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부선(오른쪽)의 ‘난방비 0원’ 폭로로 아파트 비리 문제가 재조명되고 있다.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 관련 없음.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서울 강남구 논현동 K 아파트에 거주하는 하 아무개 씨(42)는 최근 황당한 일을 겪었다. 아파트에서 공부방을 운영하고 있는 하 씨에게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공부방 아이들이 엘리베이터를 사용하니 ‘특별 이용금’ 월 5만 원을 내라”고 요구한 것이다. 하 씨는 썩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큰 소란을 만들고 싶지 않아 엘리베이터 이용금을 내고 공부방을 운영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어느 날 관리사무소에서 하 씨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각서’라고 표시된 종이에는 ‘공부방을 운영하는 대신 아파트에 기부금 월 20만 원을 내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하 씨는 “기부금은 자신의 의지로 내는 것”이라며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관리소장과 이에 동조한 이웃들이 하 씨를 손가락질하기 시작했다. 결국 하 씨는 아파트 외부에 공부방을 차렸다.
하 씨가 거주하는 아파트는 총 세대수가 100세대가 되지 않는 작은 아파트다. 하지만 이 작은 아파트에서도 아파트 관리비 비리 문제로 주민들 사이에 법정공방이 오가고 있다. 공부방 문제로 아파트 관리소장과 갈등을 빚었던 하 씨도 아파트 관리소장이 바뀐 올해 초 아파트 운영진으로 부임했다. 올해 새로 부임한 감사와 함께 지난 5년간 아파트 관리 서류를 살펴보던 하 씨는 깜짝 놀랐다. 사무용품 구입부터 구청에서 지원해준 쓰레기 집하장 공사까지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았다.
올해 초 K 아파트 감사로 부임한 이 아무개 씨(55)도 쓰레기 집하장과 놀이터 공사 지출 내역이 지나치게 부풀려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3.5평 남짓한 쓰레기 집하장 공사 설계비가 평당 85만 원에 가깝게 책정돼 있었다. 또 놀이터의 놀이기구 ‘배치도’는 ‘설계도’로 둔갑해 설계비 명목으로 200여만 원이 지출된 것으로 확인됐다.
그런데 문제의 쓰레기 집하장 설계와 놀이터 공사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공사를 맡은 업체는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유력 정치인이 소유한 B 건축이었다. 감사 이 씨는 “이 문제로 ‘왜 다른 업체에서 하지 않고 B 업체를 통해 하느냐’고 따지자 전 관리소장은 명확한 설명을 하지 못하고 말을 계속 바꾸고는 했다. 이 아파트에 오래 사셨던 한 어르신이 ‘그 업체가 지역 정치권에 행사하는 영향력이 크다’고 귀띔해주시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 씨는 “가장 흔한 수법은 공사를 계속해서 만드는 것이다. 신축했다 철거한 경비초소는 전 아파트 임원진 중 한 명이 운영하는 펜션에서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런 비위를 밝히는 과정에서 한 운영진이 전 운영진에게 폭행을 당해 2달 가까이 입원하는 일도 있었다. 작은 아파트도 이 정도인데 큰 아파트는 말 할 것도 없다”고 지적했다. 현재 K 아파트는 주민투표를 거쳐 전 관리소장을 고소하고 소송 준비를 위해 변호사를 선임한 상태다.
아파트 관리와 관련한 민원은 지난해만 1만 1000건을 넘어섰다. K 아파트와 마찬가지로 관리비를 놓고 벌이는 소송만도 3000여 건에 이른다. 아파트 비리는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돼왔다. 아파트 관리 임원 비리와 아파트 관리회사 업체 선정 비리, 주민 선거 비리 등은 국민 10명 중 6명이 아파트에 거주하는 ‘아파트 공화국’의 어두운 뒷면이었다.
아파트를 관리하는 업체를 선정할 때마다 잡음이 끊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2만 세대가 넘는 서울 송파구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의 재개발 조합장 김 아무개 씨(58)는 관리업체 한 곳으로부터 무려 4억 원의 금품을 받은 것이 드러나 처벌을 받기도 했다.
주민 대표 선거를 치를 때면 경비업체나 각종 유지보수를 위한 공사업체는 긴장해야 한다. 누가 대표가 되는지에 따라 업체선정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주민대표들은 금품유혹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다.
아파트 관리비 비리가 끊이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입주자대표회의에 권한이 지나치게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입주자 대표, 동대표 등으로 구성된 입주자대표회의는 관리비 집행과 경비업체, 보수 공사업체 선정 등 막강한 권한을 승인하고 행사한다. 관리비 집행 내역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아파트도 있지만 대부분의 아파트가 자치 기구를 통해 관리비를 집행하기 때문에 내역이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아파트 주민이 관리사무소나 입주자대표회의에 문의를 해도 제대로 된 답변을 듣기 힘들다.
주민의 무관심도 아파트 비리와 의혹이 커져가는 이유다. 송주열 아파트비리척결운동본부 회장은 “비위가 발견돼 이웃 간에 고소고발이 오가면 대부분의 아파트 주민은 시끄러운 상황에 연루되고 싶지 않아 관리비를 더 내고 관심을 끊어버린다”고 설명했다. K 아파트 감사를 맡고 있는 이 씨도 “고소고발이 오가고 나서야 문제를 인지하는 주민들이 대다수다. 조금만 관심을 가져도 알 수 있는 비리가 많지만 그렇게 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고 토로했다.
아파트 비리를 전담하는 감시 시스템에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송주열 회장은 “아파트 관리비 비리를 척결하기 가장 어려운 이유는 감독관리 주체에게 강제력이 없다는 것이다”라며 “구청 주택과 공무원들도 시정권고나 명령은 할 수 있지만 부정행위를 못하게 강제하거나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은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송주열 회장은 “아파트 관리만 전담하는 새로운 기구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위탁관리업체와 공사업체를 선정할 때 비리가 발생하기 쉬운 만큼 경쟁 입찰과 최저가 낙찰제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회계 감사도 정기적으로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