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구 현대차 회장(왼쪽)이 개별 카드사를 압박하는 것을 두고 사위인 정태영 현대카드 사장(위)과 관련된 해석이 나돌고 있다.
지난 10월 23일 KB국민카드 본사에는 갑자기 현대자동차에서 보낸 공문 한 장이 날아들었다. 현대차는 공문을 통해 “현행 1.85%인 카드 복합할부금융 가맹점 수수료율을 0.7%로 낮추지 않으면 10월 말로 가맹점 계약을 종료하겠다”며 강수를 뒀다. 놀란 국민카드가 협상에 나서 일단 11월 10일까지 협상기한을 연장키로 합의하면서 양측의 갈등은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복합할부금융’이란 소비자가 자동차를 살 때 신용카드로 차량 대금을 결제하면 차값 전액을 할부금융사가 대신 내추고, 고객은 할부금융사에 매달 할부금을 내는 상품이다. 카드사들은 자동차 회사로부터 받은 카드 수수료 중 일부를 고객에게 포인트 적립이나 캐시백 등으로 돌려주고 나머지는 할부금융사와 나눠가지게 된다. 현대차는 이 과정에 카드사가 개입할 필요가 없다며 지난 3월 금융감독원에 관련 상품 폐지를 요청했다. 아예 복합할부금융이라는 시장 자체를 없애려고 한 것.
하지만 경쟁사인 삼성카드와 중소 캐피탈사들이 강력 반발하면서 금감원은 지난 8월 말 이 상품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현대차는 이때부터 개별 카드사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 첫 케이스가 가장 먼저 계약만료일이 다가온 KB국민카드였다.
현대차가 문제 삼는 복합할부금융 수수료는 지난해 기준으로 총 1000억 원 정도다. 현대·기아차의 국내시장 점유율 70%를 감안하면 현대차가 부담하는 금액은 700억 원 수준이다. 이를 현대차의 요구대로 현행 1.85%에서 0.7%로 낮출 경우 절감되는 수수료는 약 430억 원. 결코 작은 돈은 아니지만 매출액 87조 원(2013년 기준)의 글로벌 기업 현대차가 당국과 금융권의 마찰까지 감수하며 덤벼들기에는 명분이 다소 약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현대차는 일방적으로 신용카드 가맹점 계약을 해지할 경우 당국으로부터 제재를 받을 수도 있다. 금융당국은 이미 현대차가 가맹점 해지에 나설 경우 부당행위 조사에 들어가겠다고 엄포를 놓은 상태고, 공정거래위원회 등 관련부처가 추가조치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현대차그룹이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강공 드라이브를 펼치는 것은 현대카드·캐피탈의 상황과 무관치 않다는 것이 금융권의 시각이다. 현대카드와 현대캐피탈 대표이사를 겸하고 있는 인물은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둘째사위 정태영 사장이다.
지난해 말 기준 국내 자동차 복합할부금융 시장 규모는 4조 6000억 원에 달한다. 이 가운데 현대카드는 취급액이 1조 9000억 원으로 가장 많고, 삼성카드가 1조 3000억 원으로 그 뒤를 바짝 쫓고 있다. 카드업계는 앞으로 현대카드의 1위 수성이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해부터 현대카드의 복합할부금융 취급액이 월별 기준으로 무려 90%가량 감소했기 때문이다. 현대카드에서 이탈한 고객들은 삼성카드 등 경쟁사로 옮겨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현대캐피탈도 사정이 좋지 않다. 한때 현대차 판매 물량의 80%를 독점하던 현대캐피탈의 시장점유율은 지난해 말 41.3%까지 주저앉았다. 현대카드·캐피탈은 과거 자동차 할부금융이 활발하지 않았던 시절 ‘캡티브 시장’으로 불리는 현대차 후광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캡티브 시장은 계열사 내부 시장을 일컫는 것으로, 쉽게 말해 소비자가 현대차를 사면 자동으로 현대캐피탈 할부를 택하게 하는 방식이다.
수출시장에서는 지금도 현대캐피탈이 캡티브 시장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자동차 수출 시장에는 삼성카드도, 아주캐피탈도 없기 때문에 현대차를 사는 고객은 자연스럽게 현대캐피탈을 이용하게 된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사정이 크게 달라져있다. 삼성카드를 필두로 카드사들이 자동차 할부금융시장에 뛰어들고 캐피탈사들도 적극적인 시장공략에 나서면서 현대카드·캐피탈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이 때문에 현대카드·캐피탈은 복합할부금융에 대해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대표적인 사례가 올해 여름 벌어진 각 사 고위층 간의 설전이다.
지난 6월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는 삼성카드, JB우리캐피탈, 현대캐피탈, 삼화모터스, YMCA 등 카드·캐피탈·자동차 업계·시민단체가 참여한 ‘복합할부금융상품 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현대캐피탈의 고위 경영진은 “대기업 카드회사가 상도의에 어긋나는 상품을 만들어 현대차가 막대한 수수료로 내고 있다”며 삼성카드를 겨냥해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복합할부금융 상품은 대기업 계열 카드회사가 자동차회사로부터 수수료 이익을 빼앗는 것인 만큼 상품판매금지 가처분소송 등도 불사하겠다”며 으름장을 놨다.
하지만 삼성카드와 캐피탈사들은 ‘소비자 선택권’을 내세우며 맞불을 놨다. 삼성카드 고위 임원은 “자동차 대금 결제 방법은 전적으로 소비자 선택의 문제인 동시에 소비자에게 금리혜택을 줄 수 있다”고 주장했고, 캐피탈사 관계자도 “카드복합결제가 폐지되면 소비자 금리인하 혜택은 사라지고 현대캐피탈의 독과점체제가 계속될 것”이라며 맞섰다.
이렇듯 혼자서 수십 개의 카드·캐피탈사를 상대로 외로운 싸움을 하던 현대카드·캐피탈에게 모기업인 현대차는 천군만마나 다름없는 아군이 될 전망이다. 힘없는(?) 사위기업을 대신해 글로벌 기업 현대차가 나섬으로써 이번 싸움의 판세가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카드업계는 현대차가 KB카드뿐 아니라 향후 다른 카드사들에게도 비슷한 압박을 가할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삼성카드의 경우 현대카드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만큼 압박의 강도가 높을 것으로 보고 있다.
현대카드·캐피탈은 현대차의 이번 행보가 자신들과 무관하다는 입장이다. 회사 관계자는 “자동차 제조사가 떠안고 있는 부당한 비용구조를 시정하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