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윤성 기자 kysplanet@ilyo.co.kr
지난 7월 기자가 출장차 제주도를 찾았을 때만 해도 셀카봉은 낯선 물체였다. 나홀로 여행자가 제주의 바다를 등지고 막대기를 쳐들고 온갖 예쁜 척을 하는 모습을 볼 때의 문화충격이란…. 손발이 오글거리다 못해 사라질 것 같은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셀카봉 이용자를 신기하다는 듯 쳐다봤다. 하지만 불과 3~4개월 사이에 셀카봉은 국민 필수품이 되다시피 했다. 놀라운 반전이다.
이렇게 쓸수록 매력적인 도구는 누가 만들었을까. 셀카봉의 원형은 무거운 카메라를 간단히 지지하기 위한 도구인 모노포드다. 셀카봉은 DSLR 대신 휴대폰을 거치할 수 있도록 모노포드를 개조한 것이 시초라는 게 정설이다. 이후 세계적 셀카 열풍에 힘입어 온라인 전자제품 유통업체 ‘코간’이 셀카봉을 개발해 지난해 11월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에게 시제품을 보낸 게 상용화의 최초라는 얘기도 있다. 또 인도네시아의 다이애나 헤마스 사리라는 21세의 여성 사업가가 처음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기원이 어찌됐든 셀카봉을 가장 열성적으로 사용하는 국가는 단연 우리나라다. “해외 여행지에서 셀카봉으로 사진 찍는 사람은 백 퍼센트 한국사람이다”는 우스갯소리도 떠돈다. 우리나라로 여행 온 외국인들이 가장 신기하게 보는 풍경이 셀카봉을 들고 사진을 찍는 모습이라는 조사결과도 있을 정도다. 한국에 체류한 지 6개월이 됐다는 앤서니 캐머런 씨(33)는 “어디에서나 막대기를 펴들고 셀카 찍는 모습이 처음엔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젠 하도 많이 쓰니 익숙해졌다. 친구들과 다같이 모일 땐 나도 한 번 써보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셀카봉 열풍’이 닥친 건 지난 8월 tvN의 예능 <꽃보다 청춘> 페루편이 방영되면서다. 출연진은 페루의 랜드마크를 방문할 때마다 셀카봉에 작은 비디오카메라를 고정해 위로 쳐들고 일행과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며 추억을 담았다. 이렇게 찍힌 영상은 출연진을 중심으로 페루의 환상적 풍경이 360도로 펼쳐지는 멋진 앵글을 보여줬다.
기존 휴대폰 전면 카메라로 셀카를 찍을 때는 많아야 세 명을 담을 수 있었지만 셀카봉은 각도만 잘 잡으면 열 명도 넘게 화면에 담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 혼자 찍어도 남이 찍어준 것처럼 나오고, 풍경과 함께 하는 자신의 모습을 찍을 수 있어 혼자 여행을 다닐 때 안성맞춤이다.
젊은층을 중심으로 인기가 높았지만 최근에는 여행을 즐기는 중장년층에게 ‘잇템’(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아이템)이다. 박 아무개 씨(25)는 “얼마 전에 어머니가 친구들과 등산 가는데 셀카봉을 사달라고 해서 사드렸다. 함께 간 친구들에게 인기만점이었다고 자랑하셨다”고 말했다. 이주연 씨(28) 역시 “여행가는 부모님께 좋은 추억 만들라고 사드렸다. 여행지에서 사진을 찍어 보내주시면서 일행들이 더 좋아한다며 즐거워하셨다”며 “중장년층에게 요즘은 더 인기인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 명동을 찾은 관광객들이 한 노점에서 셀카봉을 구입하고 있다. 구윤성 기자
셀카봉은 호신용으로도 쓰인다. 서지은 씨(25)는 “늦은 밤 집에 가는데 앞에 가는 여자가 셀카봉으로 뒤를 촬영하면서 가더라. 뒤에 누가 따라오는지도 볼 수 있고, 급할 땐 무기로 쓸 수도 있으니 일석이조라고 생각했다”며 신기해했다.
때로는 ‘뒤태 점검용’으로도 유용한 게 셀카봉이다. 한 아무개 씨(26)는 “머리가 눌리거나 망가지지 않았는지 볼 때도 쓴다. 영화를 한참 보고 나오면 헤어스타일이 엉망인지도 모르고 다닐 때가 있는데 가끔 급할 땐 셀카봉으로 뒤통수를 찍어 머리가 괜찮은지 확인한다”고 새로운 이용법도 전했다.
불과 3개월 만에 번진 셀카봉 유행을 즐기는 사람도 있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등장해 ‘민폐봉’으로 전락한다. 지난 10월 부산 불꽃축제를 찾았다는 박은선 씨(26)는 셀카봉 때문에 불쾌한 경험을 했다. “가뜩이나 사람 많아서 힘들어 죽겠는데 바로 앞사람이 셀카봉에 5.7인치 대화면 스마트폰 장착해서 실시간 녹화하면서 시야 가리는 바람에 제대로 구경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콘서트 장에서도 셀카봉은 야광봉보다 더 흔히 구경할 수 있는 물품이 됐다. 하지만 뒷좌석에 앉은 사람들에게 셀카봉은 ‘민폐봉’으로 변한다. 두 시간 넘는 공연시간 내내 녹화하는 열성팬이 앞에 앉는다면 뒤에 앉은 사람은 무대 대신 휴대폰 액정화면만 하염없이 바라봐야 한다.
사람이 많은 곳에선 의도치 않은 초상권침해도 발생한다. 러버덕 열풍이 불었던 지난 10월 말. 석촌호수는 발 디딜 틈이 없었고, 사람들 머리위에는 셀카봉이 빼곡히 들어찼다. 셀카봉으로는 더 넓은 범위를 찍을 수 있기에 뒤에 있는 사람은 배경이 돼버린다. 백 아무개 씨(26)는 “셀카봉으로 사진 찍는 커플들 뒤에 서 있었는데 내 얼굴이 떡하니 잡히더라. 피할 데도 없어서 같이 뒤에서 브이자라도 그려줘야 하나 고민했다. 내가 함께 찍힌 사진이 남의 SNS에 올라올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람이 많은 번화가에서 셀카봉은 ‘길막봉’이 된다. 최대 135㎝까지 늘어나는 셀카봉을 앞으로 뻗어 찍으면 다른 사람들의 통행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 아무개 씨(27)는 “명동에서 여자 둘이 셀카봉을 길게 늘여서 사진 찍는데 지나가다가 순간적으로 당황한 외국인 남성이 욕을 하더라. 홍대 같은 번화가에서도 보도도 좁은데 셀카봉으로 길 막고 있으면 그냥 치고 지나가고 싶다”며 고개를 저었다.
불과 3개월 만에 국민 아이템이 돼 버린 셀카봉. 주변에 민폐봉이 되지는 않는지 한번쯤 되돌아볼 때도 되지 않았을까.
서윤심 기자 heart@ilyo.co.kr
셀카봉 주의보 ‘누군가 내방 침실을 엿보고 있다’ 꺄악~ 제주지방경찰청 페이스북 페이지에 심상치 않은 웹툰이 등장했다. ‘당신은 몰카로부터 안전하십니까’라는 제목의 몰카 범죄에 대한 내용을 담은 그림이었다. 내용은 이랬다. 늦은 밤 술에 취해 귀가한 홀로 사는 여성. 옆집에는 젊은 남성이 혼자 살고 있었다. ‘독신녀’는 잘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지만 이상한 낌새에 창문을 바라봤다. 창문 너머에는 셀카봉에 장착된 스마트폰이 자신의 방을 고스란히 녹화하고 있었다. 놀란 독신녀가 신고해 옆집 남성은 경찰에 잡혔다. 하지만 셀카봉이 ‘몰카봉’으로 쓰일 수 있다는 불안감은 번지고 있다. 박현선 씨(26)는 “길을 가는데 드라마 촬영을 하고 있었다. 휴대폰으로 찍지 말라고 관계자들이 제재를 하고 있기에 셀카봉을 그냥 들고 있는 척하면서 다 녹화했다. 이런 식으로 누가 몰카를 찍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 아무개 씨(28)는 “백화점 화장실을 이용하는데 사진 찍는 소리가 자꾸 들려 신경 쓰였다. 나중에 나와서 보니 옆 칸에서 셀카봉을 든 여자가 나오더라. 혹시 공중화장실에서 몰카용으로 쓰이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며 불안해했다. [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