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틸리케 감독이 이끄는 축구 대표팀이 지난 10일과 14일 두 차례 치른 평가전에서 ‘벤치멤버’로 불렸던 조영철, 남태희, 김민우가 기용돼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슈틸리케호’에 발탁된 23명의 대표팀 선수들 중 파라과이(10일), 코스타리카(14일) 2연전에 모두 선발로 나선 선수는 3명뿐이다. 대표팀의 영원한 ‘쌍용’ 이청용·기성용과 ‘카타르의 남자’ 남태희(23·레퀴야)였다.
처진 스트라이커를 맡은 남태희는 ‘슈틸리케호의 황태자’라고 불릴 정도로 두 차례의 평가전에서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쳤다. 파라과이전에선 국가대표 데뷔 골을 터뜨렸고, 코스타리카와의 경기에선 손흥민과 절묘한 호흡을 나타내며 이동국의 첫 골을 이끌어냈다. 간결한 드리블과 속도를 죽이지 않는 예리한 패스가 빠른 템포를 지향하는 슈틸리케 감독의 스타일에 부합했다는 평가다.
특히 남태희는 슈틸리케 감독과 남다른 인연을 갖고 있다. 2011년 12월 카타르 레퀴야에 입단한 남태희는 94경기 출전, 32골을 터트리며 ‘카타르 리그의 메시’란 별명을 얻게 됐다. 그런 상황에서 당시 슈틸리케 감독이 이끄는 카타르의 알 아라비 팀을 상대로 두 골을 성공시키며 깊은 인상을 남겼던 남태희. 카타르의 주거지도 슈틸리케 감독의 집과 가까운 데 위치해 있어 산책 중에 슈틸리케 감독의 아내를 만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 감독을 한국 대표팀에서 다시 만난 걸 보면 인연도 보통 인연이 아니다.
남태희는 카타르에서 맹활약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2014브라질월드컵대표팀을 이끄는 홍명보 감독으로부터 끝내 외면당한 바 있다. 축구 인생 최대의 시련이었고 마음을 다잡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축구를 통해 치유의 방법을 깨우친 남태희는 슈틸리케 감독을 만나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고 있다. 남태희는 18세에 프랑스 발랑시엔에 입단, 국내 최연소의 나이에 유럽 리그 1군 무대를 노크했다. 그러나 프랑스리그의 높은 벽에 막혀 좌절감을 곱씹었고, 당시엔 자신에게 볼이 오는 게 무서웠을 정도라고 말한다. 벌써부터 ‘슈틸리케호의 황태자’라는 타이틀이 따라 다니지만 정작 그는 “아직은 아니다. 노력을 통해 진짜 황태자가 되도록 노력하겠다”며 자세를 낮춘다.
남태희의 진주 봉래초 2년 선배인 김민우는 지난 10일 파라과이전에서 나온 자신의 A매치 데뷔골이자, 슈틸리케 감독 데뷔전의 첫 골을 잊을 수가 없다. 지난해 동아시안컵을 통해 성인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김민우는 7경기 만에 A매치 첫 골을 신고했다. 경기 최우수선수(MOM)으로 선정되는 겹경사도 누렸다.
김민우(24·사간 도스)는 남태희와 함께 한때 ‘홍명보의 아이들’에 속한 선수였다. 그러나 그 또한 브라질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탈락하며 가슴 시린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2009년 FIFA U-20 월드컵에서 국가대표에 이름을 올려 독일전에서 동점골을 넣는 등 8강에 오르는데 일조했던 김민우. 거칠 것 없이 승승장구하던 김민우의 발목을 잡은 건 2009년 11월 연세대 재학 중 PSV 에인트호번과 접촉해 입단테스트를 받은 사실이 알려진 이후다. 당시 연세대와 상의 없이 해외 진출을 도모한 데 대한 학칙 위반으로 대학에서 퇴출되는 아픔을 겪은 것. 결국 에인트호번이 아닌 일본 J리그의 사간 도스에 입단했고, 지금은 사퇴했지만 사간 도스를 이끈 윤정환 감독 밑에서 좋은 성장세를 나타냈다.
월드컵의 아픔을 딛고 ‘슈틸리케호 1기’에 이름을 올린 김민우는 이청용 기성용 등이 건재한 미드필드 지역에서 자신의 자리를 잡기가 어려웠지만 멀티플레이어답게 슈틸리케 감독이 요구하는 포지션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확실한 눈도장을 찍었다.
파라과이전에서 남태희, 김민우를 뒤에 두고 ‘원톱’으로 나선 조영철(25·카타르 SC). 기존 대표팀의 주축 공격수였던 손흥민(22·레버쿠젠)과 이동국(35·전북) 등을 벤치에 앉히고 주전으로 뛰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동안 조영철은 대표팀에서 주로 측면 윙포워드로 출전했다. 중앙 공격수를 맡기기에는 못 미더웠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슈틸리케 감독은 파라과이전에 조영철을 중앙 공격수에 세웠다. 비록 이날 경기에서 골을 터트리진 못했지만 상대 수비를 교란하며 2선 공격수들이 침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냈다. 골 결정력만 보완된다면 이동국의 훌륭한 경쟁자가 될 수 있다는 게 축구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조영철은 파라과이전 선발 출전 통보를 받을 당시,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었다고 말한다. “다른 데도 아닌 최전방 공격수 자리를 맡게 돼 부담이 엄청났지만, 슈틸리케 감독이 경기 전 미팅에서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월드컵 및 2012 유럽축구선수권대회의 스페인을 이미지 트레이닝 하라고 조언해주셨던 부분이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카타르에서 활약 중인 남태희와 함께 ‘슈틸리케호’의 히든카드로 떠오르고 있는 데 대해 조영철은 “카타르에서 태희와 함께 대표팀에 합류하면서 열심히 해보자고 약속했는데 슈틸리케 감독님의 데뷔전에 모두 선발 출전하게 돼 영광이었다”라고 밝혔다.
남태희 김민우 조영철 등이 슈틸리케 감독의 관심을 끌며 대표팀에서 종횡무진하는 바람에 이번에 슈틸리케 감독의 부름을 받지 못한 김보경(카디프시티)과 지동원(도르트문트), 윤석영(퀸스파크레인저스)은 향후 입지에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게 됐다. 지동원은 부상에서 회복해 복귀를 준비하고 있지만, 김보경과 윤석영 등은 주전 경쟁에서 탈락하며 그라운드를 밟지 못하고 있다. 소속팀의 경기력을 중요시하는 슈틸리케 감독의 성향상 이 3명은 다음 달 예정된 중동 원정 합류 여부가 불투명하다. 홍명보 감독 체제에서 월드컵 무대까지 밟았던 이들의 대표팀 내 입지가 4개월 만에 완전히 뒤바뀐 셈이다.
슈틸리케 감독은 내년 1월 호주 아시안컵을 앞두고 끊임없이 실험을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새로운 얼굴이 대거 들어올 수도 있지만, 시간이 많이 남지 않은 만큼 ‘슈틸리케호 1기’ 멤버들인 남태희, 김민우, 조영철은 중용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전 대표팀에서 시련과 아픔이 많았던 만큼 ‘슈틸리케호’에서는 치열한 주전 경쟁을 통해 ‘이름값’ 보다는 ‘경기력’으로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길 기대해본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
슈틸리케는 어떤 스타일? 꼼꼼하고 따뜻한 ‘독일인 할아버지’ 축구대표팀의 역대 7번째 외국인 사령탑 슈틸리케 감독은 어떤 스타일일까. 선수들이 공통적으로 얘기하는 슈틸리케 감독은 ‘꼼꼼하고 따뜻한 남자’였다. 슈틸리케 감독은 선발 멤버를 빨리 정했다. 이전 대표팀 감독들은 경기 당일 아침에 선수들에게 선발 명단을 공개했던 데 반해 슈틸리케 감독은 경기 전날 마지막 훈련 직후에 선발 선수들을 호명했다. 이유는 선수들에게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나선 일부 선수들과 미팅을 했고 이미지트레이닝까지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슈틸리케 감독은 선수들 사이에서 ‘독일인 할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따뜻한 면면도 내보인다. 태극전사들이 그라운드로 입장할 때는 벤치로 향하지 않고 선수들과 일일이 하이파이브를 하고 어깨를 두드려주며 격려했다. 애국가가 연주될 때는 코칭스태프와 일렬로 서서 어깨동무를 한 채 흔들리지 않는 팀워크를 나타냈다. 경기 중에는 단 한 번도 벤치에 앉아 있지 않았다. 동작이 크지 않았지만 종종 박수를 치고 엄지를 치켜세우며 선수들을 격려했다. 레알 마드리드와 독일 대표팀 등에서 중앙수비수나 수비형 미드필더로 뛴 슈틸리케 감독은 선수 시절 매우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몸놀림을 자랑했다고 알려졌다. 이청용도 기자에게 “감독님이 선수 때 뛰신 동영상을 보면 우리가 어떤 축구를 해야 하는지 알 수 있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슈틸리케 감독은 코스타리카전이 끝난 후 기자회견에서 경기 소감을 묻는 질문에 “A매치 경기를 보러 온 관중들이 예상보다 적어 안타까웠다”는 말을 할 정도로 팬들과 어울리는 축구문화를 추구한다. 그래서 축구협회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A매치를 앞두고 지난 12일 축구대표팀 트레이닝센터인 파주NFC에서 ‘KFAN과 함께하는 오픈 트레이닝 데이’를 열고 일반 팬들에게 대표팀 훈련을 공개한 바 있다. A매치가 끝나고 틈만 나면 인천공항으로 향한 이전 외국인 감독과 달리 슈틸리케 감독은 한국에 남아 K리그를 돌며 선수들을 파악하러 다닌다고 밝혔다. 아직은 언론과도 ‘허니문’ 기간이라 특별히 그에게 트집을 잡는 여론은 없지만, 지금까지 슈틸리케 감독이 선수들과 한국축구에 전한 메시지는 분명했다. 그건 바로 ‘승리’와 ‘팬’이었다.[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