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자료사진. | ||
[1] 5·18의 실제 지휘체계 및 최초 발포 명령자
5·18 당시의 군 진압 체계는 서울의 계엄사령관 직속의 광주 현지 전교사 사령관과 31사단장이었다. 진압을 위해 투입된 특전사 공수여단과 20사단은 그 지휘체계에 따라야 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이런 군 지휘체계는 완전히 무시되었고 심지어는 군통수권자인 대통령도 철저히 소외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은 “광주사태에 대한 무력 진압의 실질적인 지휘는 신군부의 대부 격인 황영시 육군참모차장과 전두환 보안사령관, 정호용 특전사령관, 육본 작전참모부장 김○○ 장군, 작전참모부차장 이○○ 장군 등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보면 틀림없다”고 밝혔다. 신현확 국무총리는 “광주사태에 대해서는 국방장관을 비롯, 그 누구로부터도 보고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장형태 당시 전남도지사는 “당시 대통령을 수행해 광주에 내려온 이희성 사령관은 최 대통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책상을 내리치고 소리치는 등 대통령은 전혀 안중에도 없는 상황이었다”고 증언했다.
광주사태에 진압군으로 투입된 특전사의 박 아무개 대대장은 “솔직히 말해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광주에 내려와 있는데 실세인 특전사령관 말을 듣지 힘 없는 31사단장 말을 듣겠는가”라고 진술하고 있다. 임 아무개 전교사 교육훈련부장은 “5월 20일 밤 9시 반경 최세창 3공수여단장의 지시에 따라 각 대대에 실탄이 분배되어 그날 밤 발포가 이뤄졌는데 이에 관하여 전교사 사령관이나 31사단장의 사전 승인이 없었음은 물론 사후보고도 전혀 없었다”고 밝혔다.
[2] 정승화 계엄사령관 체포 과정
신 당시 총리는 “79년 12월 12일 오후 8시경 최 대통령이 ‘조금 전 전두환 사령관이 다녀갔는데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연행을 재가해 달라고 하기에 국방장관의 결재 없이는 재가할 수 없으니 절차를 밟아 오라고 하였다’라고 말씀하셨다. 이어서 약 30~40분 후에 한 비서관이 외부로부터 연락받아 정 총장이 연행되었다는 보고를 했다. 당시 최 대통령은 ‘무슨 일을 이 따위로 처리하느냐’며 전 사령관에 대하여 매우 화를 내고 힐책하는 듯한 언동을 하셨다”고 밝혔다.
▲ 헌병에 연행되는 정승화 전 계엄사령관. | ||
그는 “12월 13일 새벽 5시경이었는데 당시 최 대통령은 상당히 지친 표정이었으며, 국방장관이 재가를 요청하자 할 수 없이 사후 재가를 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만약 나와 최 대통령이 당시의 군부 동향에 관한 정확한 보고를 받았다면 다른 판단을 하셨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된다”고 덧붙였다.
[3] 80년 8월 15일 하야 성명
최 대통령의 갑작스런 하야 성명에 대해 최광수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은 “처음부터 대통령 주관으로 지시하거나 일을 추진한 것은 거의 없었고 전 사령관 등 신군부에 의하여 모든 정책이 추진되는 가운데 상당히 무력감을 느끼셨던 것 같다”고 밝혔다.
신 당시 총리는 “80년 3월경 전 사령관이 내게 ‘10·26 사건과 관련하여 최 대통령이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장시간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조사했다’고 말한 점으로 미뤄볼 때 전 사령관이 그와 같은 사실을 빌미로 최 대통령을 협박하여 하야시켰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김종환 당시 내무장관은 “8월 초순경 당시 3군사령관이었던 유학성 장군이 ‘최 대통령이 하야할 것이니 대통령선거를 위해서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소집해달라’며 ‘최 대통령은 김정렬 씨(전 국방장관)가 맡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곧 하야할 것이며 전두환 장군을 대통령으로 추대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사실상 하야 성명 발표 이전부터 내부적으로는 통일주체국민회의 개최 준비를 했다”고 밝혔다.
주영복 당시 국방장관은 “80년 8월 15일 오후 2시경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청와대로 갔더니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책임정치의 구현과 평화적 정부 이양의 선례를 남기기 위해 사퇴를 결심했다’고 말씀하셔서 내가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다”고 밝혔다. 그런데 그는 ‘그때 최 대통령 눈 부위 등에 어떤 폭행을 당한 자국이 있지 않던가’라는 검찰의 질문에 “당시에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모르지만 한쪽 눈이 부자연스러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전에는 대통령께서 한쪽 눈이 부자연스러웠던 것을 본 적이 없다”고 밝혀 새로운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4]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
신 당시 총리는 “80년 5월 15일경 김종환 내무장관으로부터 경찰만으로는 진압이 불가능해 군 투입을 요청해야겠다는 보고를 듣고 군의 투입을 극구 반대했다”며 “최 대통령 역시 군이 시위 진압에 투입되는 것은 결사코 반대하셨다”고 밝혔다.
이희성 당시 계엄사령관은 “계엄사령관이 발령하는 포고령에 관해서 나는 전혀 관여한 사실이 없으며 사실상 군부 실권자인 전 사령관이 보안사 요원들을 시켜 포고령 원안을 만들어 계엄사 담당 참모에게 건네주면 그대로 발령하였고, 내가 계엄사령관으로서 행사한 권한은 거의 없다”고 밝혔다.
주영복 당시 장관은 “80년 5월 17일 오전 9시 반경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이 장관실로 날 찾아와 ‘전 사령관이 비상계엄 전국 확대, 국가 보위를 위한 비상기구 설치, 국회 해산 등 세 가지 문제를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처리해 달라고 하신다’고 전해 왔다”고 밝혔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