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록 KB금융 회장이 지난 12일 금융감독원의 징계조치 등에 대해 소명을 마치고 금융위원회를 나서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비록 임 회장이 행정소송 등을 제기하겠다고 밝혔지만, 직무정지 처분을 받은 운신의 폭은 그리 넓지 않다. 금융당국이 징계수위를 상향함으로써 임 회장에게 ‘스스로 물러나라’는 뜻을 전달한 셈인 까닭에서다. 당일 오후 6시부터 직무를 정지시킨 이유도 임 회장에게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문책경고일 경우 회장으로서 출퇴근하며 KB금융 임원·측근들과 향후 대책을 논의할 수 있지만 직무정지를 받은 이상 KB금융 내 누구와도 협의할 수 없게 됐다. ‘사퇴는 없다’고 버티는 임 회장의 향후 행동을 고려해 금융당국이 임 회장의 손발을 묶은 것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이 전 행장과 마찬가지로 그때 사임했어야 하는 거 아니었나 싶다”며 “버틴 것이 더 큰 화를 불러왔다”고 촌평했다.
지난 4일 최수현 금감원장이 금감원 제재심의위원회 결과를 번복하고 임 회장과 이건호 전 국민은행장에 대해 중징계 조치를 발표할 때까지만 해도 임 회장이 자리를 지키기 힘들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임 회장은 예상을 뒤엎고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회장직에서 사퇴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을 뿐 아니라 자신에게 중징계 조치를 내린 최수현 금감원장과 중징계 직후 사임한 이건호 전 행장을 비난하기까지 했다.
추석연휴 대체휴일인 지난 10일 임 회장은 기자회견을 열었다. 임 회장에 대한 징계 수위를 결정할 금융위 전체회의가 12일로 예정된 터에 그 직전 기자회견을 열어 금감원 조치를 비난하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 것은 금융당국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됐다. 금융권 다른 관계자는 “금감원 결정을 금융위가 또 다시 뒤집기 힘들 것으로 예상됐음에도 기자회견을 열어 결백을 주장하고 심지어 금감원장을 탓하기도 한 것이 불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일종의 ‘괘씸죄’가 추가됐다는 것.
금감원 결정을 금융위가 새삼 또 다시 번복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예상은 충분히 가능했다. 제재심의 경징계 결과를 금감원장이 중징계로 번복했는데, 이것을 다시 금융위가 경징계로 낮춘다면 금융당국이 큰 혼란에 빠질 게 뻔하다. 금융위 전체회의에 최수현 금감원장이 참석한다는 사실도 금융위가 경징계로 낮출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근거 중 하나였다. 징계 수위를 낮춘다면 최수현 금감원장이 자리를 지키기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금융회사를 관리·감독하는 금융당국이 책임론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KB국민은행 본점. 이종현 기자
오랜 관료생활을 경험한 데다 최대 금융지주사 회장으로 있는 임 회장이 이 같은 사정을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임 회장은 지난 10일 서울 명동 로얄호텔에서 긴급기자회견을 열고 “내가 흔들리면 다른 CEO를 선임하기 위한 논의가 필요하고, 이 경우 KB금융은 상당 기간 또 흔들리게 될 것”이라며 사퇴 의사가 없다는 뜻을 전했다. 또 최수현 금감원장에 대해 “선례도 없고, 객관적 사실 변동도 미흡한 상태에서 중징계를 내려 KB금융이 흔들렸다”며 정면으로 비난했다. 이건호 전 행장에 대해서는 “조직을 흔들고 떠났다”며 최 원장과 함께 KB금융을 흔든 장본인으로 지목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임 회장이 금융당국 수장들의 학교, 행시, 공직 선배라는 점을 너무 믿고 앞서나가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최수현 금감원장과 신제윤 금융위원장은 모두 임 회장의 행정고시, 재정경제부 후배다. 또 세 사람 모두 서울대 출신 선후배 사이다. 서울대, 행시, 재경부 출신이라는 세 가지에서 모두 가장 선배인 임 회장이 금융지주사 CEO가 기자회견을 통해 금융당국에 도전한다는 해석은 생각지 못한 채 후배들을 가르치려 든 것 아니냐는 얘기다.
금융권에서는 금융당국의 결정이 곧 청와대 결정으로 인식되고 있다. 최수현 금감원장이 이례적으로 제재심 결과를 번복하면서까지 중징계 결정을 내린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오랜 관료 생활을 거친, 대표적인 ‘모피아’ 중 한 사람인 임 회장이 금융권의 이 같은 생리와 현실을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금융위 전체회의가 열리기 전 기자회견을 자청해 금융당국을 비난한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판 꼴이 돼버렸다.
금융위의 직무정지 결정 직후 임 회장은 “지금 이 순간부터 진실을 명명백백 밝히기 위해 소송 등 모든 수단을 강구할 것이다. 대충 타협하고 말 일은 아니며 명예를 회복하고 진실을 밝히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며 사퇴를 거부하고 ‘금융당국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이 같은 반응을 염려해 징계 수위를 높여 손발을 묶었음에도 임 회장은 뜻을 굽히지 않자 금융당국은 후속조치에 들어갔다. 금융당국은 KB금융 이사회를 통해 임 회장의 자진사퇴를 이끌어낼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마저도 임 회장이 거부할 경우 이사회에 임 회장의 해임을 요구할 것으로 전해졌다. 금융당국은 또 KB금융에 대해 특별점검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도 알려졌다. 금융당국과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임 회장에 대해 전방위적 압박을 시작한 셈이다.
금감원은 국민은행 주전산기 교체 과정에서 위법·부당한 행위를 저지른 혐의로 임 회장을 비롯해 관련자들을 검찰에 고발할 예정이다. 국민은행이 업무방해죄로 검찰에 고발한 것과 같은 경우지만 국민은행 고발장에는 임 회장이 포함돼 있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지난 12일 임 회장이 ‘끝까지 싸우겠다’는 입장을 표명한 직후 검찰은 국민은행이 고발한 사건을 특수1부(부장검사 김후곤)에서 수사 중이라고 밝혔다. 검찰은 이 사건을 원래 조사부에 배당했지만 특수1부에 재배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당국의 강도 높은 압박에 검찰까지 나선 상황에서 임 회장이 본인의 결의대로 끝까지 겨룰 수 있을지 주목된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