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자신의 인생을 즐기는 노인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어느 보험사의 CF 광고, 남녀 4명을 살해한 70세 어부 오 아무개 씨, 숭례문 방화 피의자 채 아무개 씨. | ||
다름 아닌 한 보험회사의 CF 장면이다. 이 광고는 노후를 자녀들에게 의지하던 전통적 노인상과는 달리 자신의 삶을 주도하고 즐기려 하는 요즘의 노인상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실제로 무기력하고 쉽게 체념하고 인내만 하던 전형적인 노인상은 이제 옛말이 됐다. 50대 못지않은 체력과 소유욕, 적극적 사고방식을 지닌 새로운 노인층, 이른바 신(新)노인이 우리 주변에 나타나고 있다. 자녀보다는 자신의 인생을 더 중요시 여기는 ‘이기적 노인’들이 새로운 소비 계층으로 떠오르고 있는가 하면 사회적 약자로만 인식되던 노인들이 숭례문 방화사건과 보성 어부 연쇄살인사건에서 보듯 각종 강력범죄의 한가운데에 등장하고 있다. 과연 신노인들은 누구인가. 요즘 노인들의 달라진 사고방식과 라이프스타일 등을 통해 신노인의 존재에 한 발 다가가보자.
통계청의 최근 발표에 따르면 2007년 7월 1일 현재 우리나라 총인구는 4845만 6000명. 그중 65세 이상의 노인 인구는 481만 명으로 전체의 9.9%에 이른다. 1990년 노인 인구가 총인구(4286만 9000명)의 5.5%(219만 5000명)에 그쳤던 점을 감안하면 17년 만에 두 배 가까이 늘어난 셈이다. 통계청은 고령인구가 급속히 늘어나는 현재의 추이로 볼 때 2026년에는 노인 인구가 총인구의 20.8%를 차지할 것으로 예측했다.
총인구 중 65세 이상의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이 7% 이상이면 ‘고령화 사회’, 그 비율이 20% 이상이 되면 ‘초고령 사회’라고 한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이미 고령화 사회에 진입해 있으며 빠른 시기에 초고령 사회로 들어설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노인 인구가 빠르게 증가함에 따라 노인을 중심으로 한 사회·문화적 변화를 예고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리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는 <새로운 소비자집단 등장과 기업의 대응> 보고서에서 “최근 젊은 층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자기중심적이고 감각지향적인 소비패턴이 노년층까지 확산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하고 “손자·손녀를 돌보던 전통적인 할아버지·할머니상을 거부하고 자신들만의 인생을 추구하는 신세대 노인층이 향후 비중 있는 소비자집단으로 등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보고서는 젊은 세대에게 널리 퍼져 있는 자기중심적이고 감각적인 소비유형이 향후 노년층에까지 확대될 것으로 전망하고 주목해야 할 마케팅 타깃으로 ‘통크족’(Tonk)을 꼽았다. 통크족이란 ‘Two only no kids’의 약칭으로 자녀에게 부양받기를 거부하고 부부끼리 독립적으로 생활하는 노인세대를 뜻한다. 전통적인 가족개념이 해체되면서 핵가족화가 진전되고 있을 뿐 아니라 향후 연금시장 확대 등 노년층의 경제력 향상으로 이들의 구매력 증가가 두드러질 것으로 예측한 것이다.
실제로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1990년 이후 55세 이상 장·노년층 가구의 소득은 매년 10%씩 늘어나고 있고 2010년에는 국민연금 등 연금수급권자가 400만 명에 달하는 등 경제력을 갖춘 고령인구가 소비의 주체세력으로 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664세대’ 즉 40년대에 출생해 60년대에 대학 등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신노인’들이 있다. 자신이 쌓아놓은 부를 토대로 자녀들로부터 독립해 노후를 즐기려는 경향이 강해진 것이 이들 신노인들의 주요 특징.
IMF 이전 ‘평생고용의 신화’가 보장됐던 마지막 세대로 50~60년대의 빈곤과 산업화로 인한 고도성장 등을 모두 체험한 이들은 경제적 능력을 바탕으로 과거의 노인들과는 다른 라이프스타일을 보이고 있다. 보다 강건한 신체를 가지고 소비생활을 즐기는가 하면 자신의 삶을 이전 50대 시절과 마찬가지로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이들 신노인에게 환갑잔치는 ‘말년 잔치’가 아니라 인생의 터닝 포인트에 불과하다.
통크족인 ‘이기적 노인’들의 대표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살펴보면 이들은 자녀보다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우선순위를 더 높게 매기고 있다. 과거 노인들이 맞벌이하는 자식 부부를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손자손녀를 키워준 것과 달리 신노인들은 경제력만 뒷받침되면 “차라리 양육비를 보조하겠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노인들 중에는 자녀들과 함께 살지 않고 실버타운 등에서 자신만의 여생을 즐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서울 성북구 종암동에 위치한 노블레스 타워도 노인들이 몰리는 실버타운 중 하나. 이곳은 계약 시작 3개월 만에 이미 80% 정도 입주 계약이 끝난 상태다. 실버타운 관계자는 “입주 노인들의 3분의 2는 70대”라며 “이들 대부분이 10억~20억 원 정도의 자산을 가진 연금 수여자들”이라고 밝혔다. 32평 기준으로 식사비 등을 포함한 관리비가 월 150만 원 정도 들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재력을 갖춘 중상류층의 노인들이 많이 입주했다고 한다. 실버타운 관계자에 따르면 이곳에 입주한 노인들의 자녀들은 대부분 판·검사나 의사, 교수 등 사회지도층 인사라고 한다.
강원도 춘천이 고향인 김 아무개 할머니(73)는 입주한 지 10일 정도밖에 안 됐지만 실버타운에 대해 만족감을 나타냈다. 김 할머니는 “자식 도움 안 받고 내 재산 가지고 들어왔다”며 “내가 혈압이 좋지 않은데 매일 아침마다 간호사가 방에 와서 혈압을 체크해줘서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김 할머니는 “이제는 내 인생을 살고 싶다”며 “이곳에 입주한 대부분의 노인들이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신세대 노인의 또 다른 특징은 무엇보다도 대인관계나 사회활동과 같은 ‘사회적 관계’를 중요시 여긴다는 점이다. 가족이나 이웃, 특정 집단과의 새로운 관계설정 등을 통해 자신의 역할과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경향이 높다는 것.
노인들의 고민을 상담해주는 ‘한국노인의 전화’(02-303-0070) 강병만 사무국장은 “94년부터 2000년까지는 취업과 일자리, 고독과 소외감 등에 관한 것이 주된 상담 내용이었으나 2001년부터는 오히려 가족이나 노인들 간의 관계와 문제 등에 대한 상담이 많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강 사무국장은 “노인들이 가족 구성원들 또는 사회 구성원들과의 관계 설정에서 겪는 어려움이 상대적으로 늘어난 것”이라고 풀이했다.
성형외과 전문의들에 따르면 근래 들어 주름살, 검버섯 등을 없애기 위해 병원을 찾는 노인들이 꾸준히 늘고 있다고 한다. 이런 현상을 단순히 젊어 보이려는 욕구의 표출로도 볼 수 있지만 늙어 보이는 것이 사회활동에 불리하다는 노인들의 판단도 작용하는 것 같다는 게 전문의들의 전언이다. 원만한 대인관계나 사회활동을 위해 성형을 선택하는 노인층이 늘고 있는 것이다.
성에 대해 적극적이라는 사실도 신노인들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다. 비뇨기과의원에서 노인 환자와 마주치는 것은 이제 드문 일이 아니다. 이들은 의사들에게 각종 시술을 요구하기도 하고 발기부전제의 처방전을 들고 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성적 취향 때문에 인터넷을 접하는 노인층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한 인터넷 성인용품점 관계자는 “과거에 비하면 노인층의 문의전화와 상품 주문이 많이 늘어난 편”이라고 전했다.
이윤수 비뇨기과 전문의는 “현대 의학의 발전으로 육체적 노화의 진행이 더뎌진 게 사실이다. 그러나 나이가 든다고 해서 성욕도 함께 감퇴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노인들의 경우 파트너가 없거나 주위의 시선과 체면 때문에 욕구를 억눌러왔던 것일 뿐”이라며 최근 들어 노인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성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진다고 전했다. 또한 그는 “사회적으로 노인들의 욕구해소를 위해 건전한 만남을 많이 주선하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노인들이 많이 모이는 서울 종묘공원 등지에서 일명 ‘박카스 아줌마’와 불법 성행위를 갖는 노인들이 증가하는 것도 노인들이 건전한 만남을 가질 공간이 없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신노인은 경제적 안정 속에서 독립된 삶을 추구하고 성생활 등에 적극적이며 사회활동이나 대인관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끊임없이 확인하려 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통계청의 ‘장래인구 추계’에 따르면 오는 2030년이면 65세 이상의 노인인구가 총인구의 4분의 1에 달할 것이라고 한다. 우리 사회의 ‘새로운 주류’로 떠오르는 신노인에 대한 이해와 이들의 역할에 대한 배려가 없다면 앞으로 닥칠 초고령 사회는 그 자체로 재앙이 될 것이라고 사회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이윤구 기자 trust@ilyo.co.kr
김동욱 인턴기자 sigfri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