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파를 막론한 새정치민주연합 초·재선 의원 상당수가 당을 해체하고 제3지대에서 대대적인 정계개편을 모색해야한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소장파 의원들이 9월 17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긴급 의원단 모임을 갖는 모습. 연합뉴스
박영선 원내대표 잠적 소동 과정에서 새정치연합은 과연 공당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무능력했다. 제1야당 원내대표가 3박 4일간 잠적한 것도 사상 초유의 일이지만 이를 차치하고서라도 새정치연합은 사태 해결을 위한 어떠한 수습책도 내놓지 못했다. 각 계파들이 삼삼오오 모여 연일 회의를 열긴 했지만 자신들의 정치적 득실만 앞세웠을 뿐이었다. 이를 지켜본 정치권 관계자들은 “정치 인생에서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 무슨 당이 이러냐. 초등학교 학급회의보다 못하다”고 입을 모았다. 새정치연합의 한 재선 의원은 사석에서 “정치에 환멸을 느낀다. 다신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혀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위기는 당 대표 교체로 귀결됐다. 여의도에선 이를 새정치연합의 ‘지도부 잔혹사’라 부른다. 새정치연합 모태라고 할 수 있는 열린우리당 창당 시점인 2003년 10월부터 지금까지 당 대표가 무려 28번이나 바뀌었다. 평균 1년에 두 명 이상이 대표에 올랐던 셈이다. 새정치연합 첫 지도부인 김한길·안철수 공동대표는 올해 3월 창당 후 150일 만에 물러났고, 박영선 원내대표 역시 당 대표격인 비대위원장에 오른 지 이제 겨우 한 달을 넘긴 상태였다.
윤호석 정치평론가는 “문제가 생기면 본질을 외면하고 대표 흔들기에만 골몰한다. 대표가 책임지고 나가라는 식”이라면서 “이러다 보니 대표가 계파 눈치 보기에만 급급하다. 또 대표의 영이 안 선다. 박영선 사태도 이러한 뿌리 깊은 문제점이 반복된 것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정치권에선 ‘해프닝’으로 끝났을 수도 있었던 이상돈 비대위원장 영입이 박영선 원내대표를 견제하려는 일부 강경파 ‘오버’로 확대됐다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중도 성향의 새정치연합 중진 의원은 “당 대표는 차기 잠룡군이다. 박 대통령도 대표 시절 대권주자로 떠올랐다. 그런데 매번 대표를 이런 식으로 몰아내서야 정치적 자산이 축적될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박영선 원내대표가 물러난 비대위원장 자리엔 5선 중진 문희상 의원이 추대됐다. 문 의원은 18대 대선 패배 직후인 지난해 1월에도 비대위원장에 올라 김한길 전 대표가 선출됐던 5월까지 당을 이끈 바 있다. 문 위원장은 범 친노로 분류되긴 하지만 비교적 계파 색채가 옅고 합리적 성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희상 비대위’ 출범으로 새정치연합 내분이 진정국면에 접어들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지만 이보다는 회의적 시선이 주를 이룬다. 계파 갈등이 전혀 해소되지 않고 잠재돼 있는 상황에서 비대위원장 교체만으로 돌파구를 찾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친노에 가까운 문 위원장에 대해 비노 진영에선 벌써부터 반발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기도 하다.
9월 18일 열린 비대위원장 추천 연석회의에 참석했던 한 원로 정치인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문 위원장을 추대하는 자리에서 몇몇 인사들이 ‘친노는 절대 안 된다’며 반대했다.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도 계파 논리가 또 불거진 것이다. 이를 보면서 새정치연합엔 미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희상 체제가 얼마나 갈지 장담할 수 없다”고 털어놨다.
더군다나 문 위원장 앞에는 전당대회라는 난제가 놓여 있다. 차기 전당대회는 2016년 총선과 차기 대권까지 맞물려 있어 각 계파가 사활을 걸고 있다. 첨예한 계파 갈등 끝에 구원등판한 문 위원장이 전당대회에 얽히고설킨 정치 방정식을 잘 풀 수 있을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문 위원장과 함께 비대위원장 후보군에 올랐던 정치인들이 하나같이 고사한 것도 전당대회라는 ‘독배’에 부담을 느낀 것과 무관하지 않다.
새정치연합 원로 정치인은 “내부 인사로는 전당대회를 치를 수 없다는 걸 다 알고 있다. 박영선 원내대표가 외부에서 비대위원장을 찾으려 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돌고 돌아 문희상이 됐다. 전당대회가 열리기도 전에 당은 몰락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치권에서도 새정치연합이 결국 해체 수순을 밟을 것이란 전망에 무게가 실린다. 이와 관련, 지난 2005년 1월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였던 천정배 전 의원이 물러났던 상황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천 전 의원은 개혁입법 처리가 당내 강경파에 의해 무산되자 전격 물러난 바 있다. 당시 이를 주도했던 게 초선의원 108명이었다. 지도부에선 이들을 가리켜 ‘백팔번뇌’라고 했을 정도다. 한 초선 의원은 의원총회에서 “초선들 군기를 잡겠다고 나서면 귀를 물어뜯겠다”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초선 의원들을 청와대로 불러 자제를 당부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들은 그 후 2007년 8월 열린우리당 해체를 추진하며 정계개편을 주도했다.
이들은 새정치연합을 해체한 뒤 제3지대에서 중도와 진보를 아우르는 외부 인사들이 대거 참여한 새로운 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논의를 진행 중이다. 이를 위해 학계와 시민단체 인사들과 연쇄적으로 접촉하고 있는 정황이 속속 포착되고 있다. 새정치연합 내에서 문희상 비대위와는 별도로 움직이고 있는 세력이 있다는 얘기다.
특히 손석희 JTBC 사장 영입에 공을 들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새정치연합의 또 다른 초선 의원은 “본인은 정치에 손사래를 치고 있지만 우리 입장에선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물이 손석희 사장이다. 어떻게든 끌어들여 새롭게 창당하는 정당의 쇄신 작업을 맡겨야 한다는 얘기들이 나오고 있다”고 귀띔했다. 또한 계파 청산 일환으로 오픈프라이머리 도입이 시급하다는 지적도 공감대를 얻고 있다.
이처럼 물밑 파문이 가라앉지 않자 기존의 잠룡과 각 계파 수장 발걸음도 빨라졌다. 어찌됐건 초·재선 의원 민심을 확보해야 향후 정계개편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는 까닭에서다. 안철수 의원은 당 내분에선 거리를 뒀지만 최근 새정치연합 의원들과의 스킨십을 재개하는 등 보폭을 넓히고 있는 모양새가 역력하다. 안 의원 측근은 “박영선 사태 후 리더십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시점에서 대권주자인 안 의원 역할이 있을 것으로 본다. 안 의원 역시 지금이 재기를 위해 좋은 기회로 판단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일각에선 정계은퇴를 선언한 손학규 상임고문 ‘컴백’도 조심스레 점치고 있다. 이에 대해 손 고문 측은 강하게 부인하고 있지만 새정치연합 원로급 인사 중에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선 손학규밖에 없다”는 입장을 갖고 있는 인사들이 많아 가능성은 열려있다. 실제로 손학규 계보로 분류되는 의원들은 조심스레 손 고문 의사를 타진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상돈 영입 후폭풍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문재인 의원의 경우 내부 단속에 치중하는 모습이다. 한 친노 의원은 “문 의원이 이상돈 영입과 관련해 친노계가 강하게 반발하는 것을 보고 당황해했다. 설득이 가능했던 것으로 봤던 것 같다”고 전했다. 문재인 대안 카드로 급부상하고 있는 안희정 충남지사는 박영선 원내대표가 당무 복귀를 선언한 9월 17일 국회를 방문했는데, 미묘한 시기의 안 지사 행보를 두고 친노 역학 구도가 바뀌고 있는 것 아니냐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