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방글라데시인 랭가가 언제부터 장영두를 알았고 왜 따라가서 할아버지를 죽였는지 말해보라고 해요.”
재판장이 통역에게 명령했다. 랭가와 대화 후 통역이 이렇게 대답했다.
“장영두 과수원에서 일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사건 날 처음 봤고 죽이라는 걸 거절했었는데 그 전에도 따라는 갔었다고 합니다. 전에도 그 할아버지 집에 세 차례 갔는데 사람이 많아서 죽이지 못했답니다.”
“장영두로부터 정확히 어떤 얘기를 들었는지 물어봐요.”
재판장이 다시 물었다.
“처음부터 할아버지 아들이 시켜서 죽인 것이라고 하고 관련된 다른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재판장의 표정은 심증을 확고하게 굳힌 것 같아 보였다. 너무 강한 선입견을 가지고 이미 마음속으로 결정을 한 게 아닐까 걱정이 됐다. 그는 기록 몇 장만 보고도 사건을 파악하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했다. 재판장이 엄한 눈길을 피고인석에 있는 장영두에게로 돌렸다.
“장영두 피고인! 이번 사건은 검사도 항소를 했는데 그 의미를 알죠?”
일심에서 나온 징역 15년보다 더 무거운 무기징역을 선고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허튼짓을 하면 장영두의 일생을 없애버릴 수도 있다는 무서운 경고였다.
“압니다.”
장영두가 짧게 대답했다. 그러나 어제까지의 흐리멍덩하던 그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굳은 표정에 어조도 저항의 기운이 노골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결연했다. 더 이상 판검사한테 겁먹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스쳐가는 걸 난 엿보았다.
“그러면 장영두 변호인, 신문하세요.”
재판장이 사무적인 어조로 내게 기회를 주었다. 나는 준비해온 질문사항이 적힌 서류를 앞에 있는 주임에게 건네주었다. 주임이 그걸 조심스럽게 재판장 앞에 올려놓았다. 재판장이 그걸 들어서 죽 훑어보는 것 같았다. 내가 묻기 시작했다.
“장영두 씨, 한밤중에 검찰청에서 조사를 받았었죠?”
내가 묻기 시작했다. 부당한 조사를 지적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습니다.”
장영두가 짧게 대답했다.
“그때 검사에게 ‘자 이제 모든 것을 사실대로 진술하고 선처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사실은 랭가의 진술처럼 이미 1년 전부터 영감님을 죽이려고 했고 마침 전기료 문제로 영감님한테서 연락이 와서 그 기회를 이용해 방글라데시인 랭가를 데리고 가서 영감을 살해한 것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검사가 작성한 조서에는 장영두가 그렇게 말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장영두는 내게 절대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런데 검사의 조서에는 계획적인 살인범처럼 반대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그걸 분명히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장영두가 고개를 완강히 흔들면서 단호하게 부인했다. 그는 살인한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겠다고 했다. 다만 동기 부분이 계획적이 아니고 우발적이라고 했다. 살인죄에서 동기는 형량에 있어 절대적으로 중요한 부분이었다. 우발적인 살인과 청부살인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났다.
“자백의 동기에 대해 검사에게 ‘제 생각에도 제가 너무 말이 맞지 않는 거짓말을 하고 어차피 이렇게 된 상황에서는 모든 것을 사실대로 진술하고 겸허하게 검사님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 인간된 도리라고 생각해서 모든 것을 사실대로 진술합니다. 더 이상 거짓말을 해도 저에게 유리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내가 물었다. 그 문장은 아무래도 검사가 작위적으로 작성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검사들은 종종 그렇게 쓰곤 했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니까요. 검사가 한 거예요.”
그때였다. 재판장이 갑자기 신문을 중단하라는 듯 손을 살짝 들면서 소리쳤다.
“이보세요, 변호인. 잠깐 중단하세요.”
나를 내려다보는 재판장이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도대체 신문의 취지가 뭡니까?”
재판장이 나를 다그쳤다. 질문을 계속하면 자연적으로 그 취지를 알 수 있게 만들어 왔었다. 청부라는 살인의 동기를 부인하기 위해 질문한 것이다.
“정말 검사에게 그렇게 말했는지 확인하는 겁니다.”
내가 재판장에게 대답했다.
“항소이유서하고 지금 신문사항하고 너무 달라서 그럽니다. 항소이유서에서 살인을 인정했잖아요?”
재판장이 내게 따졌다. 이미 살인을 인정하고 지금 와서 무슨 짓을 하느냐는 힐난이 섞여 있었다. 재판장이 계속했다.
“이보세요, 변호인. 지금 살인범이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재판장의 얼굴에는 냉소가 흘렀다. 난 당황했다.
“우발범이라는 걸 이 법정에서 말하고 싶은 겁니다.”
“나 참, 그러면 우발범은 살인범이 아니다 이 말입니까?”
재판장이 나를 보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판사 중에는 살인이냐 아니냐, 자백이냐 부인이냐는 이분법적 법적 결정을 중요시하는 사람도 있다. 현실에서는 살인도 수십 가지 형태의 종류가 있었다. 나는 그 다양한 살인범의 색깔들과 범죄인의 내면의 진실을 법정에서 정교하게 표출하고 싶었다. 변호사가 질문을 재판장의 입맛에 맞는 것만 할 수는 없었다. 재판기록을 나중에 볼 대법관은 또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었다. 배석판사들에게서도 차디찬 푸른빛 미움이 쏟아져 내려오는 것 같았다. 밉게 보이는 살인범을 맡은 변호사의 운명이었다. 심한 모멸감이 느껴졌다. 법정에서는 재판장이 왕이다. 일단 한 발 겸손하게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제가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보충서를 내도록 하겠습니다.”
살인 자체를 부인하면 그렇지만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재판장은 내가 도망갈 여유조차 주지 않고 숨통을 조였다.
“변호인! 이미 제출기간이 지나서 보충서를 내도 효력이 없다는 사실 잘 아시죠?”
재판장의 어조에는 노골적인 적의와 거부가 담겨 있었다. 내도 소용없는데 그것도 모르냐는 야유조의 말인 것 같았다. 나는 더 이상 후퇴할 길이 없었다.
“그러면 재판장께서는 변호인이 지금 뭘 어떻게 하라는 말씀인지요?”
내가 되물었다. 재판장은 변호사가 잘못했으면 나중에 판결에서 그걸 문제 삼으면 된다. 변호사로서 질문을 하고 변론을 할 권리가 있었다. 그런데 재판장은 신문 자체를 막고 힐난하는 것이다. 신문을 제한하면 그만큼 승복하면 된다. 재판장이 장영두 쪽으로 시선을 던지면서 소리쳤다.
“이봐 장영두!”
장영두가 겁먹은 눈으로 법대 위의 재판장을 보았다.
“항소이유서를 차라리 피고인 장영두가 직접 쓰는 게 훨씬 나을 걸 그랬어. 변호사가 쓰니까 무슨 취지인지를 도대체 내가 모르겠잖아?”
그건 변호사인 내게 대해 할 수 있는 최대의 모욕이었다. 27년의 법조생활에서 최고로 겪는 수모였다. 재판장의 그 한마디는 변호사를 갈아버리라는 재판부의 노골적인 요구로 들릴 수도 있었다. 이제 내게 남은 일은 법정에서 이 사건 변호를 그만두겠다고 말하고 퇴정할 것인지 아니면 일단 재판이 끝난 후 조용히 그만둘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뿐이었다. 이제 의뢰인은 내가 무료변론을 해준다고 해도 사건을 맡기지 않을 것이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전혀 모르는 사이도 아니었다. 나는 재판장을 잠시 망연히 바라보면서 속으로 말하고 있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이렇게까지 능멸합니까?’
짧은 순간에 그와의 과거가 떠오르기도 했다. 그가 지금 사법부의 대표주자로 승승장구하는 걸 알고 있었다. 속칭 출세하지 못한 자의 비참함마저 느껴졌다. 순간 내 눈이 던지는 감정을 재판장이 느낀 것 같았다. 그가 완연히 당황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다른 게 아니고 정말 혼선이 와서 그렇다니까요.”
내가 오해한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말했다.
“지금 신문 중이었는데 어떻게 할까요? 그만둘까요? 아니면 계속할까요?”
“계속하세요.”
재판장이 허락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질문을 제한하십시오. 하지 말라면 그만둬야죠. 그러면 신문을 계속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장영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장영두 씨 검사에게 자백한 게 맞나요?”
“그런 적 없습니다.”
장영두는 완강한 어조였다.
“조서를 보면 자백을 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왜 그렇죠?”
“검사님이 내가 청부살인의 배후를 대지 않는다고 화를 내면서 ‘정 그렇게 하면 네 형까지 잡아 처넣을 테니 두고 봐라 형제가 둘 다 감옥에 들어가면 꼴도 좋겠다’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성직자가 되려는 형이 집행유예라도 받고 나오면 목사 잘도 해먹겠다’고 협박했어요. 이제 처음으로 목사를 시작하는 형인데 나 때문에 형까지 망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검사가 시키는 대로 조서에 손도장 찍었습니다. 검사가 ‘너 같은 새끼는 꼭 무기징역을 받도록 하겠다’고 두고 보라고 했습니다.”
“공범인 랭가의 말은 할아버지의 아들이 장영두에게 아버지를 죽여달라고 부탁했다는데 어떻습니까?”
내가 물었다.
“검사가 조작한 겁니다. 제가 랭가 옆에서 그렇게 조서를 꾸미는 걸 봤어요.”
“공범 랭가의 진술조서를 보면 장영두가 등을 쿡쿡 찌르면서 죽이라는 사인을 보냈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제가 앞에 서고 랭가는 제 왼쪽 뒤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앞에 있는 제가 뒤에 있는 랭가의 등을 찌를 수 있습니까? 말이 됩니까? 그건 랭가의 거짓말입니다.”
재판장은 태도가 바뀌어 더 이상 신문을 정지시키지 않고 관심 있게 듣고 있었다. 나는 준비해온 질문들을 계속하고 있었다. (계속)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