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LA카운티박물관이 소장한 문정왕후 어보는 높이 6.45cm, 가로와 세로가 각각 10.1cm로 거북이 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금장도장이다. 바닥 인면(도장을 찍는 면)에 문정왕후의 존호인 ‘성열대왕대비지보’(聖烈大王大妃之寶)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1924년 4월 조선왕조 오백년 역사 이래 초유의 사건이 벌어졌다. 종묘에 도둑이 들어 임금의 도장인 어보(御寶)를 훔쳐갔다. <동아일보> 1924년 4월 14일자를 보자. 현재 맞춤법에 맞게 바꿨다.
‘이조 오백년 역대 대왕의 사위(祠位)를 봉안한 종묘에 도적이 들었다. (중략) 예식과장이 종묘에 이르러 문을 열고 살펴보니 과연 덕종(德宗) 예종(睿宗) 양조 신위 앞에 놓여있던 보(寶)가 간 곳이 없다. 본래 ‘보’라 하는 것은 생시에 쓰시던 인장으로 재료는 백철(白鐵) 종류라 그다지 값진 것은 아니다. 고물(故物)이나 또는 역사로는 극히 귀중한 것이다. 분명히 어떤 자가 돈에 욕심이 나서 대담한 짓을 한 것인 듯하다하며 이 놀라운 소식을 들으신 이왕전하께서는 십일 밤을 새우시며 책임 관리와 창덕궁 경찰서장을 시시로 부르시어 ‘보’를 찾았느냐고 초조히 지내시는데(후략)’
사건의 파장은 컸다. 사당이 털렸으니 이왕전하(순종)는 선왕들 뵐 낯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위안제를 열었다. 창덕궁 경찰서장, 경기도 형사과장, 종로 동대문 사법계원이 종묘에 모여서 ‘과학적 수사’에 나섰다. 시내 각 경찰서가 총동원됐다. 언론도 거들었다. <동아일보>는 독립단과 사회주의자를 골라잡는 데는 귀신인 경찰부 형사과가 낮잠을 자는 모양이라고 경찰을 나무랐다(1924년 5월 4일자). 어보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두 임금의 어보를 찾았다는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두 어보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을까.
1951년 종묘에서 또다시 어보가 사라졌다. 이번에는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의 어보가 도둑맞았다. 문정왕후는 조선시대 제11대 왕 중종의 계비(繼妃, 임금이 다시 장가를 가서 맞은 아내)다.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고 아들인 명종이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했다. 서울 노원구 공릉동의 태릉이 문정왕후의 능이다.
문정왕후의 어보는 높이 6.45㎝, 가로, 세로 각 10.1㎝로 거북이 모양의 손잡이가 달렸다. 아래 인면(도장을 찍는 면)에 문정왕후의 존호인 ‘성열대왕대비지보(聖烈大王大妃之寶)’란 글이 새겨져 있다. 이 어보는 1547년 아들 명종(재위 1545~1567)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명종이 경복궁 근정전 섬돌 위에 나가 ‘성렬인명대왕대비’라는 존호를 올리고 덕을 칭송하는 옥책문과 악장을 올렸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와 있다.
어보는 왕가의 권위를 상징하는 도장으로 왕과 왕비, 세자와 세자빈 등 존호를 올릴 때 사용했다. 특히, 임금의 도장은 집무용·대외적으로 사용되는 국새(國璽)와 의례용으로 사용되었던 어보(御寶)로 구분된다. 외교문서나 행정에 사용했던 국새와 달리, 어보는 각종 행정문서가 아닌 왕실의 혼례나 책봉 등 궁중의식에서 시호·존호·휘호를 올릴 때 제작되어 일종의 상징물로 보관했다.
하나의 어보는 거북 또는 용 모양의 의례용 도장, 도장을 담는 내함인 보통(寶筒), 보통을 담는 보록(寶), 그리고 이를 각각 싸는 보자기와 보자기를 묶는 끈 등 최소 6개 이상의 다양한 유물이 한 묶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보는 3~7㎏ 정도의 무게로 한손으로 들기에는 무거운 편이다. 글자가 새겨져 있는 몸통 부분의 보신(寶身)과 술이 달린 거북·용 모양 등으로 장식된 보뉴(寶)로 되어 있다. 보뉴의 모양은 대한제국 기에 들어서면서 거북이에서 황제의 상징인 용으로 변경됐다. 외세의 침탈 앞에서 쓰러져가는 왕조를 지키려 했던 고종의 안간힘이었다.
문정왕후와 현종의 어보 환수에서 알 수 있듯이 문화재환수에는 정부와 민간의 지속적이고 유기적이며 계획적인 활동이 필요하다. 모든 것은 제자리에 있을 때 아름답다.
참고문헌. <왕의 상징 어보>, 국립고궁박물관(2012), 네이버 지식백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