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교의 환풍구 사고로 이제 환풍구는 16명의 목숨을 삼킨 죽음의 입구가 됐다. 평소 무심코 지나던 지하철 역 근처의 환풍구 속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아뿔싸, 이번 사건이 난 판교 환풍구처럼 밑바닥이 아스라한 낭떠러지가 아닌가. 올라선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 사고 전까지만 해도 환풍구 위에 사람이 30명 넘게 올라가는 상황은 전혀 상상이 안 됐다. 그래서이겠지만 어느 환풍구에도 ‘올라가지 마시오’라는 안내문이 있는 곳은 못 봤고, 더러 ‘담배꽁초를 버리지 마시오’라고 쓰인 스티커만 눈에 띌 뿐이었다.
‘위험 표지가 없었다’, ‘안전 관리자가 없었다’는 언론 보도는 여느 안전사고 때마다 해온 타성 보도의 전형이라 할 것이다. 환풍구는 애초부터 담배꽁초를 버리지 않는 공공질서의 대상이었을 뿐 붕괴사고의 위험이 있는 곳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환풍구는 이처럼 안전의 사각지대에서 방치돼 왔다. 설치기준만 있지 안전기준이 없고, 전국에 몇 개의 환풍구가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화장실이 몇 개인지 파악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행정당국의 안이한 인식들이 그 증거다.
서울시가 6000여 곳의 환풍구에 대한 안전진단에 나선다고 한다.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올라갈 개연성이 희박하달 뿐이지 10명만 올라서도 무너질 위험성이 큰 환풍구들이 전국에 널려 있다고 봐야 한다. 안전점검이 서울시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실시돼야 할 이유다.
앞으로 여러 가지 개선책들이 나올 것이다. 새로 설치되는 환풍구의 안전기준도 마련해야 하고, 사고 위험성이 있는 곳은 보강 공사를 해야 한다. 사람이 올라가지 못하도록 위치를 높이거나, 울타리를 쳐서 접근을 차단하는 쉬운 방안들이 논의되고 있다. 지하철 환풍구처럼 도로변에 설치돼 있는 환풍구의 경우 그런 방법으로는 사람의 통행에 지장을 초래할 것이므로 안전기준을 강화해 평지 상태를 유지하는 방법이 적절할 것이다.
환풍구 사고는 우리 사회에 두 가지 교훈을 줬다. 첫째는 환풍구 아래가 낭떠러지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사고가 터져야 위험이 파악되는 안전 불감증이란 고질에는 약도 교훈도 없다.
둘째는 사고 책임 측과 유족들 간의 피해보상협상이 국가책임론 공방이 없이 사고 나흘 만에 조기 타결된 점이다. 환풍구 사고는 세월호 사고와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피해자의 책임도 인정된다는 점은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차이다.
그래도 정황상 국가책임론을 들고 나올 소지가 상당했으나 유족들의 절제가 돋보였다. 6개월이 넘도록 타협점을 찾지 못하는 세월호 사고에다 이번 사고마저 국가책임론에 휘말렸다면 대한민국은 얼마나 더 피곤해졌을까. 세월호는 앞으로 있을 모든 사건사고 처리에서 반면교사가 돼야 한다.
임종건 언론인·전 서울경제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