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태 전 의장은 “그때 한 번만 싫은 표정을 지었다면 그랬겠느냐”며 성추행 논란을 해명했지만 더욱 궁지에 몰리는 양상이다. 위는 사건이 벌어진 강원도 원주의 한 유명 골프장. 일요신문 DB
지난 11일 오전 8시 강원도 원주의 한 유명 골프장. 박희태 전 국회의장은 지인들 부부와 함께 골프 라운딩에 들어갔다. 부부는 각각 남녀 팀이 나뉘어 2명씩 라운딩을 즐겼다. 경찰에 따르면 여자 팀이 앞에서, 남자 팀이 뒤에서 골프를 쳤다고 한다.
한창 코스를 돌고 2시간 후인 오전 10시쯤. 골프장 캐디 관리실에 무전 하나가 접수됐다. 캐디 A 씨(여·23)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A 씨는 “더 이상 라운딩을 하지 못하겠다. 담당 손님이 신체 접촉이 심하다”라고 골프장 측에 전했다. A 씨는 교체를 요청할 당시 박 전 의장의 신분을 전혀 몰랐던 것으로 전해진다. 골프장 캐디마스터는 해당 팀을 확인 후 곧바로 남자 캐디를 투입해 A 씨와 교체했다. 통상 손님이 캐디를 교체해 달라는 경우는 있어도 캐디가 직접 교체를 원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어 골프장 측에서도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A 씨는 골프장 측에 신체 접촉 사실을 전했다. 골프장 측이 접한 내용은 성희롱을 넘어 성추행에 가까웠다. 골프장 측은 “교체 요청은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 데 따른 것으로 확인됐다. 자문변호사를 통해 A 씨의 인권을 최대한 보장하는 방안을 모색 중”이라고 밝혔다. A 씨는 사건 당일 경찰에 신고할 결심을 굳혔지만, 박 전 의장 측이 이 사실을 골프장 측으로부터 전해 듣고 당일 저녁 직접 원주까지 내려와 A 씨를 적극 설득하기 시작했다. 박 전 의장의 보좌진이 직접 A 씨의 부모를 만나는 한편, 박 전 의장 또한 A 씨를 만나 “내가 딸만 둘이라서 (어린 친구들을 보면) ‘귀엽다, 귀엽다’ 한다. 그 습성이 남아서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해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A 씨의 입장은 강경했다. A 씨는 다음날인 12일 오후 3시 30분쯤 강원 원주경찰서를 찾아가 피해 신고를 했다. 피해자 진술을 접한 강원 원주경찰서는 성추행을 벌였다는 당사자 이름을 전해 듣고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고위급 정치인인 박희태 전 의장이 연루되었기 때문. 원주경찰서 관계자는 “통상 이런 사건은 성폭력팀이 담당하지만 고위 인사인 박 전 의장이 연루된 만큼 곧바로 강원경찰청으로 이첩됐다. 사건이 처음 알려질 당시 경찰서가 떠들썩했다”라고 전했다.
A 씨의 고소 내용에 따르면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A 씨는 박 전 의장이 노골적으로 가슴을 찌르고 손목을 잡는 등 성추행을 벌였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일각에서는 박 전 의장이 더 심한 행동을 했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캐디가 일반적인 수준의 ‘터치’를 넘어서는 수준의 성추행을 당했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교체요구를 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박 전 의장이 A 씨의 특정 신체부위를 노골적으로 만지고 움켜쥐고 쓰다듬는 등의 ‘적극적인’ 행동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A 씨의 진술이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박 전 의장은 성추행 사실을 적극 부인하고 나섰다. 박 전 의장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내가 딸만 둘이다. 딸을 보면 귀여워서 애정의 표시를 남다르게 하는 사람이다. 어깨나 등을 치거나 엉덩이 만지거나 그랬다고 하는데 그 때 한 번만 싫은 표정을 지었으면 그랬겠냐. 전혀 그런 거부감이나 불쾌감을 나타낸 일이 없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박 전 의장은 A 씨의 몸을 ‘터치’했다는 점은 스스로 인정해 곤경에 처한 모습이다. 박 전 의장은 “손가락으로 가슴 부위를 한 번 쿡 찔렀다고 하는데 그런 적이 절대 없다”면서도 “귀엽다는 수준에서 ‘터치’한 거고 ‘예쁜데 총각들 조심해라’ 이런 얘기를 해줬다”라고 밝혀 논란을 자아냈다.
경찰에 따르면 박 전 의장의 입장은 더욱 더 궁지에 몰리는 양상이다. 사건을 조사 중인 경찰은 17일 “A 씨가 조사 과정에서 ‘홀마다 성희롱 및 성추행을 당했다. 성적 수치심을 느낄 정도의 신체접촉이 있었다’고 진술했다”고 밝혔다. 박 전 의장이 1홀부터 9홀까지 다양하면서도 상당한 성추행을 저질렀다는 점을 유추하게 하는 대목이다. 경찰은 혐의 입증에도 자신감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관계자는 “박 전 의장과 피해자와의 합의 여부는 상관없다. 혐의를 입증할 만한 상당한 정황과 진술이 있다”라고 밝혔다.
한편 <일요신문>은 지난 19일 오전 해당 골프장을 직접 찾았다. 여러 정치인들에게 사랑 받는 유명 골프장에 걸맞게 상당한 규모와 풍경을 자랑하고 있었다. 한 골프장 관계자는 “현재 A 씨를 만나기는 힘들다. 사건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알려져서 본인이 더욱 힘들어 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A 씨의 동료들은 A 씨의 성추행 피해 사실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A 씨의 한 동료는 “이미 사건이 발생한 후부터 소문이 쫙 퍼졌다. 사안에 대해 말할 것도 없다”면서도 “이 스케줄 표를 봐라. A 씨의 이름이 회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사건이 터진 이후 회사에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이라며 안타까운 반응을 나타냈다.
박 전 의장에 대해서는 캐디들의 성토가 이어졌다. 한 여성 캐디는 “나이도 있고 사회적 지위도 있으면서 그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고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박 전 의장이 ‘기피 고객’으로 소문이 났다는 목소리도 이어졌다. 또 다른 여성 캐디는 “박 전 의장이 여기 골프장 회원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다른 골프장에서 여러 상당한 구설수에 올랐고 이미 아는 캐디들 사이에서는 입소문이 충분히 퍼졌다”라고 전했다. 캐디들이 자주 모이는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2009년 박 전 의장과 라운딩을 나간 적이 있다. 2캐디를 쓴다 해서 2명을 불렀는데 카트에 탈 자리가 부족하다며 캐디 한 명을 걸어서 일하라고 했다”고 주장했다. 사실 여부를 확인해야겠지만 골프장에서 박 전 의장의 평가가 좋지만은 않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증언들이라는 점에서 주목해볼 만하다.
결국 A 씨와 박 전 의장의 진실게임은 조만간 밝혀질 것으로 예상된다. 19일 강원지방경찰청 성폭력특별수사대는 골프장 내 CCTV를 입수해 분석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CCTV 영상은 박 전 의장 일행이 골프를 치는 모습이 전반적으로 담긴 것으로 파악돼 박 전 의장의 성추행 혐의를 가릴 중요한 열쇠가 될 전망이다. 이미 강원경찰청은 16일 박 전 의장을 피혐의자 신분으로 한 출석요구서를 보낸 상태다. 10일 이내에 출석해 조사를 받아야 하는 박 전 의장은 아직까진 출석 의사를 밝히지 않고 있지만, 물밑에서 경찰과 날짜를 조율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이미 골프장 현장조사와 참고인 조사 등 기초조사를 끝냈다. 진술에 신빙성이 있어 박 전 의장의 소환 조사가 불가피한 것으로 판단된다”라고 전했다.
원주=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