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선 승리로 ‘힘받은’ 노무현 대통령(왼쪽)이 업무에 복귀하면 ‘힘의 정치’를 선보일 것이라는 분석이다. 사진은 지난 4월21일 정동영 의장 등 열린우리당 지도부와 만찬장으로 이동하는 노 대통령. 청와대사진기자단 | ||
5월 중순으로 예상되는 노 대통령의 복권 이후 국정 운영 스타일은 한마디로 ‘권위 있는 대통령의 힘 있는 통치’다. 일언일행(一言一行)에 정부부처는 물론이고 국회에 말발과 영향력이 팍팍 먹히는 위상 굳히기다. 권위와 힘은 안정적 국정 운영의 필수요건이다. 말이 곧 정책으로 연결된다면 국민들이 갖는 신뢰도 증대할 것이다.
최근 노 대통령이 17대 총선 직후 여권 수뇌부를 청와대로 초청한 자리에서 “국민이 신뢰할 수 있도록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해나가겠다”고 한 것은 바로 힘 있는 대통령에의 자리매김을 위한 ‘희망가’에 다름 아니다. 다음 두 가지의 사례는 향후 국정 운영과 관련한 노 대통령의 최근 의중과 각오를 말해준다.
상황1. ‘탄핵국면을 정면 돌파하라’〓청와대 내에서 헌재의 탄핵심판과 관련해 ‘정면돌파론’이 득세한 것은 국회의원 총선거 이후 노무현 대통령의 태도 변화를 말해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요체는 총선에서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심판이 내려진 만큼 이제는 헌재에서 법적 심판을 받음으로써 완전한 법적, 정치적 면죄부를 받고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권의 한 관계자가 전한 청와대 정무수석실 및 홍보수석실 등의 기류.
“그동안 열린우리당이 ‘결자해지론’ 또는 ‘정치적 해결론’ 등의 이름으로 탄핵 철회론에 비중을 두어왔습니다. 여야 대표회담을 통한 정치적 해결을 하자는 것이었죠. 청와대도 처음엔 이를 ‘솔로몬식 해법’이라며 지지해 왔습니다. 하지만 총선 승리 이후 분위기가 급변했습니다. 정면돌파론자들은 탄핵 철회가 탄핵론자들에게 두고두고 저항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정면으로 승부를 걸어 확실한 판정을 받아내야 한다는 입장을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총선 승리로 헌재 판결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됐음을 반영한 것입니다.”
상황2. ‘국정 운영, 소신대로 한다’〓노무현 대통령이 최근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나눈 대화 가운데 알려지지 않은 발언 한 도막.
“지난 1년간 경제분야의 성과가 없다구요? 1년 안에 경제에서 성과를 내라고 하는 것은 여자에게 ‘석 달 안에 애를 낳으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히틀러가 독일 경제제도를 바꾸는 데 꼬박 3년이 걸렸고, 아일랜드가 사회협약 이후 제대로 성과를 내는 데 6년이나 걸렸습니다. 짧게 잡아도 핀란드가 과학기술정책을 수립하는 데만 2년이 걸렸습니다. 경제분야에서 성과를 내려면 적어도 3년 내지 5년은 걸립니다. 만약 10년 걸려서 정부 혁신 잘했다고 하면 세계역사나 행정학 교과서에 위대한 성공사례로 나오지 않겠습니까.”
위에 나타난 상황들은 노 대통령의 향후 국정 운영의 기조와 방향에 대한 깊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노 대통령의 한 측근 의원은 “노 대통령은 집권 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권위를 느껴보길 원하고 있다”면서 “여당이 과반 의석을 점유한 이 시점이 대통령이 힘을 갖고 국정을 소신껏 수행할 적기이며, 지금을 놓치면 영원히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여권에서 구체적으로 전망되는 노 대통령의 향후 국정 운영 스타일을 ‘4대 계명’으로 요약해본다.
◆첫째 계명, 분리통치(divide & rule)한다〓여권 운용 구상이다. 분리통치는 권력자의 오래된 통치술이다. 과반 의석 확보로 거대여당이 된 여권 지도부의 한쪽으로 권력이 쏠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현실인식에서 출발한다.
여권의 한 친노 인사는 “현재 친노그룹 일부를 제외하면 당은 크게 정동영 의장 그룹, 김근태 원내대표 그룹, 개혁당 그룹 등 세 그룹”이라며 “이 세 그룹을 적절히 분리통치하는 게 노 대통령의 일차적인 여권 운영 구상”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정동영 의장에게는 당의 체제를 정비하도록 하는 임무를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정 의장은 최근 청와대 면담 직후 언론 등을 통해 “당이 당헌당규를 정비하고 지도체제를 다시 갖춘 뒤 전당대회를 열어 의장직 사퇴 여부를 결정지을 것”이라고 밝혔다. 아직은 몇 달 후의 얘기이지만 사실상의 의장직 사퇴 입장 천명이다.
사퇴 이후 정 의장의 거취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 ‘내용 없이 이미지만 갖고 있다’는 평을 들어온 그로서는 총선 승리라는 훈장을 갖고 얼마 동안은 내공을 쌓는 기회를 갖는 게 자신으로서도 불리할 게 없다는 판단을 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노 대통령은 김근태 원내대표에게는 입각을 권유했다는 설이 유력하게 떠돈다. 김 대표에 대한 ‘입각 권유설’은 명분상으로는 김 대표에게 행정경험의 기회를 부여한다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1백52석 거대여권의 운영자라는 막강한 권력의 칼을 주지 않겠다는 뜻으로도 풀이된다. 이런 시각은 노 대통령과 김 대표와의 전적인 화해가 근본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의 토대 위에 있다. 이 경우 원내대표감으로는 ‘벤처 캠프’ 시절 이후 줄곧 노 대통령의 최측근 정치인이었던 천정배 의원이 유력하게 떠오른다.
◆둘째 계명, 군림하지 않으나 지배한다〓당·청 관계다. 첫째 계명과 긴밀한 상관관계가 있다.
노 대통령은 과반 의석을 확보한 열린우리당과의 관계를 수평적 관계로 이끌어가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노 대통령은 여권 수뇌부와의 회동에서도 탄핵문제가 해결된 뒤 곧바로 입당하겠지만, 선출직 공직후보자 공천권이나 당직 임명권에는 관여하지 않음으로써 당의 자율적 운영을 보장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주요 정책 주도권은 내각과 당에 위임하며 정부 주요 정책 가운데 일부는 당에 상당 부분 주도권을 주겠다는 뜻도 내비쳤다.
그러나 당에 대한 영향력은 더욱 강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여권의 주요 관계자들은 “대통령은 주요 당원으로서 당 개혁 문제나 전반적인 국정 운영 기조에 대해서는 수시로 큰 틀의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당이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에서 일탈하는 것은 제어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갖고 있다”고 말했다.
문희상 정치특보에게 당과 청와대의 가교 역할을 맡긴 점도 예사롭지 않다. 노 대통령은 특히 총선 후 ‘유력 당원’이란 용어를 사용하면서 “(당에) 할 말은 하겠다”고 다짐했다. 당·정 분리의 원칙은 지키되 당 체질 개선 및 정치개혁 등 거시적 사안에 대해서는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내보인 것이다. 이 경우 ‘통추’ 출신인 김원기 유인태 원혜영 김부겸 당선자나 이강철 김정길 전 의원 등과의 비공식 협의체제가 강화될 가능성도 크다.
◆셋째 계명, 권력 분산은 없다〓권력구조 문제다. 책임총리제 등 분권형 통치는 가당치 않다는 의미다.
고건 총리가 탄핵심판이 마무리된 후 총리직을 사퇴하겠다고 천명함에 따라 후임 총리의 인선에도 관심이 쏠린다. 총선 전 야당은 물론 여당 일각에서 조차 ‘권력분산형 개헌’의 실현 가능성을 점치는 인사들이 적지 않았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결론적으로 노 대통령의 사전(辭典)에 권력분산은 없고, 따라서 책임총리도 없다. 대신 관리형 총리가 임명될 것이 확실시된다.
여권의 한 고위 인사는 이와 관련, “노 대통령의 책임총리 구상은 열린우리당이 원내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하는 경우를 상정한 것이었지만 이번 총선을 통해 강력한 통치기반이 마련된 마당에 책임총리에게 국정을 맡기고 뒤로 물러날 이유가 없다고 본다”고 잘라 말했다. 이 인사는 “총리 인선 문제는 차기구도와 직결된 문제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노 대통령이 이번에는 책임총리보다 관리형 총리를 선호할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넷째 계명, 대화하되 압도한다〓대야(對野)관계다. 노 대통령의 향후 국정 운영 기조 가운데 가장 큰 변화가 대야관계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일단 노 대통령은 승자의 여유를 갖고 여권 지도부에 야당측을 여유 있게 대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그동안 집권 후 야당과 대치하면서 정면돌파 방식을 선택해 온 것은 여소야대 정국에서의 특별한 위치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과반 의석 확보로 야당과의 관계에 여유가 생긴 마당에 그런 태도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국회 의석수에서 야당보다 우위에 선 만큼 대야 협상력이 커졌고, 따라서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야당과 ‘협력의 정치’를 본격적으로 구현하겠다는 것이다.
여권 일각에서 야당 영입론이 솔솔 일고 있는 것 역시 실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힘이 있어야 압도하고, 압도해야 대화와 타협과 상생을 외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1백52석이라는 불안한 과반으로는 힘 있는 대통령을 유지해 나가기가 어려운 것이라는 판단도 내재돼 있다.
열린우리당 내에서는 일차적으로 민주당 내에서 ‘우리당행’을 할 가능성이 있는 당선자들을 상대로 영입교섭 준비를 완료한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의 한 핵심 관계자는 “조만간에 노 대통령이 야당 의원과 개별 접촉도 활발하게 벌이고, 필요하면 야당 인사의 입각까지도 고려할 것”이라고 말했다.
허소향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