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7일의 참사였다.”
세월호 특검법 합의를 둘러싸고 당 안팎에서 반발에 부딪쳤던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혁신위원장의 거취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구윤성 기자 kysplanet@ilyo.co.kr
지난 8월 7일 박영선 혁신위원장이 그동안 야당이 요구해왔던 특검 추천권과 관련해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을 따르기로 하면서 여당의 요구를 대폭 반영했다는 논란이 일었다. 이에 박 위원장은 “아직 협상이 완결된 것이 아니다”라며 사실상 재협상을 요구했고 지난 19일 특검추천권 중 여당이 가진 2명의 추천인을 야당과 유가족의 사전 동의를 받도록 합의했지만 이마저도 유가족들이 강하게 반대했다.
당내에서는 처음 세월호 특별법을 합의했던 8월 7일을 기점으로 박 위원장의 리더십이 사실상 붕괴된 것으로 보고 있다. 원내대표단을 포함, 당과의 상의 없이 중요한 결정을 독단적으로 내려 화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한 핵심 당직자는 “박 위원장은 첫 번째 합의에 앞서 최소한 당 중진들 내지는 원내 회의를 통해 협상안에 대해 합의를 했어야 했다. 어느 누구도 그 자리에서 새누리당과 합의하고 나올 줄은 꿈도 못 꿨다”며 “당 내부에선 자신의 최측근을 비롯해 소수의 논의 틀 안에서 결정한 사안으로 협상 테이블에 임했다고 보고 있다”고 귀띔했다.
추미애 의원은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협상을) 왜 서둘렀는지 이해가 안 된다. 이는 대부분 의원들이 느끼는 점”이라며 “심지어 박 위원장과 가까운 세월호 국정조사특위 간사인 김현미 의원도 몰랐다”고 강조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박 위원장의 측근들도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앞서의 박 위원장 측근 의원도 “박 위원장이 힘들게 된 것은 안타깝다. 본인의 입장도 있겠지만 8월 7일의 협상은 참사라고 할 만큼 큰 실책이다. 세월호 특별법 합의가 어렵게 돼도 어쩔 수 없게 됐다”고 털어놨다.
협상에 차질이 빚어지면서 당내에서는 박 위원장 사퇴론이 끊이지 않고 있다. 박 위원장의 실책과 경색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위원장직을 내려놔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박 위원장이 혁신위로 이름을 바꾼 비대위원장을 맡게 됐을 때도 우려의 목소리가 적잖았다. 보통 당 지도부 경험이 있는 인사들을 중심으로 비대위원장을 뽑는데 처음 리더 자리에 오른 박 원내대표를 선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얘기였다.
또 다른 이유로는 당 대표 권한을 대행하는 비대위원장직을 원내대표가 겸임하는 것은 업무 과부하가 걸릴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한 새정치연합 중진의원은 비공식 자리에서 “애초 업무 자체가 불가능하다. 핵심 당직을 맡았던 중진이나 나나 박영선 카드는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고 이를 박영선 원내대표에게도 전달했다. 하지만 박 위원장 스스로 비대위원장에 대한 욕심이 있었던 것 같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앞서 중진급 회의에서도 박 위원장에 대한 사퇴론이 강하게 제기됐고 의원총회 등에서도 언급되며 급물살을 타고 있는 모습이다. 일부 중진 의원들은 강한 어조로 대놓고 박 위원장에게 퇴진을 요구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아직 결정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혁신위원장 자리에 자천타천으로 거론되고 있는 의원들도 있다.
혁신위원장은 전국 지역위원장을 뽑고 전당대회를 준비한다는 점에서 향후 당권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 때문에 당내에서는 문희상 의원 같은, 경험이 많은 중진들을 비롯해 박병석 의원과 원혜영 의원이 물망에 오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당내에서 박영선 사퇴론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고 있다. 첫째는 업무 과부화 해소를 위해 혁신위원장직만 사퇴하고 원내대표를 그대로 유지하는 안과 두 번째는 세월호 특별법 협상과 관련해 책임을 지고 혁신위원장과 원내대표 둘 다 내려놓는 안이다.
박영선 위원장(가운데)이 지난 8월 26일 국회 본청 앞에서 열린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위한 규탄 결의대회’에 참석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박 위원장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다. 지난 6월 지방선거와 7월 재·보궐 선거에서 새정치연합이 패배한 이유에 대해 세월호 프레임에 갇혔기 때문이라는 것이 외부의 분석이다. 박 위원장 입장으로선 당의 위기인 세월호 프레임을 빨리 벗어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세월호 특별법이 합의가 돼야 정기 국회와 1·2차로 분리된 국정감사 일정을 진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부담감이 있었던 상황이다.
이 때문에 동정론이 일기도 했다. 이미 김한길 안철수 지도부에서 전략공천과 세월호 프레임에 대한 불신 등으로 인해 지지율이 하락한 당을 박 위원장이 비대위를 맡고 특별법 제정에도 나섰지만 당내에서 전폭적으로 지지해준 계파가 없었다. 한 새정치연합 의원실 관계자는 “박 위원장은 침몰하는 배에서 계속 물을 밖으로 퍼 나르고 있는 상황”에 비유하기도 했다.
또 다른 새정치연합 관계자는 “박 위원장은 그동안 돌출 행동으로 당내 신임을 잃어왔다. 인지도 쌓는 일에만 나서고 정작 당내 주요 현안이 대립하면 뒤로 물러섰다. 그러다 보니 어떤 계파에서도 신뢰하지 않는다”면서 “박 위원장은 자신이 법사위원장 시절 여야 합의해 통과시킨 상설특검법에 애착이 많다. 세월호 특별법에도 자신이 산파 역할을 한 상설특검 안에서 진상 규명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주변에서는 박 위원장의 결정이 성급했다는 지적이 많다. 특히 유가족들의 장외 투쟁이 강화되면서 여론도 급변했고 박 위원장은 이런 흐름을 읽지 못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유족과 커뮤니케이션에 소홀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크다. 일부에서는 이러한 박 위원장의 독단적인 결정이 리더십의 부재에서 기인했다고 평가한다.
야권 성향의 한 정치 평론가는 “새정치연합이 선거에서 패한 것은 세월호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지 세월호 문제로 여당과 싸웠기 때문이 아닌데 박 위원장이 오판했다”며 “본인이 그동안 국회의원으로만 활동하다가 책임지는 자리에 오르니 철학의 문제가 드러나고 리더십 부분에 있어서도 부족함이 확연히 드러난 것”이라고 혹평했다.
박 위원장의 사퇴 문제는 세월호 특별법 합의 결과에 따라 판가름이 날 것으로 보인다. 새정치연합이 당내 갈등을 겪고 있는 사이 새누리당은 유가족들과의 접촉면을 늘려가고 있다. 이에 대해 당 내에서는 “자칫하다가는 세월호 특별법 협상에서 여야가 아닌 새누리당과 유가족의 협상이 될 수도 있다”며 잔뜩 긴장하고 있는 분위기다. 만약 새누리당과 유가족이 새로운 합의안을 도출한다면 새정치연합은 협상력 부재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앞서 박 위원장의 측근 의원은 “조만간 세월호 특별법에 대한 여야 협상이 이뤄지지 않을까 전망한다. 야당의 실책 때문에 소외론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당내에서 박 위원장에 대한 흔들기도 더 심해질 것”이라며 “하지만 3자 협상 등을 통해 야당도 협상 테이블에 앉지 않겠느냐. 세월호 특별법 합의 여부를 봐야 박 위원장 거취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 위원장의 사퇴 여부와는 무관하게 야권의 경색 국면도 장기화될 수밖에 없다. 당 내부에서는 박 위원장의 사퇴론과 함께 조기 전당대회론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조기에 전당대회가 열린다고 해도 오는 12월 정도부터 가능할 것이라고 정치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전국 지역위원장 선거가 11월에 열리고 12월에는 혁신안 및 전당대회 규정안을 제시해야 되기 때문이다.
박 위원장의 거취가 결정된 후에도 향후 ‘야당 실종 사태’는 올해 말에서 내년 초까지는 지속될 거라는 얘기다. ‘국회선진화법’ 등 현 조건에서 야당의 실종은 곧 정치의 실종을 의미한다. 여의도 상공의 먹구름이 한동안 가시지 않을 전망이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김다영 기자 lata133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