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첫 번째 이야기
―3월 25일 진행된 철학자 ‘강신주’와의 인터뷰
올 해 초 철학자 강신주의 등장은 사뭇 뜨거웠다. 이른바 ‘힐링’ 열풍이 한창일 때 “힐링은 미봉책일 뿐이다”라고 했던 그.
꽤 많은 이들이 그의 책을 읽었다. 강연 현장엔 (과장을 보태어 말하자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래서 강신주를 만났다. 근사한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약속 장소에 20분이나 늦게 도착한 기자에게 ‘뿔’이난 강신주는 연신 혼이 나간 사과에도 “그만해요. 그냥 잠시 혼자 내버려둬요”하더니, 일렁이는 마음에 참을 인 석자를 긋기 시작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그는 “이젠 괜찮아졌어. 아까 화내서 미안해” 급작스러운 반말로 평화의 공을 쏘아 올렸다.
목련 피던 3월 말 부암동의 한 카페에서 그렇게 인터뷰는 시작됐다.
마음만큼은 위대한 인터뷰를 하고 싶었으나, 아는 게 부족하다보니 장 보러 왔다 우연히 마주친 옆 집 사람과의 가벼운 대화 수준에만 머무르게 된 것 같아 미안했다. 심지어 질문은 랜덤으로 이뤄졌다. (역량이 없으면 이렇게 된다. 질문 흐름은 잡지 못하면서 있어 보이는 체는 해야겠고)
그러나 좋은 ‘찻잎’은 미지근한 물에서도 향을 낸다고 하지 않았던가. 미지근한 질문에도 강신주는 아무런 이의 제기 없이 몸을 던져줬다.
‘강신주는 어떤 사람일까.’ ‘무슨 생각을 하나.’ ‘요즘 무슨 일들이 있었나.’
사진기자며 카페 주인이며 ‘강’의 한 마디마다 낄낄 거리기를 반복하다 때로는 진중해지기도 하고, 가볍되 우습지 않았던 대화.
그렇게 강신주와의 대화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쿵’하고 저 깊은 속에서 쇠 종이 떨어지듯 뭔가를 깨우치고 말았던 그 시간들을 뒤늦게 공개한다.
사진=박은숙 기자
<다음은 강신주와의 일문일답>
# 근황1.
―당분간 ‘다상담’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사람들이 내 애를 낳으려고 해.”
―무슨 @소리인가. 그게(‘뭐야 이건’하고 당황).
“원래 철학이 산파술이야. 철학자인 내가 ‘산파’고. 그런데 ‘산모’가 지 새끼를 낳아야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슬슬 내 애를 놓는 게 보이는 거야.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 고민할 수 있게 도와주려고 상담을 시작한 거잖아. 사실 자기만큼 자기를 잘 아는 게 어디 있어. 또 자기만큼 자기를 안 보려는 게 없잖아. 그래서 그 간극을 좁히려고 한 게 다상담의 목적이었거든? 그런데 한 2년 지나니까 상담 받은 사람들이 내가 떠드는 대로 살아. 마치 ‘생활 강령’처럼. 어떤 이들은 내 흉내를 내기 시작하더라니까. 그래서 끊은 거야. ‘이제 그만해야겠네?’ 이런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
―강신주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마음은 결국 ‘자기답게 살라’는 말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마지막에 ‘내가 그만두는 이유는 당신들 때문이다. 당신들이 날 안 찾을 때 나는 돌아올 거다(웃음)’라고 말했었지.”
―그동안 상담 과정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질문이 있다면.
“다 아픈 거였어. 잊고 싶어.”
―‘성별’, ‘연령’ 별로 저마다 고민들도 다를 것 같다.
“꼭 그렇지도 않아. 10대에서 30대까지 다 성적인 관심이지. ‘사랑’. 사랑은 사랑인데 인간은 그런 것 같아. 특히 10대, 20대는 사랑에 대한 고민이 아주 강해. 남자애한테 ‘너 여자애랑 자고 싶냐’고 물어보면 ‘으으으…자고 싶어요.’ 이런다고(웃음).”
―그래서 어떤 조언을 해주었나.
“‘그럼 자, 인마. 네가 여자를 만날 때 자고 싶다고 표현을 해’라고 말해줬지. 어떤 사람에게 자겠다고 하는 건 ‘나는 여자가 필요해’ 이게 아니라…‘너라는 여자와 자고 싶다’는 뜻이야. 네가 안 자주면 쟤하고도 자고, 아니면 저 옆에 얘하고도 자고…. 이게 아니라. 만약 그게 되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자위행위지.”
―정권 바뀌고 나서 상담해오는 내용들이 좀 달라졌나.
“그거 상관없어. 우리나라 특징은 정치에 대해선 말은 많이 하지. 말은 참 많이 해. 할아버지 할머니에서부터 누구나 다. 말은 많이 해. 우리 스스로가 ‘정치를 바꿀 수 없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다른 나라 이야기야. 부부관계 안 좋으면, 애정결핍이면 정치 이야기에 관심이 많아져. 애정이 결핍되면 괜히 김어준 이런 애들과 함께 다니고 그러는 거야(웃음). ‘백만 민란’ 같은 거 다니고.”
―솔로 동료와 모 ‘민란’에 갈 뻔 했었는데, 남 얘기 같지 않다.
“진짜 사람들에게 진지한 문제가 뭔 줄 알아? 사적인 문제야. 자기만의 한 문제가 지나가야 된다고. 특히 사랑의 문제가 지나가야 다른 문제가 생기고 그게 보여.”
―사랑의 욕구가 충족이 돼야 정치 등을 논할 수 있단 얘긴가.
“딱히 그런 건 아니야. 사랑은 좀 다른 능력이야. 사랑은 참 이상해. 산수의 법칙에 어긋나. 이를테면 내가 투 잡(two job)을 뛰면 힘들잖아. 그런데 어떤 일과 사랑을 함께 하면 그건 투 잡이 아니야. 에너지가 굉장히 세지거든. 물론 몸은 많이 망가지지. 무슨 말인지 알지? 사랑하면 에너지 분배가 이상하게 돼. 기적 같은 일이야. 그래서 사람들이 사랑에 목숨을 거는 거잖아. 사랑을 제대로 하면 열 가지 일도 할 수 있어. 잠을 안 자기도 해. 사랑에 빠져 있는데. 부부든 애인이든 잠을 잘 잔다? 그건 사랑이 식은 거야. 그냥 피곤 한 거야, 지금(웃음). 잠을 자야 합리화를 할 수 있어. ‘잠을 자느라고 너에게 키스할 시간이 없었다.’ 뭐이렇게 된다고. 반면 사랑을 하면 안 졸리지. 물론 그 상태를 유지하기가 만만치 않아.”
―강연은 어디서 하는가.
“내가 홀로 사니까 강의료를 많이 주면 가. 아주 많이 줘야 해. 그래야 강의료 거의 못 받는 데도 가지. 강의료를 논하지 않고 균형을 맞춰.”
사진=박은숙 기자
“학교나 기업 등 다양한 곳에서 와. 어떤 곳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상황이라며 갑자기 강의를 취소하더라고. 별로 민감하지 않은데 민감하게 보는 사람이 있어.”
―왜 당신을 정치적으로 봤을 거라고 생각하나.
“우선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그리고 내가 대의민주주의보단 ‘직접 민주주의자’니까. 이를테면 국회의원을 다 싫어하거든. 그리고 자본주의 공격하고 나오면 기업체에선 다신 안 불러.”
-대기업에서도 그런 내용을 강연한 적이 있나.
“글쎄. 보통 신입사원 환영회 때 강연을 하면 ‘언제 그만둬야할지’에 대해서 말해주곤 해. 지혜로운 사람은 봉급을 정확하게 계산해서 받은 만큼 일하는 사람이라고 가르쳐주지.”
-신입사원에게 ‘그만둬야할 시기’를 가르치니. 기업 측에선 굉장히 당황했겠다.
“그렇지. 그럼 전무들이 싫어해. 그런데 뭐 이상한 전무는 다시 날 부르기도 해(웃음).”
-왜 그랬을까.
“감동했나봐. 자기도 전무이지만 회사에서 받은 것 이상으로 일하고 있었던 거지(웃음). 그 부분에 대해서 자각이 되자 자신에 대해서 정직해진 거라고 할까. 그런 사람의 존재를 확인하면 기분이 좋지. 신입사원들을 두고 나오면서도 ‘저 아저씨 때문에 사원들이 잘 지내겠구나. 안심이다’ 그런 것도 느끼고.”
-그 ‘이상한’ 전무들이 있던 기업은 어디였나(웃음).
“업체 명을 공개해서 칭찬해주고 싶은데. 금 아무개 기업과 현 아무개 기업이 괜찮았어.”
―‘전무’하니까 생각난 건데, 요즘 들어 제대로 된 리더가 없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무언가 시작 하면 대장의 역할을 가진 사람이 나와. 진정한 ‘대장’은 말이야. 부하들 먼저 내보내고 전쟁터를 마지막으로 떠나야해. 그런데 요즘 보면 정치판의 어떤 대장은 제일 먼저 나가고 제일 먼저 늦게 들어오더라.”
―이른바 ‘국민적 염원’을 사유화했다는 평을 듣고 있는 그 분을 말하는 건가.
“글쎄. 국민적 염원이라…내가 보니 가진 건 없던데. 그냥 허상이지. 지지자가 없는. 반면 모 정치인은-개인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지만- 진짜 대장 노릇을 몇 번 했었어. 선거 때 패배했어도 선거사무실 패소할 때 맨 마지막에 나왔어. 그걸 주변 사람들이 본 거야. ‘이 아저씨는 끝까지 챙기는 구나’. ‘우리가 지켜야 한다. 저 아저씨는 우리 안 버린다.’ 그래서 결국 대통령이 된 거지. 결국 마지막도 자기가 다 껴안고 갔잖아. 그거 굉장히 힘든 거야. 그런 사람들이 언제 있었느냐면 14~15세기 때(웃음)? 당시엔 시대착오적 낭만이 있었어.”
―낭만이 사라진 것 같다.
“‘어른’…. 음, ‘선배’가 없어진 거지. 진정한 선배는 후배 밥 사주는 사람이야. 그걸로 모든 게 요약되지 않을까. 밥 사주고 말 안하는 게 제일 좋은 선배야. 밥 사준 만큼 이야기하는 선배도 뭐 괜찮아. 그런데 더치페이하면서 말만 많은 선배, 후배한테 ‘너희들이 돈 내’ 이렇게 말하는 놈은 양아치지(웃음). 비슷한 예로 회사 임원도 제일 많은 봉급을 받겠지만 그만큼 책임을 져야 해. 리더잖아. 그래서 돈을 많이 받는 거 아냐? 회사가 위기에 봉착하면 직원들 월급 다 챙겨주고 제일 마지막에 받아가야 해. 안 그래?”
# 욕망
―사람들에게 ‘자기답게 욕망하고 살라’고 권유했다. 그렇다면 강신주는 무엇을 욕망하는 가.
“‘스파크’와 ‘재배치’? 마치 좋은 영화 장면과 시 한 구절처럼 말이야. 이를테면 매너리즘에 빠진 세계와 화면이 있잖아. 그게 막 찢어지는 것 같은 재배치를 좋아해. 그런 걸 원해.”
―이 시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스파크’는?
“발견하기 굉장히 힘들지. 그래도 하나를 짚자면…. 이를테면 나 같은 경우 예술가적인 사람들이 옆에 있으면 좋아한단 말이야. 요즘 김어준과의 킬링캠프를 하거든. 처음에는 ‘그거 재밌네. 킬링캠프?’ 해서 시작하게 됐어. 힐링캠프라는 유명 프로가 있어서 우리도 그걸 재배치해서 ‘킬링’캠프를 만들어 봤어. 문제는 킬링캠프에 내용을 채워야 하잖아. ‘킬링이다’. ‘뭔가를 죽여야 한다’ 결국 추론을 해서 ‘금기’를 죽이기로 했어. 사랑보다는 이별 자유, 뭐 이런 걸 재배치할 거야. 비어있는 그릇을 만들고 채우는 작업이라고 할까.”
―채워 넣은 작업을 좋아하는 것 같다.
“내용을 찾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 김어준이 좋아. 김어준은 아무 생각 없이 툭 던져. 그걸 받아서 채워야 하거든? 그럴 때 희열을 느껴. 텍스트 읽을 때도 똑같아. 철학책이 왜 좋으냐면 철학을 읽을 때 맨 처음에는 의미를 모르는 비어있는 그릇처럼 다가와. 그걸 내가 채워야해. 시도 그래서 좋아해. 그런 예술가적인 게 있어야 신나. 정치적인 걸로 따지면 혁명이거든. 반면 소설이나 영화는 이미 내용이 다 있어서 그만큼 안 좋아하게 되더라고.”
―철학자 롤랑바르트도 영화보다는 사진이 좋다고 했는데, 아마도 당신과 같은 이유에서 그랬던 것 같다.
“그렇지.”
―인간사의 고민 5가지 키워드는 무엇이 있을까.
“섹스. 그건 죽을 때까지 1순위야. 두 번째도 섹스. 세 번째도 섹스. 네 번째도 섹스. 다섯 번째도 섹스. 그런데 색깔이 좀 달라. 다섯 번째는 정치적 욕망도 있어.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 역시 성적인 매력과 별 차이가 없어. 어떤 면에선 음악도 그래. 3번째 섹스를 음악으로 표현해도 될까.”
―좋아하는 음악은.
“마리아 조앙 피레스 아줌마. 요즘 자주 들어. 재배치적인 선율.”
―피레스 아줌마처럼 인생을 살 기 위해서는?
“안 해본 걸 많이 해봐야 해. 근본적인 해결은 그것밖에 없어. 교통사고도 나고, 뭐 그런 경험들. 다 해봐야해. 우리는 안 해본 것만 무서워해. 안 해본 거니까. ‘안 해봤잖아’ 하고 당당하게 살아야하는데. 우리는 안 해본 게 너무 무서워서 집도 마련하려고 하고. 이러잖아. 여자나 남자도 연애할 때도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에 연애를 잘 못한다고.”
―어떤 책을 좋아하는가.
“그 때마다 다른데. 최근에는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 소설가 중에서 제일 좋아.”
―본인의 책 중에선 뭐가 제일 좋나.
“김수영을 위하여.”
# 인문학
―대학에서 인문학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우려도 나오는데. 철학자로서 어떻게 보는가.
“애들이 철학 안했으면 좋겠어. 관념으로 대학 다니고, 등록금 비싼 거 내고 불안하게 4년 보내는 거야. 철학과 인들 뭐해. 다 사기인데. 철학 교수들의 위기를 철학의 위기라고 호도하면 안 돼.”
―대학 위기로 출판계에서 인문학 시장 커졌다는 주장도 있다.
“인문학의 본연은 자기 삶을 사는 거야. 나의 것을 만들어야지. 대학에서 인문학을 공부하지 않아서 위기가 왔다? 그것보단 인문학의 본령으로 들어온 거야. 100년이면 많이 헤쳐먹었잖아. 많은 이들이 기존의 유명 철학자들을 마치 교주처럼 만들어 왔잖아.”
―쉽게 말해달라.
“내 책에서 철학자를 인용 안하는 이유는 뭘까. 뭐라고 생각해? 책 <다상담>도 철학책으로 업데이트 할 수 있었어. 그런데 왜 안했을까. 그저 우리 삶에 의미 있는 내용만 압축해서 풀어버리고 싶었어. 그러니까 철학책으로 안 보이지. 4년 전에 철학 대 철학 1000페이지 쓰면서 정리했는데. 그게 만만한 작업이니. 하라면 다 할 수 있어. 하지만 지적유희를 지향하는 사람들을 만족시키고 싶지 않았어. 고민 있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거든. 책은 좌우지간 도움이 되어야해. 원고를 마치고는 항상 편집자에게 말해. ‘니네 책이지만 돈 주고 사라’. 살 가치가 있는지 물어보는 거지. 지갑을 기꺼이 열수 있는 책을 만들어야 한다. 괜한 형식, 멋진 척 하지 말고 진솔하게.”
―<다상담>이 그런 종류의 책이었던 것 같다.
“그 책 좋아. 불후의 명작이야(웃음).”
#강신주
사진=박은숙 기자
“두려운 건 없어. 소중하게 여기는 게 별로 없다. 음…산에 있는 돌 같은 거 있잖아? 뭐라고 해야 하나. 잃어버릴 게 없다는 건 아니야. 그렇다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게 비천하단 말도 아니야. 지키려고 하면 하염없이 지킬게 많거든. 그런데 안 그러겠다는 거지. 나한테도 소중한 것들은 많거든. 그런데 굳이 다 잡지 않겠다는 거야.”
―뜬금없는 질문을 하겠다. 목적이 옳다면 정의를 위해서 어떤 수단의 비판도 가능할까.
“어쩌면 수단이 중요한지도 몰라.”
―이를테면?
“중요한건 어떤 비판도 목적이 먼저 앞에 있어선 안 돼. 삶에서도 안 돼. 두 가지 인생관이 있는데 뭐라고 표현하면 될까. 그래. 물 마실 도구가 필요하다고 쳐봐. 보통은 컵이겠지. 여기서 컵이 목적이야. 그래서 컵을 그냥 사오는 삶이 있어.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그냥 나가. 원래 컵을 사려고 나간 거거든? 그런데 우연히 고가구를 발견했어. 그게 너무 사랑스러운 거야. 그래서 그냥 고가구를 덥석 가지고 와. 그리고 집에 있는 가구들은 다 버려. 그 고가구하나 때문에. 이 사람이야말로 사랑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야. 사랑을 하면 다 버려. 가족도 기득권도.”
―강신주도 무언가를 위해서 다 버리는 스타일인가.
“깨끗해. 다 버렸어. 솔직히 말하면 내가 언제 내버렸는지도 모르고 기억도 안나. 돌아보면 다 없어져 있더라고.”
―소유욕이 없나.
“별로 그런 거 없어.”
―난 추억이 담긴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겠던데.
“쓸 떼 없는 소리 하고 있어, 토테미즘이야 그거. 버리면 되지 그냥. 유아적인 애들이 밖에서 나가서 못을 구해 와서 보관하고 돌멩이랑 대화하고 그러잖아.”
―다 버려야할까.
“그거를 왜 나한테 물어봐. 자기가 살고 있는 방은 그 사람의 내면이야. 당신은 아주 나쁜 여자라고. 물건들을 다 기억하고 있고 분류하고 있어. 그러면 남자들 진짜 피곤해져. 좋은 여자는 말이야.”
―다 분실해주는(웃음)?
“그렇지. 기념일도 분실. 가끔은 남자친구한테 ‘너 누구니?’(웃음)
# 고민
―최근 평론가 진중권 씨가 ‘구조를 다 바꾸어야 한다. 문화 교육도 바꿔야할 시기가 온 것 같다’고 했는데.
“누가 바꾸느냐가 포인트지.”
―바꿀 수 있을까?
“억압구조는 지난 3천 년간 바뀌지 않았어. 전 세계사에서 그동안 혁명은 한 번도 이뤄진 적 없어. 억압의 양상이 변했을 뿐. 단지 ‘누가(who) 바꾸느냐’의 문제야. 여기서 ‘누가’ ‘정치가’라면 다시 또 (억압구조가) 반복될 거고. 그 ‘누가’ 사람들 한 사람, 한사람이라면 한번은 바뀌어 지겠지.“
―영화 ‘설국열차’ 같다.
“혁명은 달리는 폭주기관차를 멈추는 거야. 그래서 벤야민이 딴지를 걸었잖아. ‘저 기차를 멈출 수 있을까? 너무 늦은 건 아닐까?’.”
―‘진보는 패션’이란 말이 나왔다. 힐링의 대표주자격인 도서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비판할 수 있는 새로운 지성도 등장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는가.
“새로운 것의 등장이라…혁명의 힘은 사랑에 있어. 남녀가 사랑 때문에 아버지 말을 어기듯이. 조지오웰 1984를 보면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면서 빅브라더에서 벗어나지. 그 모습이 아주 상징적인 거라고. 그렇다면 혁명의 그림은 어떤 걸까.”
―글쎄….
“이성복 시인이 ‘방법을 가진 사람은 사랑이 아니다’라고 했어. 그게 뭔지 알아? 돌아가신 아버지 제사상에 자장면을 올리는 거야. 살아생전 아버지가 그토록 좋아하셨던 자장면을 올리는 거라고. 기존의 홍동백서를 바꾸는 거지? 한 마디로 사랑 없이 방법과 구조를 바꾼다면 장난이지. 아주 잔혹한 독재자의 예술적 장난일 수도 있어. 그런데 사랑이 담긴 자장면은 혁명이야. 우리 시대에 그런 게 나와야 한단 말이야. 강한 애정,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애석하게도 무언가에 애정을 쏟기 어려워진 것 같다.
“그렇게 쪼개놓았으니까. 그래서 우리의 출발은 어쩌면 에덴동산인지도 몰라. 다시 처음부터 출발해야하는 거지. 사랑이란 관계가 굉장히 힘들고 그렇잖아. 인간에 대한 사랑에 더 집중하고 거기서 더 확장해야 하는데…. 그런데 요즘은 말이야. 사랑이 모텔 안으로, 침실 안으로만 들어와 버렸어. 그거 알아? 근대사회 이전의 사랑은 인류애였다고. 옛날의 사랑은 바로 정의에 입각해 있었다고. 공동체적인 가치에. 그런데 공동체 가치를 자본주의가 부숴버리면서 한 말이 ‘그 사랑, 이제 침실로 던져줄게. Z카페로. 러브모텔로!’ 별 수 있나. 그냥 기다려야해. 2천년을 기다렸는데 뭐..”
―어차피 노력해도 성과가 보이기 힘드니 그냥 모른 척 피해 살까.
“옳은 건 옳은 거야. 내가 못하든, 우리 세대가 못하든. 옳은 일은 해야 하는 거야. 성과가 미약하더라도. 인문학 하는 사람들은 커다란 돌덩이가 있어. 그걸 내가 못 치우더라도 ‘그래도 올라가서 이거 치워야 된다’고 떠는 사람이 철학자야. 나는 그렇게 니체를, 스피노자를 읽었어. 나도 2013년에 그 자리에서 그걸 외친 거야. 그리고 ‘바꾸자’고 말할 때 항상 되물어 봐야해. ‘누가 바꾸지?’ 한 가지 확실한건 우리가 진짜 빼앗아야 더 이상 안 빼앗겨. 우리가 진짜로 얻은 건 안 빼앗긴단 말이야. 반면에 우리에게 누군가가 무얼 주잖아. 그네들은 언제든지 우리에게 그걸 빼앗아 갈 수 있어. 누가 준 거는 쉽게 빼앗기고 말지.”
―우리가 누굴까?
“우리가 누굴까. 나. 너?”
―각자가 하나의 세계라는 놀라운 이야기를 우린 듣고 있다(웃음).
“김수영 시인이 그러잖아. 생각해보면 서러운 것인데. 팽이마냥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 힘을 위해 팽이가 서서 돈다. 그게 민주주의야 공통되게 돌면 팽이가 둘 다 넘어지거나 하나가 넘어지는 거야.”
―이 시대에 필요한 답변은 뭐라고 생각하나.
“인간한테 통용되는 유일한 삶의 지침은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그것만 알면 다 하게 되어 있어. 어차피 죽는데 못할 게 어디 있나. 이를테면 ‘집’에 대한 탐욕이 있잖아. 타워 팰리스같은 집에 대한 탐욕. 그것도 내가 언젠가 죽는다는 걸 자각하게 되면 말이야. 상황이 달라져. 나는 죽는데 아파트는 나보다 더 오래가잖아. 그거 굉장히 불쾌한 일이야. 소유에도 원칙이 있어. 내가 소유해야하는 게 나보다 더 빨리 파괴되어야 하거든. 그래서 우리가 언젠가 죽는다는 건 어떻게 보면 굉장히 소중한 일일지도 몰라. 예전에 황지우 시인의 ‘여기서 더 머물다 가고 싶다’라는 시가 있어. 거기엔 떠남이 전제가 되잖니. 그래서 아름답고. 사람으로 따지면 카페에서 조금이라도 더 같이 머물고 싶은 사람, 그런 사람이 좋은 사람이야.”
―사랑에 적용하자면?
“‘우리는 언젠가 죽고 이별하고 그 아름다운 것들도 떨어진다’. 그것만 가지고 살면 재밌어.
벚꽃처럼 사랑하라고. 벚꽃을 뜯어서 집에 가져 갈 거야? 아니잖아. 언젠간 꽃이 떨어질 것을 알면서 그 순간을 간직하며 아름다운 순간을 바라보잖아. 그게 예쁜 거야.”
―언젠가 죽을 걸 알기에 요즘 인생에 충실하고 있다. 융통성 있게 일하다보니 지각률 100%에 육박했다.
“어이쿠, 그런 병신들이 있더라고. 언젠가 죽을 걸 알기에 ‘밀도’ 높게 살아야 하는데. 그대처럼 ‘막 살래요’ 이런단 말이야.”
―그냥 잭슨폴락의 그림 같은 인생이라 보면 안 되나.
“그래 예술인 것 같다(웃음).”
―진부하지만 묻고 싶다. 앞으로의 꿈에 대해서. 현재 어떤 꿈을 꾸고 있나.
“꿈은 없고. 좋은 일이 있었으면 좋겠어. 내일은 하늘이 맑았으면 좋겠어. 새로웠으면 좋겠어, 조금이라도.”
김포그니 기자 patronus@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