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춘남 씨 폭행시비 관련 김홍일 전 의원은 거동이 불편한 상황에서 그와 같은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사진은 사건 발생 5개월 후 김홍일 전 의원. | ||
김 전 의원이 어려웠던 시절 제3자를 통해 고액의 식당개업자금을 빌려줬고 이후 DJ의 당선 등으로 사정이 호전된 김 전 의원에게 채무변제를 요구했지만 그는 채무사실을 부인하며 오히려 자신을 폭행했다는 것이 고 씨의 주장이다. 김 전 의원의 행동에 분노한 고 씨는 인터넷을 통해 김 전 의원과의 채무관계 및 폭행사실을 폭로하는 동시에 그의 도덕성을 지탄하는 글을 올렸고 결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시점에 선거법’ 위반으로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도 고 씨는 통상적인 수사와는 어긋나는 불법적인 수사를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 전 의원을 비방한 혐의로 고 씨를 체포할 당시 경찰이 법에 정해진 절차를 따르지 않고 DJ일가의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움직여졌다는 것이 고 씨의 주장이다.
고춘남 씨와 김홍일 전 의원의 ‘악연’은 198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는 DJ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주동한 혐의로 사형 확정판결을 받았다가 극적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미국으로 망명해있던 때. 당시 DJ 측근들의 증언에 따르면 김 전 의원은 말 그대로 비참하게 지내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엔 DJ의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고 씨는 김 전 의원의 상황이 안타까웠다고 한다. 이에 고 씨는 생계유지를 위해 갈비집을 운영하길 원하는 김 전 의원에게 고 박종률 전 의원을 통해 개업자금의 절반인 3000만 원을 차용해 줬고 김 전 의원은 이 돈으로 신촌에 ‘백제갈비집’을 창업했다는 것이 고씨의 주장이다. 그 후 DJ는 대통령에 당선되고 김 전 의원도 국회의원이 되는 등 모든 상황이 좋아지자 고 씨는 돈을 돌려받을 때가 됐다고 판단, 김 전 의원을 수차례 만나 갈비집 창업대금 반환을 요구했다고 한다. 김 전 의원은 처음에는 자신의 보좌관이 동석한 자리에서 보상을 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차일피일 보상을 미뤄오다가 급기야 채무사실 자체에 대해 부인하기 시작했다는 것.
고 씨가 김 전 의원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한 날은 2002년 12월 2일. 고 씨가 당시 민주당 간부였던 송 아무개 씨와 함께 김 전 의원의 국회 사무실을 찾아간 날이었다. 고 씨는 이날 자신을 무시하고 지나치려는 김 전 의원의 길을 가로막으며 “몇 번이나 찾아왔는데 또 그냥 가려 하느냐. 이제는 정리를 해줘야 하지 않나”라며 재차 대금반환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 전 의원은 “내가 누군데 까부느냐”는 폭언과 함께 고 씨의 얼굴과 가슴을 폭행했다는 것이다. DJ를 돕다가 중앙정보부에 의해 갖은 고문을 당해 목인대불화증을 겪고 있던 고 씨는 이날 김 전 의원의 폭언과 폭행으로 정신적으로도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김 전 의원의 행동에 분노한 고 씨는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그 일을 알리기 시작했는데 결국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선거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기에 이른다.
“그해 2월 6일 천안의 한 PC방에 있는데 3명의 남자가 다가왔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목포에서 온 형산데 현행범으로 체포하겠다’고 했다. 당시 나는 새천년민주당 홍보부위원장으로 신분도 확실한데 현행범으로 체포한다는 것이 기가 막혀서 ‘영장이 있느냐?’고 했더니 ‘없다’고 하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다짜고짜 ‘손 좀 보실까요?’ 하면서 내 손에 수갑을 채웠다. 그길로 그들이 타고 온 갤로퍼 차량에 실려 목포까지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는 것이 고 씨의 주장이다.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된 고 씨는 이후 목포교도소에 수감됐다가 4월 2일 집행유예로 풀려나게 된다.
하지만 고 씨는 자신이 체포되어 조사받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석연치 않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며 DJ부자의 입김이 작용한 전형적인 권력형 수사가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고 씨가 문제 삼는 부분 중의 하나는 우선 자신이 고소장이나 영장도 없이 체포됐다는 점. 고 씨는 “목포경찰서에 도착하자마자 수갑을 찬 상태로 조사를 받았다. 고문 후유증으로 정상이 아닌 몸이라 장시간 조사는 엄청 고통스러웠다. 한창 조사를 받고 있는데 당일 오후 9시 반쯤 우편부가 ‘항공편으로 우편물이 도착했다’며 서류를 주고 가더라. 그것은 바로 김 전 의원이 작성한 피해조서였다”고 주장했다.
▲ 폭행사건 증인 송 씨가 지난달 22일 김 전 의원에 보낸 서신. | ||
통상적인 법 절차는 출석요구서를 몇 차례 보낸 뒤 정당한 이유없이 출석에 응하지 않을 경우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강제 구인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고 씨의 경우에는 영장도 없이 출석요구서를 보낸 당일, 그것도 목포까지 ‘원정체포’되는 이상한 공무집행이 이뤄졌다고 항변했다.
이상한 점은 그뿐이 아니었다. 목포경찰서가 고 씨를 체포하기 위해 KT에 위치추적 확인을 할 수 있는 ‘통신사실 확인서자료승인서’를 요청한 날도 2004년 2월 6일이었는데 KT로부터 승인받은 날 또한 2004년 2월 6일이었다.
정리해보면 경찰은 2004년 2월 6일 고 씨의 자택으로 출석요구서를 보냄과 동시에 KT에 통신확인자료승인서를 제출해 그날로 KT의 승인을 받은 뒤 즉시 고 씨를 추적, 체포했으며 고 씨는 증거인멸이나 도주위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의 고소장이나 영장도 없이 원정체포, 목포까지 끌려가 조사를 받고 당일 구속되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는 얘기가 된다. 그리고 그날 밤 김 전 의원으로부터 다급히 우편으로 피해조서를 받아 검찰에 고소장을 제출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김 전 의원과 고 씨 사이에 있었다는 일들은 과연 사실일까. 피해자 조서에서 김 전 의원은 “나는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특수신분을 감안해 처신에 특히 조심해왔으나 고 씨는 근거없는 중상 모략 비방의 글을 올려 내 명예 및 선거에 악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또 고 씨가 주장하는 채무문제와 관련 김 전 의원은 “나는 고 박종률 전 의원에게 투자금 형식으로 3000만 원을 빌려 원금과 이자를 전액 상환했으며 고 씨와 금전거래를 한 적이 없고 차용증을 써준 사실도 없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고 씨는 이 부분에 대해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당시 고 박종률 전 의원이 김 전 의원의 부탁으로 3000만 원을 빌리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고 씨는 “이 점은 DJ나 김 전 의원의 측근들이 더 잘 알고 있다”며 “그들은 증언을 거부하고 있지만 사석에서는 자신들이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까지 했다”고 주장했다. 김 전 의원이 3000만 원을 갚았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고 씨는 죽은 사람에게 확인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자신을 찾아온 고 씨를 폭행했다는 부분에 대해서 김 전 의원은 “고 씨가 집요하게 본인의 사무실을 찾아와 행패를 부리며 협박을 하던 가운데 사건 당일 사무실을 나가려고 하는데 길을 가로막기에 비키라며 실랑이를 벌인 적은 있다. 그러나 거동이 불편해 수행원의 부축을 받고 있던 내가 어떻게 폭행할 수 있었겠나. 전혀 사실이 아니며 이는 고 씨의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고 강하게 반박하고 있다.
2004년 1월 고 씨는 서울중앙지검에 김 전 의원을 폭행죄로 고소했으나 김 전 의원은 그해 8월 10일 혐의없다는 이유로 불기소처분 결정을 받았다. “사건 당일 김 전 의원이 밖으로 나가려던 중 면담을 요구하는 고 씨와 마주쳤다가 지나친 사실은 인정하지만 폭행사실은 전혀 없다고 하고 있고, 현장을 목격한 보좌관도 김 전 의원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고 씨를 밀치고 간 사실은 있지만 폭행사실은 없다고 진술하고 있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특히 “고 씨는 김 전 의원이 주먹으로 고 씨의 가슴과 목을 수차례 가격했다고 주장했으나 고 씨가 증인으로 내세운 송 아무개 씨 역시 김 전 의원이 고 씨를 때린 사실은 없고 고 씨의 가슴을 밀어 넘어뜨렸다고 진술하고 있는 바, 밀친 정도의 행위는 형법 제20조 소정의 사회통념상 허용될 만한 죄가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 고 씨가 비방글을 유포했다는 내용의 김홍일 전 의원 피해 진술서. | ||
고 씨는 송 씨의 진술 번복과 관련, 김 전 의원의 압력 때문이라고 주장했는데 그 증거로 올 5월 22일 송 씨가 김 전 의원에게 보낸 서신을 공개했다. 서신 내용 일부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네. 아우님과 고춘남이를 화해시켜 주기 위해 아우님 의원회관을 방문하였을 때 그냥 느닷없이 아우님이 고춘남의 가슴과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해 고춘남이가 ‘악!’하는 비명소리를 지르며 맥없이 쓰러지던 날을. 그 후 그 억울하고도 분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해 고춘남이가 아우님을 고발하게 된 것인데 적반하장이라는 말 그대로 그런 고춘남이를 아우님이 보이지 않는 힘을 이용해 목포교도소에 수감시킨 사실을. 그리고 검찰청에서 아우님의 폭행사실을 수사하려고 하자 상황이 다급하고 불리해진 아우님은 김 아무개 보좌관과 함께 나에게 ‘폭행한 사실이 없다’는 진술번복을 요구해 나는 내 양심을 속이면서까지 두 차례 검찰청에서 조사받을 때 아우님을 위해 진술번복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일을. 그때 당시 진술 번복을 요구하며 ‘고춘남이를 어떤 식으로라도 도와주겠다’고까지 했던 그 약속의 말까지도 말일세.”
채무관계에서 시작된 김 전 의원과 고 씨의 갈등, 그 과정에서 벌어진 폭행, 또 권력을 등에 업은 ‘무대포식’ 수사가 이뤄졌다고 주장하는 고 씨. 그리고 채무뿐만 아니라 폭행사실 자체를 부인하고 있는 김 전 의원. 양측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지만 법적으로는 해결할 방법이 없어 보인다. 채무문제는 시효가 지났고 폭행 부분도 송 씨의 증언 번복만으로는 재심청구의 사유가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고 씨와 DJ가의 끈질긴 악연이 어떻게 끝을 맺을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