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원내대표뿐 아니라 문화부 장관과 청와대 대변인, 홍보수석, 비서실장 등 당·정·청에 걸쳐 요직을 지낸 박지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지난 10월 22일 SBS 라디오에 출연해 이렇게 일갈했다. 이른바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개헌론 언급을 이유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를 향해 날선 비판을 쏟아낸 것을 겨냥한 발언이었다. 박 의원은 방송에서 이 고위 관계자가 청와대 윤두현 홍보수석이라고 공개했다.
박지원 의원이 자기 당과는 무관한 일로 ‘모멸감’ 운운하며 열을 낸 이유는 집권여당 대표에 대한 청와대 홍보수석의 비판이 그만큼 이례적이고, 어찌 보면 충격적인 일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는 윤 수석의 입을 통해 나왔지만 김 대표를 향한 비판은 박근혜 대통령, 최소한 김기춘 비서실장의 뜻일 거라는 추론으로 이어진다. 박 의원은 자신의 경험을 거론하며 “(윤 수석의 말에) 당연히 대통령의 의중이 실려 있다”고 말했다. 윗선의 지시나 재가 없이 일개 수석이 여당 대표를 작심하고 비판할 수는 없다는 까닭에서다.
지난 21일 윤 수석의 기자간담회 자리에 있었던 인사들이 전하는 말에서도 이런 분위기가 느껴진다. 우선 윤 수석의 이날 간담회는 전혀 예정돼 있던 게 아니었다고 한다. 한 청와대 출입기자는 “오후 2시가 조금 지났을 때 윤 수석이 불쑥 기자실에 찾아와 자연스럽게 간담회가 시작됐다”며 “생중계나 녹화가 되는 ‘온 마이크(On Mike) 브리핑’은 아니었지만, 윤 수석이 그런 식으로라도 기자간담회를 자청한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고 전했다.
윤두현 홍보수석.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박지원 의원이나 간담회 자리에 있었던 기자들이나 청와대가 평소와는 다른 행태를 보였다는 데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불통 청와대’라는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부 입단속에 열중했던 지금까지의 모습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얘기다. 그 이유가 뭔지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우선 김무성 대표에 대한 청와대의 불만과 불쾌감이 누적돼오다가 터져 버렸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김 대표가 개헌론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과 공무원연금 개혁안 처리시기를 놓고 미적거리는 것은 서로 연결돼 있다고 봐야 한다. 마치 자신이 대통령과 맞서면서 무슨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자기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이라며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경제살리기 정책을 밀어붙일 때 딴죽을 걸고, 다른 장관이나 부처 관계자들을 공개적으로 면박을 주는 등 김 대표가 이해 안 되는 행태를 보인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철저히 대권주자의 행보를 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청와대의 이례적인 반응을 단지 김 대표에 대한 화풀이나 기선잡기 시도로 봐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있다. 청와대와 정부의 국정기조나 정책에 대해 김 대표와 새누리당 비박계가 잇따라 태클을 거는 게 주요 국정과제 이행에 실질적인 걸림돌과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논리다. 주로 청와대 내부 인사들이 이런 주장을 펴고 있다.
다른 청와대 인사는 “정책 추진, 특히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이밍인데 다분히 정치적인 계산으로 딴죽을 걸면 결과적으로 정부가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다”며 “언론에는 윤두현 수석이 김무성 대표의 개헌론을 비판한 게 주로 부각됐지만, 간담회 발언 내용을 전체적으로 보면 공무원연금 개혁이 지연돼선 안 된다는 게 핵심이었다. 이런 딴죽걸기를 방치할 경우 아무런 개혁도 못하고 성과도 낼 수 없기 때문에 좀 이례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실제로 조급증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만큼 평소답지 않은 최근 청와대의 ‘무리수’는 이번만이 아니다. 한-호주, 한-캐나다 자유무역협정(FTA)을 대하는 청와대의 태도 역시 ‘호떡집에 불난 듯한’ 모양새다. 청와대는 박근혜 대통령이 이탈리아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다음날인 지난 19일 두 FTA의 조속한 국회 비준을 촉구하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이날은 일요일이었던 데다 주철기 외교안보수석과 안종범 경제수석이 박 대통령의 순방 성과를 정리한 보도자료를 들고 와 홍보에 열을 올린 날이다. 이전까지 청와대가 이들 FTA 비준안 처리와 관련해 별다른 움직임을 보인 적이 없었던 터라 일부 기자들은 청와대 측에 “왜 일요일에 이렇게 보도자료를 쏟아내느냐”고 문의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24일 급하게 잡힌 당정회의에서는 결국 탈이 났다. 이완구 원내대표를 비롯한 새누리당 원내 지도부가 뒤늦게 비준을 재촉하는 정부에 노골적인 불만을 표출했다. 김재원 원내수석부대표는 “FTA가 굉장히 급하다고 얘기를 하시는데 두 비준동의안이 국회에 와 있는 것을 당 대표와 원내대표는 지난주에 처음 알았다”며 “꿈쩍도 않다가 갑자기 달려와서 급하다고 하면 정말 차마 얘기 못하겠지만, 이렇게 하셔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주호영 정책위의장은 “이명(耳鳴)은 자기 혼자 알고 남은 모르는 건데 정부가 이명증이 있는 것 같다”고 호통을 쳤다.
북한 민주화 운동을 벌이고 있는 민간단체들의 대북전단(삐라) 살포 계획에 대해 경찰이 갑작스럽게 봉쇄 방침을 밝힌 것이나, 국방부가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대북 선전전의 수단으로 활용돼 온 김포 애기봉 등탑을 안전상의 이유로 철거한 것 역시 청와대의 조급증을 반영한 결과로 해석되고 있다. 이들은 북한이 알레르기 반응을 보여 온 대상이다. 경찰과 군 모두 청와대의 지시나 재가 없이 이런 민감한 일을 벌였을 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한 대북 민간단체 관계자는 “애기봉 등탑은 안전진단 결과 B등급을 받았는데, 통상 E등급을 받아야 철거 대상이지 B등급은 보수 대상일 뿐”이라며 “지방자치단체도 아니고 군이 서둘러 등탑을 철거한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남북 대화를 위해 청와대가 기존의 페이스를 잃었다는 지적이었다.
서두르면 탈난다는 말이 있듯, 최근 청와대의 속도전에 대해서도 여기저기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무엇보다도 청와대의 독주가 심화되면서 청와대와 국회, 청와대와 여당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새누리당의 한 당직자는 “당장은 김무성 대표가 청와대의 뜻을 수용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지만, 청와대가 김 대표에게 준 수모는 결국 부메랑처럼 청와대로 향할 수 있다”며 “당청관계 악화, 당내 친박계와 비박계의 갈등 심화는 결국 대통령의 통치력 약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피라미 급밖에 안 되는 홍보수석이 집권여당 대표에게 건방을 떨었다”는 김 대표 측근 의원의 토로는 이런 우려가 전혀 기우가 아님을 시사하고 있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