링 하면 이 북쪽 서킷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은데, 현재 이 코스는 초창기에 비해 길이는 2㎞가 준 20.8㎞, 코너 수도 6개가 준 154개로 이뤄져 있다. 하지만 다른 지역의 F1 서킷에 비하면 여전히 난코스 중의 난코스라 할 수 있다. 노르트슐라이페의 트랙에는 수많은 낙서가 바닥에 기록돼 있는데, 대부분은 경주 중 사망하거나 다친 레이서를 기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험난한 지형과 높은 난이도 덕분에 뉘르부르크링은 전 세계 자동차 메이커들이 차량 성능을 테스트하는 상징적 코스로 자리 잡게 됐다. 어려운 주행 여건 때문에 뉘르부르크링 랩타임(트랙을 한 바퀴 도는 시간)은 그 자체가 코너링과 제동 능력, 엔진 성능 등 자동차의 능력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수치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현재 뉘르부르크링 북쪽 서킷인 ‘노르트슐라이페’ 랩타임 순위 중 1위에 기록된 자동차는 2009년 1랩을 6분 48초에 주파한 영국 경주용자동차 전문업체 래디컬(Radical)의 SR8LM이다. 양산형 자동차로는 6분 57초를 기록한 포르셰 918 스파이더(Spyder)가 최고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이탈리아 슈퍼카 메이커인 파가니의 ‘존다 R’이 2010년 테스트 주행에서 6분 47초의 랩타임을 끊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상당수 유명 자동차 메이커들은 모델 개발 단계부터 뉘르부르크링에서 차량 성능을 점검하고 있다. 실제로 요즘도 뉘르부르크링 북쪽 서킷에서는 위장막으로 감싼 채 시험주행을 하는 다양한 브랜드의 차들을 엿볼 수 있다. 모터레이싱의 메카이자, 유명 자동차 메이커들이 세계 최고의 꿈을 벼르는 장소가 바로 뉘르부르크링인 셈이다.
이정수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