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8월 26일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대우세계경영연구회 특별포럼에 참석해 “잘못된 사실을 바로 잡아야 한다”며 그룹 해체와 관련한 자신의 심경을 밝혔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정치권과 재계에선 이러한 김 전 회장 행보가 박근혜 정부와의 교감 아래 이뤄졌을 것이란 추측을 내놓고 있다. 김 전 회장 주변에서 ‘박 대통령 임기 내에 명예회복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현 정부 들어 이른바 ‘김우중 키즈’들이 김 전 회장과 대우그룹 재평가를 위한 분위기 조성에 나선 정황들이 꾸준히 포착돼왔다.
특히 김 전 회장 측은 박 대통령 비선라인으로 통하는 정윤회 씨를 비롯해 여권 실세들과 접촉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져 관심을 끈다.
1999년 그룹 해체 후 두문불출하던 김우중 전 회장이 공식석상에 모습을 처음 드러낸 것은 지난 2008년 3월 열린 대우 창립 42주년 기념식에서였다. 재계에선 김 전 회장이 재기를 위한 시동을 걸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에 대해 “건강상 어렵다”며 일축했던 김 전 회장은 그 후 옛 대우 임직원 모임 세계경영연구회 창설을 주도하는 등 본격적인 활동을 위한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당시 김 전 회장과 만났던 전직 대우 임원은 “김 전 회장이 경영을 다시 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김 전 회장은 대우라는 브랜드가 이대로 잊히는 것을 안타까워했고, 본인의 경영 노하우를 전수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김 전 회장이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재기에 나선 것을 두고 정치권에선 정권 실세인 박영준 전 차관에 주목했다. 박 전 차관은 대학 졸업 후 대우 계열사에 입사했고 그 뒤 기획조정실에 근무한, ‘대우맨’ 출신이다. 대선캠프와 인수위를 거치며 최고 실세로 떠올랐던 박 전 차관이 김 전 회장 도우미 역할을 할 것이란 관측이 제기됐던 것이다.
실제로 박 전 차관을 비롯한 몇몇 인사들은 이명박 정부 역점 과제였던 자원외교 성공을 위해 김 전 회장의 세계 인맥을 활용할 필요성이 있다는 논리를 펴며 직·간접적으로 지원사격을 했다. 세계경영연구회 관계자는 “DJ와 노무현 정부에선 김 전 회장이 말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때부턴 김 전 회장이 조금씩 기대를 갖기 시작했던 것 같다”고 귀띔했다.
그러나 김 전 회장 앞엔 17조 원대에 달하는 막대한 추징금이 가로막고 있었다. 국민 정서상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선 김 전 회장이 원하는 명예회복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게 중론이다. 김 전 회장에 대해 우호적 스탠스를 취했던 이명박 전 대통령 역시 민감한 추징금 부분은 건드리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 정부에서 김 전 회장 재기설이 끊임없이 나돌았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소식이 들리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앞서의 세계경영연구회 관계자도 “(추징금은) 시간이 필요한 문제 아니냐. 법적으로 다퉈볼 만한 것이기도 하고. 어찌됐건 정권 차원에서 대승적 결단을 내려줘야 한다”며 “이런 측면에서 김 전 회장으로선 박근혜 정부 탄생을 그 누구보다 기다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하자 김 전 회장 발걸음도 빨라졌다. 저서 집필에 속도를 내는 한편, 추징금에 법적 하자가 있는지 여부를 검토하는 작업도 병행했다. 대우라는 독자 브랜드를 사업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실현 단계 수준까지 논의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초 김 전 회장은 지난해 하반기를 ‘컴백 디데이’로 잡았지만 전두환 씨 추징금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그 일정을 늦췄다고 한다. 전 씨로 인해 김 전 회장 미납 추징금까지 새삼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심지어 ‘김우중법’까지 발의되자 복귀 시점을 미룬 것이다. 이 기간에도 김 전 회장은 베트남과 한국을 오가며 옛 대우 직원 및 지인들과 꾸준히 만났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처럼 김 전 회장이 현 정권에서 본격적으로 나선 것에 대해 정치권에선 ‘김우중 키즈’가 승승장구하고 있는 것과 깊숙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본다. 이들이 이명박 정부의 박영준 전 차관이 그랬던 것처럼 김 전 회장을 돕고 있다는 얘기다.
우선 김 전 회장에겐 ‘대우 4인방’으로 불리는 든든한 우군이 있다. 강석훈 이한구 정희수 새누리당 의원(가나다 순)과 안종범 청와대 경제수석이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김 전 회장 세계경영을 뒷받침했던 대우경제연구소 출신이다. 강석훈 의원과 안종범 수석은 박 대통령 핵심 경제 브레인으로, 대표적인 친박 실세 정치인들이다.
박 대통령의 각별한 신뢰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백기승 전 청와대 국정홍보비서관의 경우 대우 재직 시 최연소 임원에 올랐을 만큼 김 전 회장에게 인정을 받았던 인물이다. 해외로 도피 중인 김 전 회장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맡아 한때 ‘김우중의 입’으로 불리기도 했다.
지난 2007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대선 경선 때 박근혜 캠프에 합류하며 정치권에 입문한 백 전 비서관은 그 후 줄곧 박 대통령 곁을 지키며 최측근으로 분류돼왔다. 김 전 회장과 박 대통령 모두에게 인정을 받은 셈이다. 백 전 비서관이 박 대통령과 김 전 회장을 연결하는 핵심 고리 역할을 할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 전 회장은 지난해 추석과 연말 베트남에서 귀국해 앞서 언급한 정치권의 김우중 키즈 일부를 직접 만났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 전 회장의 한 지인은 “김 전 회장이 국내로 들어와 실세라고 할 만한 여권 정치인을 만난 것은 팩트(사실)다. 대부분 과거 김 전 회장 밑에서 일했던 사람들”이라면서 “김 전 회장이 ‘내가 살면 얼마나 살겠느냐. 죽기 전에 다 풀고 싶으니 도와 달라’고 말하면 눈물을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김 전 회장 입장에선 얼마나 감개가 무량하겠느냐”고 되물었다.
‘연세대 라인’도 김 전 회장의 중요한 인재풀이다. 연세대 상대(경제학과)를 나온 김 전 회장은 한때 동창회장을 맡았을 정도로 학교에 애착이 깊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회장은 상대 건물 신축비로 50억 원을 지원하는 등 상당한 액수의 돈과 부지를 학교에 기부하기도 했다. 김 전 회장이 그룹 경영 시 연세대 졸업생들을 남다르게 여겼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
백기승 전 비서관도 연세대(정치외교)를 졸업했다. ‘실세 중 실세’로 통하는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김 전 회장의 경제학과 후배다. 서승환 국토부 장관, 임종룡 NH농협금융지주 회장,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회장 등도 연세대 경제학과 출신이다. 최경환 장관을 필두로 연세대 출신이 전성기를 맞고 있다는 것은 김 전 회장에겐 희소식이 될 법하다.
실제로 연세대 인맥을 중심으로 한 김 전 회장 구명 움직임은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의 ‘막후 비서실장’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는 정윤회 씨를 접촉하는 데 공을 들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 씨 역시 연세대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앞서 언급한 김 전 회장 지인은 “김 전 회장 측이 현 정부 최고 실세로 소문난 정 씨와 줄을 대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연세대 인맥을 동원했다. 정 씨와 가까운 한 유력 사업가가 나섰지만 별다른 성과는 거두지 못한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김 전 회장 측은 또 대우 해체 및 추징금이 부당하다는 내용이 담긴 보고서를 박 대통령이 받아볼 수 있도록 하는 데도 노력을 기울였고, 이는 올해 초 이뤄졌다고 한다. 김 전 회장이 최근 저서를 통해 주장하고 있는 사실을 박 대통령은 진작 알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일각에서는 박 대통령이야말로 김 전 회장 최고 인맥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김 전 회장 부친 김용하 씨는 대구사범학교 윤리 선생이었는데, 제자 중 한 명이 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김 전 회장 친형 김덕중 전 교육부 장 관은 박 대통령의 서강대 은사다. 부녀가 모두 김 전 회장 일가로부터 교육을 받은 것이다. 게다가 박 대통령 동생 박지만 EG그룹 회장의 사업 종잣돈을 마련해준 것도 김 전 회장이다. 김 전 회장은 박 회장이 EG그룹 전신인 삼양산업에 투자할 당시 8억 원을 빌려준 바 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