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이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해결사로 나섰던 김연배 한화 부회장이 최근 한화생명으로 자리를 옮겨 그 배경에 대한 세간의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한화그룹 행사에 김승연 회장과 함께 참석한 김연배 부회장(왼쪽에서 두 번째). 사진제공=한화그룹
한화생명은 지난 8월 11일 임시 이사회를 열고 김연배 한화그룹 비상경영위원장(부회장)을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내정하고 차남규 대표이사 사장과 함께 각자대표 체제로 전환하기로 했다. 지난해 6월 신은철 부회장이 사퇴하면서 사라졌던 두톱 시스템을 1년여 만에 부활시킨 것이다. 한화생명 인수 당시인 지난 2002년부터 10년 넘게 자리를 지켜온 신 부회장을 퇴진시키면서까지 폐기했던 각자 대표 체제를 다시 가동하자 금융권은 두 대표이사의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
옛 대한생명을 인수한 지 10년여가 흐른 지난해에야 우여곡절 끝에 ‘한화’로 간판을 바꿔단 한화생명은 생명보험업계 2위를 달리는 대형 보험사다. 한화생명은 또 ‘한화금융네트워크’로 명명된 한화그룹 금융 계열사 가운데 핵심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룹 전체로 보면 아직은 비중이 그리 크지 않고, 최근에는 저금리에 따른 수익성 악화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그룹의 2인자인 김연배 부회장이 한화생명 대표이사로 부임하자 금융권에서는 그의 역할과 한화생명의 향후 행보를 놓고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한화생명 측은 김 부회장이 새로운 먹거리 발굴에 주력할 것이라고 설명한다. 한화생명 관계자는 “김 부회장이 경기침체와 저금리 등으로 어려운 보험시장 환경을 극복하고 미래의 신성장 동력을 발굴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면서 “궁극적으로는 한화금융네트워크의 시너지를 창출해 그룹 금융부문의 경쟁력을 업그레이드하는 데 집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보험업계의 시각은 한화 측 설명과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경쟁상대라 그런지 김 부회장의 투입이 한화생명을 그룹의 주력으로 키우려는 포석이라며 경계감을 보이고 있다. 한동안 한화그룹의 역량을 집중적으로 투자했던 태양광사업이 기대에 못 미치는 성과를 보이자 신수종산업으로 금융업을 택한 것 아니냐는 얘기다. 한화생명을 그룹의 차세대 원톱으로 낙점, 간판으로 키우려는 의도라는 것.
김 부회장은 한화그룹의 금융부문을 오랫동안 맡아왔고, 대한생명 인수도 진두지휘했던 그룹 내 최고의 금융전문가이기도 하다. 경기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68년 한화증권에 입사한 그는 그룹 재무팀장 전무, 한화투자증권 부회장, 그룹 금융부문 부회장 등을 지냈다. 금융업 전반에 대한 남다른 전문성과 노하우를 짐작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더 나아가 한화생명에 현금이 넘쳐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그룹의 자금 창구 역할을 맡기기 위해 김 부회장을 보냈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내놓고 있다. 태양광사업 등이 장기전이 될 것에 대비해 꾸준히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보험업을 키우고 있다는 해석이다. 보험은 ‘현금 장사’인 데다 길게는 수십 년간 일정한 보험료가 들어오기 때문에 다른 계열사들의 투자자금을 받쳐주는 역할에 안성맞춤이라는 것이다.
거꾸로 그룹 내 최고 ‘재무통’이자 구조조정 전문가인 김연배 부회장을 보낸 것은 한화생명의 경영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방증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실제로 한화생명은 저금리로 인한 역마진으로 수익성이 크게 악화된 상태다. 올 상반기 순이익은 2053억 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2669억 원에서 20% 넘게 오그라들었다. 여기에 ‘금융공룡’ 농협을 등에 업은 농협생명이 업계 4위까지 치고 올라오면서 불안한 2위 자리를 언제까지 지켜낼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다.
최근에는 노사갈등이 격화돼 극한대립 양상까지 보이고 있다.
이런 만큼 김 부회장의 한화생명 전보는 위기타개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라는 해석이 힘을 받는다. 김 부회장은 구조조정본부 사장도 역임하며 IMF 외환위기 당시 성공적인 구조조정으로 그룹을 정상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지난 2007년 사회봉사단장을 맡으며 힘이 빠지는 듯했던 그가 지난해 김승연 회장 유고 사태가 벌어지자 그룹 비상경영위원장을 맡으며 구원투수로 다시 등장한 것은 그만큼 위기관리에 능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김 부회장의 이동이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본격적인 경영복귀를 알리는 신호탄이자, 김 부회장의 은퇴수순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재판과 건강상의 이유 등으로 몇 년간 경영일선에서 한걸음 물러서있던 김 회장이 최근 직접 경영을 총괄하려는 움직임이 보이면서 김 부회장이 외곽으로 비켜섰다는 해석이다.
1944년생으로 칠순을 맞은 김 부회장의 나이를 고려할 때 이제는 떠날 준비를 할 때가 된 것 아니냐는 얘기도 들린다. 그는 김승연 회장의 경기고 선배이면서 40년 넘게 한화그룹에 몸담아 온 인물이다. 때로는 김 회장의 분신 같은 2인자로, 때로는 악역을 대신 떠맡는 ‘칼잡이’로 그룹을 성장시키는 데 일생을 바쳤다.
그런 김 부회장에게 이번에 주어진 진짜 미션이 무엇인지는 9월 말이면 그 윤곽을 드러낼 전망이다. 한화생명은 오는 9월 29일 주주총회에서 김 부회장을 대표이사로 공식 선임할 예정인데, 그 전에 역할이 정리될 가능성이 높다. 한화생명 관계자는 “대표들의 역할에 대해서는 아직 결정된 사항이 아무 것도 없다”면서도 “임시주총이 열리기 전에는 어떤 형태로든 밑그림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