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정보회사에 가입돼 있는 회원들 중에도 엄연한 ‘등급’이 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결혼정보회사 관계자들은 이에 대해 “‘어울리는 사람끼리’ 맺어주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자신의 배경에 적합한 배우자를 찾기 원하는 회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잣대로 냉정히 평가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회사 측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마치 고기등급 나누듯 분류하는 시스템에 대해서는 여전히 갑론을박이 치열한 상황이다.
그렇다면 결혼정보회사들이 보유하고 있는 ‘특별회원’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 대부분의 결혼정보회사들은 일반회원과는 별도로 뛰어난 조건을 지닌 이른바 VIP 회원을 특별관리하는 시스템을 갖춰놓고 있다. 노블레스·VIP 등 각기 다른 명칭으로 불리고 있지만 결혼정보회사들이 이들 회원들을 선정하는 방식은 거의 비슷하다.
이들 회사들이 회원을 평가하는 잣대로 사용하는 ‘심사기준표’에는 회원의 직업과 학벌, 외모와 재산 등이 기본적으로 포함돼 있다. 남성의 경우 직업(30점) 학벌(20점) 집안배경(20점) 재산(20점) 외모(10점), 여성의 경우 외모(30점) 집안배경(20점) 직업(20점) 학벌(20점) 재산(10점) 식이다. 놀라운 것은 회원 개인에 대한 신상뿐 아니라 마치 ‘연좌제’처럼 집안과 부모의 이력까지 평가등급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지난 2000년 한 유명결혼정보회사의 노골적인 심사기준표가 공개되어 파문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최근 결혼정보회사 측에서는 세간의 비판을 의식해서인지 구체적인 기준표를 공개하고 있지는 않지만 관계자들에 확인한 결과 ‘A등급’으로 분류되는 이들의 조건은 얼추 비슷했다. 공통점은 상당히 세부적인 면까지 고려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같은 의사라도 전공과 개업 여부, 병원 위치 등에 따라 등급에서 차이가 난다.
남성의 경우 ‘판·검사, 변호사(대형로펌이나 개업변호사), 의사(개업의, 인기과 전공의)/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해외 4대 명문대/ 부모 학력은 대졸 이상/ 아버지는 장·차관급 이상 공무원, 6대 대기업 부장급 이상, 은행 지점장 이상, 변호사, 교수 등 특수직 종사자/ 부모 현금재산 20억 원 이상/ 본인 연봉 5000만 원 이상, 개인재산 8000만 원 이상/ 175㎝ 이상의 호감가는 인상’ 등의 조건에 충족할 때 최상위 등급을 받게 된다.
몇몇 업체 관계자들은 “거주지(신흥 부촌인 강남·서초 지역이나 전통 부촌인 평창동·성북동·한남동)와 차종(외산 세단), 외국어 소통능력에 따라 가산점이 붙기도 하며, 일부에선 원정출산이나 조기유학 등으로 일명 ‘독수리표’(미국국적) 아이들을 양산할 수 있는 조건을 갖췄을 경우 확실한 ‘프리미엄’이 붙는다”고 귀띔했다.
반면 상대 여성들이 기피한다는 이유로 ‘장남, 35세 이상, 비호감 외모, 곱슬머리와 특정 혈액형, 특정지역 출신, 음주빈도, 건강상태’ 등에 따라 감점이 있을 수 있다는 ‘황당한’ 조건을 언급하는 업체도 있었다. 또 ‘전통’과 ‘가문의 영광’을 중시하는 이들의 경우 ‘개천의 용’ 출신은 꺼린다는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여성의 경우도 직업이나 재산 정도보다는 ‘외모’(키 165~168㎝의 슬림한 미인형)와 ‘집안환경’에 더 큰 비중을 둔다는 점 외에는 남성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특이한 것은 남성들이 ‘직업’이 없을 경우 회원 등록이 불가능한 반면 여성들은 대학생이나 대학원생도 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는 점. 이에 대해 한 웨딩플래너는 “아무리 능력 있고 뛰어난 전문직 여성이라 해도 나이가 많으면 선호도가 떨어진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의 남성들은 ‘어린’ 여성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 또 전통 명문가 측에서는 위풍당당한 커리어우먼보다는 예능계 전공자나 신부수업을 받는 명문가 딸을 선호하는 경향이 여전히 팽배하다”고 전했다.
결혼정보회사 측에서는 개인정보보호를 위해 회원들의 신상기록 공개를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회사 측이 보유하고 있다는 VIP 회원들에 대한 자랑은 대단하다. ‘준재벌 못지않은 집안의 자제들이 상당수 등록돼 있다’ ‘명문가 자제들과 유학파들만을 보유하고 있다’는 자부심(?) 가득한 설명을 쉽게 들을 수 있다.
‘전통 명문가에서 신흥 명문가까지 대한민국 상류층 혼인을 책임지고 있는 상류층 전문 결혼정보회사’라고 소개하고 있는 한 업체는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회원들은 정·재계 유명인사들의 자제들과 재벌총수 및 대기업 CEO, 고위 공직자의 자녀 등 최상류층 인사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다른 업체는 상류층의 결혼문화에 대한 교류의 장을 마련한다는 취지하에 ‘Be Princess’ ‘백만장자와 결혼하기’라는 이름으로 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다. 심지어 일부 회사는 ‘연예인 회원 보유’라는 웃지 못할 광고까지 내걸었다.
결혼정보회사에 등록한 회원들의 말에 근거해보면 이른바 ‘노블레스 회원’에 가입하기 위한 문턱은 일반 사람들에게는 턱없이 높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명문대 석사 출신에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근무하고 있는 K 씨(33)는 지난해 톡톡히 ‘망신’을 당했다고 털어놨다. 180㎝가 넘는 키에 누가 봐도 준수한 외모를 지니고 있는 그는 또래보다 높은 연봉을 받으며 안정된 직장생활을 하고 있지만 노블레스 회원 가입을 거절당했다고 한다. 부모님이 고졸인 데다 식당을 한다는 것, 지방 출신인 데다가 현재 변두리에 거주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는 “너무 자존심이 상해 따졌지만 노블레스 클래스에 가입되어 있는 회원들의 조건을 보니 나중엔 이해가 되더라. 사실 나는 S 대 석사 출신에 대기업에 근무한다는 것, 시흥에 내 소유의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내심 자랑스레 여겼는데 다른 이들의 프로필에 비해 내가 가진 조건은 명함도 내밀 수 없을 만큼 초라했다.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더라”며 씁쓸해했다.
이들 결혼정보회사에 등록된 VIP 회원들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강남 알부자집 자제’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더라는 것은 이들 회사의 문턱을 자주 드나든 이들에게서 흔히 듣게 되는 얘기다.
한 업체 관계자는 “부모 재산 50억 이상인 회원들도 상당수”라며 “이들은 대기업이나 공기업에 종사하기보다는 탄탄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주유소를 운영하거나 임대업을 하는 경우, 오퍼상을 운영하거나 명품수입업을 하는 이들이 많다. 샐러리맨의 빡빡한 생활패턴에서 벗어나 여유 있는 생활을 한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관계자는 ‘신흥귀족’에 해당되는 이들을 집안배경만 믿고 나른한 생활을 하는 ‘탕아’로 보면 오산이라고 덧붙인다. 그는 “굳이 치열한 삶의 현장에 뛰어들지 않아도 평생 쓸 수 있는 돈이 있지만 이들의 생활력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뛰어나다. 교육수준도 전통 명문가에 뒤지지 않는데 해외유학까지 마친 이들이 수두룩하다.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가업 역시 구멍가게 수준이 아닌 만큼 이들은 재산을 불리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똑똑하고 현명한 배우자감을 원한다. 이들은 상대 측 부모의 배경 외에도 현금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 및 문화적 공감대와 취향, 출신 고등학교까지 꼼꼼히 따지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들 결혼정보회사에 등록된 회원들의 ‘훌륭한 조건’이 과연 사실이냐는 것. 이들 회사들이 보유한 고급 회원들의 프로필만 보면 국내 상위 몇%에 해당하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는 총망라돼 있는 듯한 착각이 드는 게 사실이다.
회사 측은 저마다 철저한 검증을 강조하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미심쩍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회사 측에서는 ‘사고’를 막기 위해 각종 증명서류를 받고 있지만 조작된 서류인지 여부까지는 알 수 없는 것이 사실. 이들 회사가 ‘수준에 맞는 최상의 배우자를 연결해준다’는 모토를 내걸고 있지만 일부 회원들 사이에서 불만이 쏟아지고 있는 것을 보면 과연 그 ‘매칭’이 얼마나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도 의문스런 부분이다.
또 ‘그렇게 뛰어난 배경과 조건을 지닌 사람들이라면 가만있어도 비슷한 집안의 자제들과 이어질 텐데 굳이 결혼정보회사를 이용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의견도 있다. 뿐만 아니라 온라인상에서 자신의 노블레스 회원권을 싸게 양도한다는 VIP 회원의 게시글을 종종 찾아볼 수 있는 점도 석연치 않은 부분이다.
실제로 상위권 외모에 음대를 졸업했다는 한 여성은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여성에게 260만 원짜리 회원권을 싼값에 양도하겠다며 글을 올렸다. 이 여성은 회사 측에도 말을 해놨기 때문에 아무 문제될 게 없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철저한 검증을 거친 이들만 가입할 수 있다는 노블레스 회원이 개인의 사정에 따라 마음대로 ‘물갈이’될 가능성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