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프랜시스 파머가 위법 행위로 경찰에 체포돼 끌려가는 모습.
아버지가 돈 많이 버는 유명한 변호사였지만, 프랜시스는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개척했다. 극장 안내원, 웨이트리스, 가정교사, 공장 노동자 등을 거치며 번 돈으로 대학 등록금을 마련한 그녀는 여전한 글 솜씨로 ‘보이스 오브 액션’(The Voice of Action)이라는 좌파 신문의 공모전에서 1등으로 당선된다. 상금은 없었지만 당시 공산국가였던 모스크바를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그녀는 한동안 소련에 머물며 예술에 심취한다. 다시 대학으로 돌아온 그녀는 학교가 있는 시애틀이 아닌 뉴욕으로 갔다. 배우가 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연극 무대를 원했지만, 그녀를 발견한 사람은 파라마운트에서 신인을 발굴하던 오스카 설린이라는 사람이었다. 가능성을 확신한 설린은 신인에겐 파격적인 7년 계약을 제안했고, 프랜시스 파머의 배우 생활은 시작된다.
그녀는 초기부터 승승장구했고,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일반적인 스타는 아니었다. 당시 할리우드 스타 시스템은 배우를 인간이 아닌 재산으로 여겼다, 스튜디오는 오로지 스타의 외모만을 보고 타입 캐스팅을 했으며, 배우의 이미지를 조작하고 사생활을 날조해 가십 산업을 부추겼다. 프랜시스 파머는 당시 이러한 관행에 저항했다. 그녀는 파티에도 안 가고 패션에도 무관심했다. 결국 그녀는 ‘진정한 배우’가 되기 위해 할리우드를 떠나 뉴욕으로 갔고, 이후 할리우드와 브로드웨이를 오가며 활동한다.
프랜시스 파머
프랜시스 파머를 체포하기 위해 경찰은 당시 그녀의 거주지였던 니커보커 호텔로 갔다. 강제로 끌려가던 그녀는 완강히 저항했고, 법정에선 경찰이 자신의 인권을 침해했다고 주장했고, 급기야 판사에게 잉크병을 집어던졌다. 판사는 6개월형을 선고했고, 퇴정하던 그녀는 경찰을 때려 멍을 들게 할 정도로 난폭했다. 타블로이드 신문은 대목을 맞이해 매일처럼 파머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녀는 교도소에 가는 대신, 당시 LA의 보안관이었던 올케 언니의 도움으로 LA 종합병원의 정신 치료 감호소로 갔고 그곳에서 조울증 판정을 받는다.
이때부터 그녀의 병원 순례는 시작된다. 며칠 후 그녀는 라 크레센타에 있는 킴볼 요양소로 보내졌고, 그곳에선 편집증적 정신분열증 판정을 받아 인슐린 쇼크 치료를 받았다. 당시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치료로, 강한 메스꺼움이 부작용이었다. 견디다 못한 그녀는 병원을 탈출해 30킬로미터 이상을 걸어 의붓자매인 리타의 집으로 갔다. 이후 어머니인 릴리언 파머는 딸을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법정 투쟁에 들어갔고 승리했다. 하지만 6개월 이후, 프랜시스 파머는 어머니를 물리적으로 공격했고, 웨스턴 스테이트 병원으로 보내진다. 그곳에서 전기 충격 요법의 치료를 받은 그는 3개월 만에 완전히 치료되었다며 석방된다. 이때부터 그녀의 이상한 행동은 시작된다. 집으로 돌아오던 중 도망친 그녀는 히치하이킹으로 만난 어느 가족과 생활하다가 캘리포니아에서 부랑자로 살았고, 체포된 후엔 어머니의 뜻으로 다시 웨스턴 스테이트로 들어가 5년을 더 보냈다.
그렇다면 그녀는 그곳에서 어떤 경험을 했던 걸까? 1970년 8월 1일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에 발간된 자서전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녀는 노예였고 인간 마루타였다. 의사와 잡역부의 성적 노예였고, 쇠사슬에 묶여 독방에 갇힌 적도 있었다. 구속복을 입은 채 얼음으로 가득한 욕조에 빠져 익사 직전까지 갔고, 상한 음식을 먹어 중독 증세가 오기도 했으며, 쥐들이 그녀를 갉아댔다. 자기가 싼 대변을 먹도록 강요당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뇌전두엽 절제술에 비하면 이 모든 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다음 주엔 이 이야기를 이어볼까 한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