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성명서 발표 하루 전, 선수단 대표들이 구단 사장을 만나 B 코치의 차기 감독 선임을 결사반대했다는 내용이 언론을 통해 알려진 참이었다. B 코치는 A 운영부장, 그리고 롯데의 C 단장과 소위 ‘같은 라인을 탄’ 인물이라는 이유였다. 일부 선수들은 그날 오후 “사장님을 만난 건 사실이지만, B 코치의 이름을 직접 거론한 적 없다”고 부인했다. 그러나 하루도 지나지 않아 “A 씨가 그렇게 얘기하라고 선수들을 압박했다”며 입장을 다시 바꿨다. 롯데 구단은 곪을 대로 곪은 내홍이 끊임없이 외부로 불거지자 결국 공식 사과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프로야구 33년 역사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항명’ 사태였다.
#롯데 선수단의 ‘역대급 항명’ 숨은 진실
롯데 선수단은 올해에만 벌써 두 번째 단체행동을 했다. 작은 사진은 김시진 전 감독과 코치진. 사진제공=롯데 자이언츠
물론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다. 롯데 선수단의 단체 행동은 올해에만 벌써 두 번째였다. 지난 5월, 롯데의 D 수석코치가 2군으로 내려갔을 때 이미 프런트와의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롯데는 당시 “최근의 성적 부진에 대해 감독 대신 수석코치가 책임을 진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곧 다른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선수단 대표가 신동인 구단주 대행에게 “수석코치를 교체해 달라”는 뜻을 모아 전달했다는 것이다. 이 소문이 사실로 드러나자, 다시 누군가는 “D 코치가 선수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훈련을 요구해 선수단이 반발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일부 사실이기도 했다. 선수들은 입을 모아 “D 코치의 지도 방식이 너무 독선적이었다”고 주장했다. 선수단 미팅은 무조건 ‘잘못 지적 후 벌금 부과’의 순으로 이어졌고, 자존심을 긁는 언사도 서슴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 주전 선수의 배를 배트로 찌르면서 심하게 질책하다가 말다툼이 벌어졌다는 일화도 나왔다.
그러나 몇몇 선수들은 “지도 방식은 선수들이 참아야 할 부분이다. 사실 진짜 폭발한 지점은 따로 있다”고 했다. D 코치가 ‘프로’인 롯데 선수들의 사생활을 지나치게 통제했다는 주장이다. “원정에 가면 호텔 복도에 설치된 CCTV를 일일이 감시하기까지 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한 구단 관계자는 “구단이 D 코치를 현장 한복판에 ‘심어’ 놓고 선수단의 동향을 들으려고 했던 것 같다. 그걸 선수들이 눈치 채 일이 커졌다”고 해석했다. 구단은 이런 가능성을 부인했다.
#내홍이 불러온 항명
게다가 8월 정민태 투수코치가 팀 분위기 쇄신을 위해 2군으로 내려가는 과정에서도 말썽이 빚어졌다. 정 코치를 넥센에서 롯데로 데려온 김시진 감독이 “성적이 부진한 것은 코치가 아닌 내 책임”이라고 사의를 표하자, C 단장이 곧바로 “그렇다면 B 코치에게 감독대행을 맡기겠다”고 대안까지 제시했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선수단 전체가 또 한 번 술렁거렸다. B 코치에게는 바로 이때 ‘프런트 라인’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룹은 김 감독의 사의를 반려했다. 김 감독도 계속 지휘봉을 잡았다. 시즌 최종전까지 기다렸다가 자진 사퇴했다. 그러나 이후 구단이 새 감독 선임을 준비하는 동안 ‘B 코치가 차기 감독으로 유력하다’는 소문이 다시 불거졌다. 한번 낙인이 찍히면 그 이미지를 벗어나기란 무척 어렵다. 선수들이 “A 운영부장과 C 단장의 뜻에 휘둘리는 인사는 안 된다”고 다시 반발한 원인이었다. 사태는 이렇게 번지고 번져 ‘성명서’까지 도달했다. 롯데의 한 선수는 “모두가 쉬쉬했던 일이 하나둘씩 외부에도 알려지면서 갈등을 조용하게 봉합하기조차 어려워졌고, 서로가 ‘당하지’ 않기 위해 나서다 보니 일이 이렇게까지 된 것 같다”고 했다. 롯데 선수 출신인 한 야구 관계자는 “선수들의 입장도 이해하지만, 좀 더 원만하고 현명하게 해결할 만한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프로야구단은 선수단과 프런트가 원활한 교집합을 이뤄야 발전할 수 있는 조직이다. 그 관계의 방향에 따라 팀이 산으로 가기도 하고 바다로 가기도 한다. 롯데에서 한 시즌 동안 벌어진 일련의 사태는 제대로 치료하지 않았던 작은 상처가 얼마나 크게 곪아 터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 OB의 무단이탈 파장도 컸다
윤동균 전 OB베어스 감독.
사실 이전에도 선수들은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단체 행동을 불사하기도 했다. 화살은 주로 프런트가 아닌 감독에게 향했다. 1994년 벌어진 OB 선수들의 무단이탈 사건은 프로야구에서 역대 가장 유명한 단체행동 사례다. 스포츠뉴스가 아닌 오후 9시 메인뉴스에서 첫 번째 소식으로 전했을 만큼 사회적인 파장이 컸다.
그해 9월 4일, 전주에서 열린 쌍방울과의 원정경기를 마친 직후였다. 윤동균 당시 감독은 선수들의 무기력한 플레이를 질책하면서 몇몇 고참 선수들에게 얼차려를 주려고 했다. 박철순, 장호연, 김형석, 김상호 등 내로라하는 프랜차이즈 스타들이 그 대상이었다. 감독이 ‘엎드려뻗쳐’를 시키고 몽둥이를 집어 들자 그동안 불만을 참아오던 선수들이 폭발했다. 윤 감독이 “못 맞겠는 사람은 여기서 나가라”고 소리치자, 주전 선수 17명이 진짜로 나갔다. 아예 구단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한 콘도에 모인 채 감독 퇴진을 요구하며 경기 출전을 거부했다. OB는 2군 선수들로 남은 시즌을 치렀다. 잠실 라이벌인 LG가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동안, 7위로 시즌을 끝냈다.
결국 구단 사장이 먼저 사퇴의사를 밝혔다. 항명 열흘 뒤인 9월 14일에는 윤 감독이 자진해서 물러났다. 대신 항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베테랑 선수 다섯 명이 거액의 벌금을 물었다. 당연히 구단의 ‘요주의 인물’ 리스트에도 올랐다. 후임 사령탑인 김인식 감독이 구단에 일부 선수들의 구제를 부탁하면서 모두가 유니폼을 벗는 최악의 사태는 피했고, 살아남은 선수 가운데 한 명인 김상호는 이듬해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에 오르며 보답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의 주동자들은 다른 팀으로 뿔뿔이 흩어지거나 예상보다 빨리 은퇴했다.
# ‘군기’ 센 해태도 항명은 못 피했다
1996년 해태의 하와이 전지훈련에서도 유명한 사건이 발생했다.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절대 권력’으로 여겨졌던 김응용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있었던 터라 더 놀라웠다. 화근은 깊은 새벽 방마다 걸려온 한 젊은 코치의 전화였다. 선수들의 심야 외출을 단속하라는 지시를 받고, 일일이 선수들의 방으로 전화를 걸어 재실 여부를 체크한 것이다. 선수들은 쌓아왔던 불만을 한꺼번에 터트렸다.
다음날 아침 선수단 집합을 앞두고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당시 유남호 수석코치와 베테랑선수 이순철이 주먹다짐을 벌였다. “무기까지 등장했다”는 소문이 퍼졌을 정도다. 이 일을 계기로 선수들이 조직적인 반기를 들었다. 훈련부터 보이콧했고,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며 구단에 여권 반환을 요구했다. 다 같이 짐을 챙겨 호놀룰루 공항으로 향하기도 했다. 결국 철옹성 같은 김 감독이 직접 나섰다. 선수단이 복귀 조건으로 내세운 ‘자율 훈련’을 수락했다. 해태에서 잔뼈가 굵은 일부 프런트들은 공항에서 눈물까지 쏟으며 선수들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다. 간신히 사태는 무마돼 전지훈련은 무사히 재개됐지만, 이미 해태 선수단의 항명 소식은 먼저 한국에 도착한 후였다.
배영은 스포츠동아 기자 yeb@donga.com
심판도 항명 일보직전 갔었다 “한 배 탈 수 없다” 두 파벌 으르렁 A 심판은 후반기 개막을 하루 앞두고 자신을 따르는 25명의 심판과 함께 서울 신사동의 한 음식점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심판진 파벌 싸움은 모두 현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총장이 심판진 인사에 관여하면서 벌어진 일”이라며 “만약 다음날 경기 전까지 KBO가 우리 편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히지 않을 경우, 이 자리에 참석한 심판 전원이 경기에 출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배경은 이랬다. 프로야구 심판들은 당시 오랫동안 곪아왔던 파벌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공개적으로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중이었다. 시즌 초부터 B 심판위원장의 심판 배정이 편파적이라는 이유로 A 심판을 비롯한 8명의 심판이 집단 반발 움직임을 보였다. KBO는 일단 그들에게 2군 강등과 연봉 삭감이라는 징계를 내렸다. 그러나 징계를 받은 심판들이 경기 보이콧을 고려하기 시작했고, KBO는 ‘3개월 후 다시 원래 자리로 복귀시켜주겠다’는 각서로 일단 사태를 무마했다. 문제의 3개월이 지나고 해당 심판들을 다시 1군으로 올리려고 하자, 이번에는 B 심판위원장 측 심판들이 거세게 항의했다. 서로 “한 배를 탈 수 없다”고 맞섰다. B 위원장은 심지어 사퇴 의사까지 밝혔다. A 심판도 A 심판대로 사태의 주동자로 몰려 곤란한 입장에 놓였다. 결국 인원이 더 많았던 ‘A 심판파’가 단체로 모여 A 심판의 1군 복귀와 KBO 사무총장의 사과를 요구한 것이다. 무기는 최후의 카드인 ‘파업’이었다. 고심하던 KBO는 강경 대응을 선택했다. 신상우 당시 KBO 총재는 경기 당일 오전 “일부 심판들의 지나친 요구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끝내 경기장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아마추어 심판을 투입해 경기를 이어가겠다”고 천명했다. 네 명의 심판이 모두 채워지지 않으면 세 명의 심판에게 경기를 맡기는 파행 운영도 할 수 있다는 의지였다. 또 “A 심판과 B 심판위원장을 모두 정식으로 직위 해제하고, 현장에 복귀하지 않는 심판들도 중징계하겠다”고 밝혀 충격을 안겼다. 결국 A 심판쪽 인사들은 오후에 다시 모여 긴급 대책회의를 했다. 그 결과 “일단 경기에 복귀한 뒤 A 심판의 징계 해제와 요구조건 관철을 위해 끝까지 투쟁하겠다”는 쪽으로 방침을 바꿨다. 그날 저녁, 잠시 위기를 맞았던 2007년 프로야구는 무사히 재개됐다. [은] |
메이저리그 항명은? 김병현 고의4구 사인 받고 ‘1분 시위’ 국적과 피부색을 불문하고 전 세계에서 야구 잘하는 선수들이 모두 모이는 메이저리그. 선수들의 항명으로 인한 말썽이 없었을 리 없다. 워낙 자존심도 강하고 개성도 뚜렷한 스타 선수들의 집합체라 오히려 더 자주 충돌이 일어난다. 항명의 주체도 대부분 개인이다. 한국과 문화가 달라 단체 행동을 하는 일은 거의 없다. 감독과 선수의 관계가 ‘수직’이 아닌 ‘수평’에 가까워서 더 그렇다. 메이저리그 애리조나에서 활약했던 김병현. 연합뉴스 흔치 않은 메이저리거들의 단체 행동을 유발하는 사령탑도 물론 있다. 프랭크 로빈슨 감독은 몬트리올을 지휘하던 시절 독단적인 팀 운영 방식으로 선수들과 종종 마찰을 빚었다. 결국 시즌 도중 선수들이 감독의 지시를 단체로 거부하는 항명 사태를 일으켰다. 게다가 로빈슨 감독은 스스로가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감독이면서도 당시 몬트리올 소속이던 한국인 투수 김선우(LG)에게 편견을 갖고 있었다. 승리 투수 요건에 아웃카운트를 하나 남긴 상황에서 잘 던지던 김선우를 이유 없이 교체한 사건은 유명하다. 그에게 반기를 들었던 선수들만큼이나 한국 팬들에게도 그다지 좋은 기억을 남기지 못한 이름이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