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 연말 교체설이 나돌며 청와대 내부 권력 구도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김 비서실장이 10월 28일 국회 운영위에서 열린 국정감사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왼쪽은 ‘왕비서관’으로 통하는 이재만 총무비서관(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구윤성 기자 kysplanet@ilyo.co.kr
박근혜 대통령의 이탈리아 순방 기간(10월 14~17일) 국내 정가에선 김기춘 실장이 사의를 표명했다는 말이 빠르게 퍼졌다. 김 실장 뒤를 현직 장관 또는 원로급 인사가 이을 것이란 구체적 하마평까지 덧붙여진 내용이었다. 그보다 앞선 10월 초에도 한 언론이 김 실장 교체 가능성을 제기한 바 있다. 당시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논평할 가치를 못 느낀다”고 반박했지만 보름도 채 안 돼 또 다시 김 실장 거취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더군다나 박 대통령이 순방 차 해외에 머물고 있던 때에 말이다.
사실 김 실장 교체설은 정치권의 ‘단골 메뉴’ 중 하나다. 지난해 8월 임명 후 언론 보도와 증권가 정보지 등을 합치면 다섯 차례 이상 제기됐다. 대부분 여권 고위 관계자 말을 인용해서였다. 그때마다 청와대는 일축했고, 실제로 교체는 이뤄지지 않았다. 권대우 정치평론가는 “실체가 없는 내용이 이처럼 자주 나온다는 건 여권 내에서 김 실장 교체를 원하는 세력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얘기”라고 설명했다. 특정 세력이 김 실장을 흔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퇴진 가능성을 흘렸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에 불거진 김 실장 교체설 역시 겉으로는 예전 양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일단 김 실장은 반응을 내놓지 않고 있고 청와대 관계자들 역시 “사실이 아니다”라며 입을 모은다. 김 실장은 10월 29일 박근혜 대통령 국회 시정연설에 동행, 시종일관 박 대통령을 보좌했다. 박 대통령과 여야 지도부 회동에도 배석해 대화 내용을 꼼꼼히 메모하는 등 건재를 과시했다. 권대우 정치평론가는 “여의도에서 자꾸 자신에 대한 억측이 새어나오자 이를 반박이라도 하듯 김 실장은 국회 한복판에서 박 대통령 곁을 지켰다. 비서실장으로서 당연한 것이었겠지만 퇴진 소문이 돌고 있던 시기인지라 남다르게 보였다”고 귀띔했다.
그러나 여권 핵심부 주변에선 연말 내에 청와대 비서실장 자리가 바뀔 것이란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 인사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 실장의 지난 1년여 동안 인사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대선 캠프에 관여했던 박 대통령 측 한 원로는 “그동안 인사를 놓고 잡음이 불거질 때마다 박 대통령은 김 실장에게 힘을 실어줬다. 그런데 최근 내부 기류는 다르다고 한다. 박 대통령도 김 실장이 주도하고 있는 인사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했다더라. 교체설 역시 여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했다.
‘밀봉인사’, ‘수첩인사’ 등으로 불리는 박근혜 정부 인사는 집권 초부터 ‘참사’로 불리며 끊임없이 말썽을 일으켰다. 이는 박 대통령 임기 중반으로 접어든 지금도 마찬가지다. 자니윤 한국관광공사 상임감사, 박완수 인천공항 사장, 김성주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 낙하산 논란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그런데 최근 불거진 인사 논란엔 눈여겨볼 부분이 있다. 바로 권력다툼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기무사령관 퇴진, 국정원 고위직 인사, KB금융지주 회장 선출 등이 대표적 사례다. 앞서의 원로는 “여권 실세 간 파워게임이 벌어졌다는 주장이 확산되고 있다. 박 대통령 입장에선 용인할 수 없는 상황이다. 자연스레 인사를 주도한 김 실장에 대한 회의론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전했다.
이를 두고 정치권 일각에선 그동안 숨죽였던 김 실장 비토세력이 반격에 나섰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김 실장은 청와대 입성 후 박 대통령을 대신해 인사 전권을 행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 실장은 10월 28일 진행된 청와대 국정감사에서 “비선 인사는 없었다”고 밝혔는데, 이를 접한 친박 의원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숨을 내쉬었다.
박근혜 정부 인사는 정권 초기부터 끊임없이 말썽을 일으켰다. 최근 ‘낙하산 인사’ 논란을 겪고 있는 자니윤 한국관광공사 상임감사, 박완수 인천공항 사장, 김성주 대한적십자사 총재. 일요신문 DB
새누리당 친박계 초선 의원은 “김 실장이 권한을 틀어쥐고 있으니 인사에 관여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었다. 언론에서 비선 운운하는데 김 실장은 공식 라인이다. 김 실장 등장 후 비선 인사는 없었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면서도 “여기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여권 실세들이 제법 있는 것으로 안다. 그들은 김 실장이 물러나기를 누구보다 바라고 있을 것”이라고 털어놨다.
국면 전환 차원에서도 김 실장 퇴진은 박 대통령에게 이득이 될 것이란 주장이 여권 내에서 고개를 들고 있다. 공무원 퇴직연금 개혁, 민생법안 처리 등 굵직굵직한 현안을 앞두고 박 대통령이 김 실장 교체 카드를 적절히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윤호석 정치평론가는 “김 실장이 박 대통령 집권 초석을 닦는 데 큰 공을 세운 건 맞다. 그러나 집권 중반을 맞은 박 대통령이 김 실장을 안고 가기엔 다소 부담스러운 측면이 있다”면서 “김 실장은 야권은 물론이고 여권 내에서조차 부정적 여론이 많지 않느냐. 국회가 발목을 잡으면 풀기가 상당히 어려워질 수 있다”고 점쳤다.
당장에 물러나지 않더라도 김 실장에게로 집중돼 있는 힘이 어느 정도 분산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여권 관계자들의 중론이다. 또 그동안 김 실장이 독점하던 인사의 일부가 비선라인으로 옮겨갈 수 있다는 말도 나온다. 박 대통령 참모 3인방에게로 시선이 쏠리는 배경이다. 박 대통령에 대한 로열티(충성도), 청와대 내에서의 위상 등을 감안했을 때 이들 외엔 ‘김기춘 대체재’가 없는 까닭에서다.
특히 ‘왕비서관’으로 통하는 이재만 총무비서관 역할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관측이 많다. 이 비서관은 김 실장이 주관하는 인사위원회 고정 멤버다. 청와대 ‘집사’인 총무비서관이 인사를 위한 회의에 참여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그만큼 이 비서관에 대한 박 대통령 신뢰가 두텁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비서관은 박 대통령 인적 베이스를 작성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른바 ‘박근혜 수첩’ 초안을 만든 인물이다. 박 대통령이 국회의원과 대통령 후보 시절 만나고 싶어 하는 인사들과의 연락을 맡은 것도 이 비서관이었다. 인사에 있어서만큼은 그 누구보다 박 대통령 의중을 꿰뚫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향후 박 대통령이 김 실장 이외의 인사 루트를 찾는다면 바로 이 비서관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일부 여권 관계자들은 이 과정에서 김 실장과 3인방이 불협화음을 낼 수도 있다고 우려하기도 한다. 일각에선 김 실장 교체설 배후로 3인방을 지목하기까지 한다. 김 실장 부임 후 입지가 줄어든 3인방이 ‘작업’을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친박계의 한 중진 의원은 “김 실장과 3인방이 다툰다는 것은 소설 같은 얘기일 뿐이다. 3인방이 오래 갈 수 있는 이유는 철저하게 몸을 낮추고 대통령 보좌에 전념하기 때문이다. 3인방이 김 실장과 대립각을 세우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