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마지막 날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기도 미사에서 드러난다. 같은 언어를 쓰는 남과 북은 동일한 어머니 아래서 태어난 형제라고, 형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는 말씀! 그는 아직 성장하지 못한 베드로와 자유로운 예수의 대화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어떻게 평화의 기도를 드릴 수 있겠나?” 살아있는 말에 자극된 내 몸에선 소름이 돋았다.
종교가 다른 사람들에게 내 종교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했던 그는 이웃 종교인들을 만나서는, “우리는 모두 함께 길을 가고 있는 형제들이니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했다. 세상에, 자기 자신도 기도가 필요한 존재란다. 교황인데, 세상에 하나뿐인 높은 교황인데. 교황이라는 무거운 의복과 자신을 일치시키지 않는 그는 누구보다도 기도의 힘을 알고 있는 구도자였고, 교황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행복할 자유인이었다.
그는 마음이 열린 사람, 마음이 온화한 자유인이었다. 성서에 보면 ‘모세는 온화한 사람이었더라’는 구절이 나온다. 어렸을 적 그 구절을 읽고, 의문을 품었었다. 뭐야, 온화해가지고 사람 좋다는 말은 들을 수 있겠지만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나. 그런데 이번에 알았다. 온화함의 힘을, 그것은 무력한 인간의 자기보호색이 아니라 자유로운 영혼의 표정이었다.
교황은 정말 온화했다. 그는 온화한 표정, 온화한 몸짓으로 우리를 무장해제 시키며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의 힘, 소통의 힘에 눈을 돌리게 했다. 그와 5일을 보내며 알게 된 것이 있다. 내 안에 나도 모르는 생명의 에너지, 사랑의 에너지가 있다는 것, 그 에너지는 흐를 수 있다는 것! 그는 우리도 몰랐던, 우리 속의 선한 에너지를 일깨우며 떠났다. 로마에 도착해서도 교황청으로 가지 않고 먼저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으로 가 성모마리아에게 우리나라 일곱 살 소녀가 준 꽃다발을 바쳤다는 교황의 소식을 접하며 행복한 뉴스가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우리가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한 우리는 기억하고 다질 수 있을 것이다. 선한 힘은 결코 약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주향 수원대 교수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