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치 클리어링은 대부분 보복성 사구로 인해 일어난다. 2012년 7월 15일 열린 삼성-KIA 경기와 올 4월 8일 열린 넥센-KIA 경기(원 안). 사진제공=KIA 타이거즈
# 왜 일어나나
A 선수는 “사실 벤치 클리어링은 순식간에 일어나지 않는다. 분명히 전조 증상이 있다. 우리가 보복해야 하거나 보복을 당할 만한 사건이 있었다면, 다들 말하지 않아도 느끼고 긴장 상태로 돌입한다”며 “뜬금없이 선수 한 명이 맞았다고 해서 막 뛰어나가는 건 아니다. 그 전부터 분위기를 감지하고 상황을 판단한다”고 귀띔했다. 특히 벤치에서 이미 빈볼을 주문해놓은 상황이라면 긴장감은 더 커진다. 주로 투수코치나 베테랑 투수가 후배 투수에게 지시를 내린다. A 선수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머뭇거리는 사람은 없다. 붙을 것 같다 싶으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 나간다”며 “보복 투구나 빈볼 때문에 이미 앙금이 쌓였던 팀들이라면 조금 심각하게 번질 가능성도 많다”고 귀띔했다.
벤치 클리어링의 가장 주된 원인은 당연히 몸에 맞는 볼이다. B 선수는 “같은 선수에게 연타석으로 사구가 나오거나, 한 경기나 한 시리즈(3연전)에서 몸에 맞는 볼이 너무 많이 나오면 선수들이 전체적으로 예민해진다”며 “고의였든 고의가 아니었든, 상대팀에 ‘좀 더 조심해서 던지라’는 메시지는 줘야 하기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처음에는 정말 우연히 타자 몸쪽으로 공이 날아갔더라도, 그 후의 대처 때문에 일이 커질 때도 있다. 주로 투수가 후배이고 타자가 선배일 때 그렇다. 몸에 공을 맞은 타자가 투수를 노려봤는데, 투수가 사과의 제스처 없이 고개를 들고 맞서면 타자 쪽이 흥분한다. C 선수는 “일부러 맞힌 게 아니라 해도 공을 맞은 타자는 고통이 심하고 순간적으로 화가 난다. 한국 정서상 미안하다는 손짓 한 번만 해도 감정싸움은 피할 수 있다”고 했다.
사실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벤치 클리어링은 거의 없다. 3연전 기간 동안 보복의 기회를 잡지 못하면, 다음 3연전까지 유예될 수도 있다. D 팀과 E 팀이 빈볼로 벤치클리어링을 벌이던 날, D 팀의 베테랑 선수가 E 팀 고참 선수들에게 “준비하고 있으라”고 미리 마음의 준비를 시켰을 정도다.
# 똘똘 뭉치는 효과
한 팀이 연패에 빠졌거나 특정 상대에게 계속 일방적으로 당할 때, 야구 관계자들은 “고참 선수들이 일부러 도발해서 벤치 클리어링을 일으키는 것도 분위기 전환에 좋은 방법”이라고 말하곤 한다. 실제로 선수들도 그 효과를 직접 체감한다. 앞서의 A 선수는 “벤치 클리어링을 마치고 더그아웃으로 돌아올 때, 암묵적으로 하나가 되는 뿌듯함을 느낀다. 누군가가 ‘다들 나와 싸워!’라는 지시를 하지 않아도, 우리 동료가 불이익을 당했을 때 자발적으로 함께 돕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며 “벤치 클리어링 이후 더그아웃에서 확실히 응집력이 생긴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 기댈 수 있는 동료가 있고, 이 팀의 구성원이라는 자부심이 든다”고 설명했다.
F 선수도 “솔직히 한 팀에 있어도 서로 사이가 별로 안 좋은 선수들이 있다. 은근히 따돌림을 당하는 선수도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내가 상대 선수한테 공격을 당했을 때 모두가 내 옆에 있어주는 그 순간, 서운함이 눈 녹듯이 사라지고 단결이 된다”고 귀띔했다. 투수인 G 선수 역시 “내가 역전 3점 홈런을 맞고 나서 스스로 흥분을 못 참고 다음 타자를 맞힌 적이 있다. 그냥 내 잘못인데도, 나보다 열 살은 더 많은 선배들과 바로 아래 후배들이 모두 나와서 싸워주는 걸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고 털어 놓았다.
그 사이 모두가 함께 웃을 수 있는 얘깃거리도 생긴다. 한 불펜 투수는 “외야에 있는 불펜에서 열심히 달려 나왔는데, 워낙 사소한 싸움이라 내가 마운드에 도착했을 때 이미 선수들이 다 더그아웃으로 돌아가고 있었다”면서 “난 마운드에 발만 찍고 엉거주춤 다시 불펜으로 달려가야 했다”고 귀띔했다. 한참 흥분하던 와중에 상대팀 코치였던 학창시절 은사를 맞닥뜨리는 바람에 황급히 뒤로 물러서야 했던 선수도 있다. 또 각 팀마다 ‘빈볼 제구력’이 좋은 투수들이 따로 있어서, 때로는 타이밍에 맞춰 일부러 투수를 교체하기도 한다. 앞서의 B선수는 “주로 어느 정도 경력이 있고 잘 위축되지 않는 투수들이 낙점된다”고 했다.
# 불문율은 있다
야구에는 몇 가지 불문율이 있다. ‘점수차가 크게 벌어졌을 때는 도루를 하지 않는다’, ‘상대의 사인을 훔쳐보지 않는다’, ‘상대를 불쾌하게 만드는 과도한 세리머니는 자제한다’ 등이 대표적이다. 한 팀이 이 불문율을 위반할 때 상대팀이 빈볼을 던지고, 그 빈볼이 결국 벤치 클리어링으로 이어진다. 가끔은 ‘불문율’의 기준을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기도 한다. “5~6점차 정도면 굳이 한 점을 더 뽑기 위해 도루나 번트를 시도해 상대팀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도 있지만, “올해처럼 타고투저 현상이 극심한 시즌이라면 5회 이전에는 8~9점 차도 안심할 수 없다”는 반론도 많다.
물론 보복을 위한 빈볼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는 불문율이 따른다. ‘머리 쪽으로는 던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선수의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라서다. 1956년 선린상고 야구부 소속 최운식이 빈볼을 맞아 세상을 떠났고, 메이저리그에서는 1920년 레이 채프먼이 빈볼로 사망했다. 한국 프로야구에도 안면 쪽에 공을 맞아 큰 부상을 입었던 선수들이 수두룩하다. 전 현대 간판타자 심정수가 광대뼈가 함몰돼 안면보호용 검투사 헬멧을 착용했던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치료와 재활을 마치고 복귀한 후에도 한동안 후유증을 호소하곤 한다.
사실 그라운드의 불문율이 깨졌을 때 타자들은 스스로 빈볼을 직감한다. 일부러 타석에서 물러나 있기도 하고, 공이 날아와 몸에 맞더라도 별다른 반응 없이 1루로 걸어 나간다. 빈볼을 던질 만한 상황을 이해해서다. 그러나 빈볼의 불문율이 깨졌을 때는 타자도 크게 반발하고, 더그아웃의 선수들도 공분한다. 현역 시절 후배 투수와 대립해 벤치 클리어링의 원인이 됐던 H 코치는 “당시 2루타를 치고 나갔다가 포수의 사인이 보여서 슬쩍 동료 타자에게 알려줬는데, 상대팀이 눈치를 챈 것 같았다”며 “빈볼을 각오하고 타석에 들어섰지만, 공이 연속으로 머리 쪽으로 날아와서 어쩔 수 없이 뛰어나갔다”고 털어 놓았다. 물론 그 투수 역시 ‘제대로 응징하라’는 벤치의 지시에 충실하게 따랐을 뿐이다. 다만 공식적으로는 “내가 일부러 머리 쪽으로 던졌다”고 말하는 투수도, “내가 빈볼을 지시했다”고 털어놓는 지도자도 없다. 이 또한 불문율이라서다.
배영은 스포츠동아 기자 yeb@donga.com
ML 벤치 클리어링 살펴보니 ‘박찬호 이단옆차기’ 역대 최강 난투극 메이저리그의 벤치 클리어링은 한국 프로야구보다 훨씬 더 과격하다. 전 구단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이 지연과 학연으로 얽힌 한국식 선후배 문화가 존재하지 않아서다. LA 다저스 류현진도 메이저리그 진출 첫 해부터 제대로 된 메이저리그식 벤치 클리어링을 경험했다. 아니, 사실상의 집단 난투극을 지켜봤다고 해야 맞겠다. 1999년 다저스의 박찬호가 애너하임의 투수에게 ‘이단 옆차기’를 날렸다. 오른쪽은 지난해 6월 12일 열린 다저스-애리조나 경기에서 벌어진 집단 난투극. 애리조나 투수가 다저스의 그레인키에게 빈볼을 던지자 양팀 선수들이 뛰쳐나왔다. 지난해 6월 12일(한국시간) 다저스타디움에서 열린 다저스와 애리조나의 경기. 당시 다저스는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최하위, 애리조나는 같은 지구 1위였다. 6회말 공격 때 다저스의 야시엘 푸이그가 애리조나 선발 이언 케네디의 직구에 얼굴 쪽을 맞았다. 푸이그는 곧바로 쓰러져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당연히 다저스도 곧바로 응징했다. 선발 잭 그레인키가 7회초 미겔 몬테로에게 고의성 짙은 빈볼을 던졌다. 결국 한 차례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났다. 그러나 모든 게 전초전에 불과했다. 그레인키가 7회말 타석에 들어서자 케네디는 초구부터 머리 쪽으로 공을 던졌다. 또 시속 150km에 육박하는 직구였다. 다저스 선수들이 격분해 총알같이 달려 나왔고, 애리조나 더그아웃도 텅텅 비었다. 선수들은 물론 코칭스태프까지 가세했다. 선수들이 코치 한 명을 단체로 공격하기도 했다. 단순한 벤치 클리어링을 넘어 주먹다짐이 벌어졌다. 감독, 코치, 선수를 합쳐 총 5명이 퇴장 당했다. 그레인키에게 던진 사구에 다저스 선수들이 유독 거세게 반응했던 이유가 있다. 애리조나가 ‘투수에게는 보복성 사구를 던지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어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레인키는 이미 두 달 전 샌디에이고와의 벤치 클리어링 때 쇄골이 부러져 한동안 전력을 이탈해야 했던 선수다. 다저스 돈 매팅리 감독이 선수들보다 더 먼저 더그아웃을 박차고 나오며 흥분한 이유다. 그렇다면 이 순간 류현진은 무엇을 했을까. 그는 다저스에서 유일하게 그라운드에 나타나지 않은 선수였다. 앞선 벤치 클리어링 때는 다른 동료들처럼 적극 가담했던 류현진이다. 많은 빅리그 팀들은 벤치 클리어링에 참가하지 않은 선수에게 벌금도 물린다. 그래도 류현진이 못 나왔던 까닭이 있다. 부상 선수와 다음날 선발 투수는 단체행동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눈앞의 다툼 때문에 다음 경기까지 지장을 줘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류현진은 이날 더그아웃을 지킨 대신, 13일 마운드에 올라 퀄리티스타트에 성공했다. 시즌 첫 3루타로 타점까지 올리며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류현진이 벤치 클리어링의 조연이었다면, 첫 한국인 메이저리거이자 다저스 선배인 박찬호는 스스로가 난투극의 주인공이었다. 박찬호는 다저스 시절인 1999년 타석에서 희생번트를 대고 1루로 향하다가 애너하임 투수 팀 벨처에게 태그아웃 당한 뒤 돌연 신경전을 벌였다. 벨처가 인종차별을 암시하는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분을 참지 못한 박찬호는 벨처에게 한국식 ‘이단 옆차기’를 날렸고, 순식간에 양 팀의 집단 난투극으로 번졌다. 박찬호는 곧바로 퇴장 명령을 받았다. 이 장면은 미국 스포츠전문매체들이 역대 최강의 난투극들을 선정할 때마다 어김없이 포함되곤 한다. [은] |
기억에 남는 벤치 클리어링은 이승엽 징계 복귀 후 ‘홈런’으로 되갚았다 그저 야구의 일부일 뿐이라는 벤치 클리어링. 그러나 때로는 한 게임, 길게는 한 시리즈의 운명을 바꾸는 변수가 되기도 한다. 한 팀의 명암이 걸린 중요한 경기라면 더 그렇다. SK와 두산이 맞붙었던 2007년 한국시리즈가 대표적인 사례다. 2003년 8월 9일 열린 삼성-LG전에서 이승엽과 서승화 간에 주먹다짐이 벌어졌다.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2차전에서 두산 김동주가 SK 채병용의 공에 얻어맞아 양 팀 선수단이 몰려 나왔던 게 시초였다. 달아오른 양 팀의 감정은 이틀 뒤 열린 3차전에서 폭발했다. SK가 9-0으로 크게 앞선 상황에서 두산 이혜천이 SK 김재현의 등 뒤로 날아가는 빈볼성 공을 던졌다. 이미 두산 베테랑 안경현이 몸쪽공에 맞아 골절상을 입은 뒤였다. 두산 선수들은 흥분 상태에서 자제력을 잃었고, 격한 몸싸움이 이어졌다. 하지만 1·2차전을 이겨 놓았던 두산은 3차전부터 내리 4연패해 패권을 내줬다. 삼성 이승엽과 LG 서승화의 주먹다짐 사건은 과정보다 결과 때문에 명장면(?)으로 남았다. 2003년 8월 9일 대구구장에서 LG 장재중 타석 때 삼성 라형진이 몸쪽 위협구를 던지면서 벤치 클리어링이 발생했다. 이때 이승엽과 서승화가 서로 멱살을 잡고 주먹을 휘두르는 장면이 포착됐다. 이승엽이 앞선 타석에서 허벅지에 사구를 맞았는데, 중학교 후배인 서승화가 미안해하는 기색은커녕 계속 위협구만 던졌다는 게 이유였다. 이승엽은 2경기 출장정지라는 징계를 받았지만, 복귀하자마자 첫 타석에서 홈런을 쳤다. 무엇보다 사건 이후 서승화와 처음으로 다시 맞선 경기에서 비거리 135m짜리 대형 3점홈런을 쏘아 올렸다. 한화의 안영명과 송진우, 현대의 김동수가 얽혔던 삼각 몸싸움도 여전히 회자된다. 2006년 7월 2일 대전구장에서 안영명이 김동수를 향해 두 개의 몸쪽 공을 연속으로 던졌다. 초구는 김동수가 피했지만, 두 번째는 등에 정통으로 꽂혔다. 김동수는 마운드의 안영명에게 달려가 얼굴을 주먹으로 두 차례 때렸고, 더그아웃에서 달려 나오던 송진우는 후배를 보호하기 위해 온 몸을 날려 발차기를 했다. 결국 안영명과 김동수의 동시 퇴장으로 이어졌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