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수현 금융감독원장(왼쪽)이 KB 내분 사태를 조기에 수습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금융지주사 회장과 은행장이 진흙탕 싸움을 벌인 KB금융 내분 사태는 당초 싱겁게 마무리될 것으로 예상됐던 사안이다. 금융감독원의 중징계 예고에 금융위원회와 감사원 등 정부당국이 개입하면서 최수현 금감원장이 한 발짝 물러서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당초 금감원은 KB지주 내분이 밖으로 드러나기 시작하자 2주일간 검사를 실시한 뒤 KB지주 경영진에 ‘중징계’를 사전통보했다. 하지만 금감원의 상위기구인 금융위원회는 ‘금감원이 무리수를 둔다’며 징계 수위를 문제 삼았다. 게다가 금융권에서도 금감원의 중징계 통보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개각을 앞둔 시점에 강단 있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금감원장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려 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었다.
그리고 금융위 간부가 참여한 제재심의위원회는 지난 6월 이후 두 달간 6차례에 걸친 회의를 연 뒤 ‘경징계’를 결정하며 금감원의 판단을 뒤집었다. 여기에 감사원까지 중징계 결정에 제동을 걸고 나서면서 최수현 원장은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최 원장은 보름 가까이 최종결정을 미루면서 시간을 끌었다. 문제는 그가 장고에 들어간 사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전됐다는 점이다. 이 기간 임영록 KB금융 회장과 이건호 국민은행장은 ‘템플스테이 사건’과 검찰 고발 등 ‘막장’으로 치달았다.
최 원장은 2주간 최종결정을 늦추다 지난 9월 4일 제재심의원회 결과를 다시 뒤집는 초강수를 뒀다. 이날 최 원장은 임영록 회장과 이건호 행장에 대한 징계를 중징계로 끌어올렸다. 이건호 행장은 곧바로 사퇴했지만 임영록 회장은 퇴진을 거부하며 버티기에 들어갔다.
이렇듯 감독당국이 갈팡질팡하며 사태수습에 미숙함을 드러내는 동안 정부 사이드에서 심상치 않은 기류가 번져갔다. 먼저 9월 1일 청와대 노사정 간담회에서는 최수현 금융감독원장의 거취문제가 거론되는 의외의 상황이 연출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고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안종범 청와대 경제수석 등이 배석한 이 자리. 김문호 금융노조 위원장은 KB금융 사태를 거론하면서 “부실 징계로 경영공백을 초래한 최수현 원장이 즉각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측 인사들은 즉답을 피했지만 이날 이후 금융권에서는 이전에는 들리지 않던 얘기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최수현 원장이 징계수위를 다시 중징계로 바꿀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 것도 이때부터다. 실제로 최 원장은 노사정위 사흘 뒤 2주간의 침묵을 깨고 중징계인 ‘문책경고’ 결정을 발표했다.
금융당국 책임론과 금감원장 경질설도 들려왔다. 사태를 조기에 수습하지 못하고 일이 커지도록 만든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오비이락 격으로 최 원장의 중징계 결정 바로 다음날인 5일 신제윤 금융위원장이 전면에 등장했다. 신 위원장은 최수현 원장의 문책경고보다 한 단계 높은 ‘직무정지 3개월 처분’을 내렸다. 그리고 서울중앙지검은 기다렸다는 듯 KB금융 건을 특수부에 배당하며 수사에 착수했다.
최수현 위원장이 지난 1월 금융회사 고객정보 유출사건 재발방지 종합대책 브리핑에 참석하기 위해 기자실로 들어서는 모습.
사태를 마무리 짓기 위해 금융당국 최고 수장까지 직접 나서 최수현 원장 결정을 또 다시 뒤집자 금융권에서는 배경을 놓고 뒷말이 무성했다. 한 금융사 고위 관계자는 “청와대에서 사태를 조기에 해결하라는 지시가 있었던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결국 언론에서는 최수현 원장의 경질 시기를 조율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청와대는 이를 즉각 부인했다.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해당 보도가 나온 날 “그런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관계자에게 확인한 결과 ‘그런 사실이 없다’는 것으로 확인이 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금융권은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는 분위기다. 경질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퇴진 방식과 시기를 정하지 않았다는 의미라는 얘기다.
은행권 고위 관계자는 “금융권 수장급은 경질이 아니라 스스로 물러나도록 하는 것이 관례다. 당장 이건호 행장도 자진사퇴했고 KB금융 이사회도 임영록 회장에게 거취 결정을 권고했지 않느냐”며 “최수현 원장의 전임자인 권혁세 전 원장도 임기를 1년이나 남긴 상태에서 자진사퇴 형식으로 교체됐다. 설령 바꾸더라도 중도에 윗선에서 쫓아내는 방식보다는 일단 사태를 최종 수습하며 끝까지 책임지는 모습을 보인 뒤 본인이 용단을 내리도록 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사실 최수현 원장에 대한 경질설은 지난해부터 수차례 나돈 바 있다. ‘동양그룹 사태’가 발생했을 당시에는 진앙인 동양증권에 대한 부실한 관리감독이 도마에 오르며 정치권의 사퇴압력에 내몰렸다.
올해 들어서는 신용카드 정보유출 사건이 터지면서 또 다시 책임론에 시달렸다. 정보유출이 은행권에서까지 발생했던 것으로 밝혀지면서 은행과 카드사 CEO들이 줄줄이 옷을 벗었고, 급기야 금감원장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이 때문에 ‘금융은 사고뭉치’라는 부정적 인식이 정부당국에까지 번진 것으로 금융권은 보고 있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이 최근 직접 나서 ‘금융권 보신주의’를 언급할 정도로 금융당국이 정부에 부담스런 존재가 되고 있다는 것이 금융권의 해석이다.
이미 금융권에서는 차기 금감원장 후보가 실명으로까지 거론되고 있는 상황이다. 내부의 경우 금감원 업무를 두루 잘 아는 것으로 알려진 한 고위 간부가 승진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고, 외부에서는 금융부문 업무를 많이 다루는 경제부처 고위급 인사가 하마평에 오르고 있다.
하지만 최수현 원장의 생존능력을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는 관측도 적지 않다. 그가 금감원장에 임명될 당시 의외라는 반응이 상당수였듯 최 원장의 내공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린 최수현 원장이 이번에도 윗선의 재신임을 얻으며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설지 주목된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