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TG 삼보로 원주에 둥지를 틀었고, 어느새 12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5개월 만의 소속팀 합류가 부담스러운 건가.
“그동안 대표팀에 갔다가 소속팀으로 복귀하는 일이 한두 번도 아닌데, 이상하게 이번에는 우리 팀이 낯설다. 마치 새로운 팀에 온 것처럼. 선수들도 바뀌고, 팀 분위기가 재정비되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조금씩 변화가 있었다. 10월 11일 시즌 개막 전까지 하루 빨리 팀 색깔에 녹아들려고 노력 중인데, 급한 마음처럼 쉽지만은 않다. 얼마 전 삼성과의 연습경기에 26분을 뛰었는데 손발이 잘 맞지 않더라.”
―대표팀에서 복귀하자마자 연습 경기에 투입이 된 건가.
“선수들과의 호흡을 맞춰보는 차원이었다. 연습경기에서 이기려고 들어간 건 아니다(웃음).”
―5개월간의 대표팀 생활 동안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뉴질랜드로 전지훈련을 다녀왔고, 스페인 농구월드컵에도 출전했으며 아시안게임까지 치렀다.
“이번 대표팀에서는 경기 출전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래도 대표팀을 나오면 진이 빠진다. 항상 긴장된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5개월 동안 동고동락했던 선수들이라 지금은 우리 팀 선수들 보다 대표팀 후배들이 더 친숙하다. 이젠 ‘원팀’이 아닌 경쟁 팀으로 만나야 하지만, 후배들과 보낸 시간들이 그립고 추억으로 남아 있다.”
―지난 5월 유재학 감독이 대표팀 최종 명단을 발표했을 때, 자신의 이름이 포함된 걸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나.
“8월 스페인에서 열리는 농구월드컵 출전과 아시안게임을 위한 대표팀 구성이었는데, 다른 것보다 농구월드컵은 내가 가는 게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좋은 대회를, 세계적인 선수들을 모두 볼 수 있는 대회는 나보다는 앞으로 한국 농구를 이끌어줄 후배들이 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운 좋게 농구월드컵을 한 번 더 경험했고, 예상대로(?) 5전 전패를 한 뒤 참담한 심정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 후 아시안게임 시작 전까지 선수들이 힘든 시간을 보냈다. 세계무대의 벽을 체험한 후유증이 꽤 깊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코트보다는 코트 밖에서 후배들을 격려하고 다시 힘을 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일련의 어려운 과정을 극복하고 치른 아시안게임이었고, 거기서 예상치 못한 금메달을 획득해 기쁨이 두 배 이상이었다.”
―농구월드컵이 이전에는 ‘세계선수권대회’로 불렸다. 1998년 그리스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때와 이번 스페인 월드컵과는 어떤 차이가 있었나.
“내가 대표팀 경력이 화려하긴 해도 농구월드컵처럼 큰 국제대회 경험이 많지 않았다. 16년 전에 출전했던 세계선수권대회는 중앙대 1학년 신분이라 서장훈, 전희철, 현주엽 등 쟁쟁한 선배들에 밀려 출전 시간이 2~3분도 채 되지 않았다. 나이가 어려 전체적인 그림을 보기 어려웠다. 막내 노릇 하기도 바빴으니까. 그러다 이번 스페인에서는 16년 전에 느끼지 못했던 세계 농구의 벽을 절감했다. 신체조건은 말할 것도 없고, 실력, 기술, 모든 면에서 우리가 뒤떨어졌다. 그동안 우리가 해왔던 게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실감케 했다. 그런 점들로 인해 후배들의 사기가 저하됐던 것 같다.”
―김주성이란 선수가 농구를 잘하는 선수라고 보나.
“단 한 번도 내가 농구를 잘한다고 생각해보지 않았다. 운 좋게 소속팀과 궁합이 잘 맞았고, 감독님들의 배려 덕분에 출전 시간, 훈련량 등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다른 선수들보다 농구를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항상 부족한 게 많다고 생각했다. 농구는 타고나야하는 부분이 많다. 노력을 해서 따라갈 수 있는 것과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갈 수 없는 게 있다. 농구월드컵에 나가면 미국, 유럽 선수들과의 신장, 체격 차이를 실감하게 된다. 거기서 파생되는 고급 기술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크다. 아마 이 부분이 한국에서 NBA에 진출하는 선수가 지금까지 한 명도 배출되지 않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동안 종종 대표팀 은퇴가 거론된 적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어쩔 수 없는 이유들로 인해 은퇴하지 못하고 다시 복귀한 적이 대부분이었다. 16년 동안 태극마크를 달고 뛴 배경에는 무엇이 존재하는 건가.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애국심 때문이다. 이것은 태극마크를 달아본 선수들만 알 수 있는 감정이다. 이 애국심이 지금까지 나를 대표팀으로 이끌었다. 부상과 체력 난조로 더 이상 뛰기 힘들다고 생각했지만, 태극마크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에 다시 시작하곤 했다. 아시안게임 결승전에서 맞붙은 이란은 NBA 출신의 하메디 하다디와 신체조건과 실력면에서 NBA급인 니카 바라미 때문에 힘든 경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기장을 찾은 팬들의 열광적인 응원과 함성 덕분에 힘을 냈고 어려운 승리를 거뒀다. 이것이 바로 태극마크의 힘이다. 중요한 순간에 선수들은 물론 팬들도 함께 미치는 경험을 한다.”
인천아시안게임 농구 결승전에서 이란을 꺾고 금메달을 딴 대표팀 주장 김주성이 태극기를 들고 환호하고 있다. 사진제공=KBL
―대표팀의 마무리를 극적인 승리와 함께 했다.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목표를 제일 높은 단상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꿈이 이뤄진 셈이다.
“정말 행복했다. 그리고 고맙고 감사했다. 어느 누가 나와 같은 마무리를 할 수 있겠나. 난 참으로 운이 좋은 사람이다. 경기 후 유재학 감독님, (문)태종이 형과 함께 헹가래를 받았다. 모두 세 차례 하늘로 치솟았다. 그때마다 대표팀과 관련된 희로애락을 하나씩 털어냈다. 다시 땅을 딛고 섰을 때는, 아쉬움도 후회도 남지 않게끔 모든 걸 털어내고 싶었다.”
―2002년 프로에 첫 발을 내디뎠을 당시에 플레잉코치를 맡고 있던 허재 감독과 함께 코트를 누볐고, 챔피언결정전에서 우승까지 거머쥐었다. 올 시즌에는 그의 아들인 허웅과 함께 경기를 한다. 이런 경험은 결코 쉽지 않은 일 아닌가.
“지금도 2002년을 떠올리면 기분 좋은 설렘이 전해진다. 농구의 전설, 영웅, 대통령이었던 분과 함께 운동하고 밥 먹고 시합에 나가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처음에는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서 ‘선배님’이라고 했더니, 허재 감독이 ‘야, 앞으로 형이라고 불러’라고 해주셔서 지금까지 ‘허재 형’으로 부른다. 코트에선 카리스마 ‘짱’인 분이지만, 코트 밖에선 가슴이 따뜻하고 넉넉한 진짜 형이었다. 그런 분의 아들이 이번에는 내 후배가 돼 한 팀에서 뛰고 있다. 이 얼마나 흥미로운 일인가. 허재 형과 그러했듯이 웅이하고도 원주 동부의 영광을 재현하는 데 일조하고 싶다. 웅이에게 도움이 되는 선배가 되고 싶다.”
인천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고 딸과 함께 기뻐하고 있다.
“한번쯤은 이런 고비가 올 줄 알았다. 그리고 그런 고통을 통해 팀이 성장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경험할 당시에는 바닥을 모르고 가라앉는 팀 상황이 정말 안타까웠다. 더욱이 지난 시즌에는 부상으로 경기에 나가지 못하는 시간들이 많아지면서 선수들 볼 면목이 없었다. 앞으론 더 이상 그런 아픔은 겪지도, 겪을 일도 없다. 김영만 감독이 선수단을 잘 추슬렀고, 원주 동부만의 끈끈한 색깔을 되찾게끔 도와주셨다. 선수들은 코트에서 실력으로 보이는 일만 남았다.”
―유재학 감독이 대표팀과 관련해서 인터뷰를 하던 중 ‘김주성은 몸을 사린다’라는 내용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 선수 입장에선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궁금하다.
“부상을 피하기 위한 나름의 몸 관리를 몸 사린다고 보신 듯하다. 나이가 있다 보니 젊은 선수들처럼 전투적으로 싸울 수 없었다. 부상 재발 방지 차원에서 조심스럽게 플레이한 것을 두고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다. 난 크게 개의치 않았는데, 주위에서 더 신경을 쓰신 모양이다. 난 감독님이 김종규, 이종현처럼 뛰기를 나에게 바라진 않으셨을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까지 원주 동부는 김주성의 팀이었다. 그러나 김주성은 올해부터는 윤호영의 팀이라고 단정 짓는다. 자신은 풀타임 출전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윤호영이 팀을 이끌어 가야 한다고 설명한다. 2012년 원주 동부와 보수 6억 원에 5년간 FA 재계약을 체결했던 김주성. 앞으로 3년이 더 남았다. 김주성은 꾸준한 몸 관리를 통해 부상 없이 시즌을 치르는 게 우선 목표라고 밝혔다.
원주=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