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한승헌 전 감사원장은 “고인은 군사독재의 광풍에도 기개를 굽히지 않고 언론인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삶 자체로 보여줬다”며 “군사독재 시절 3선 개헌 비판 사설 게재,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지지 사설 거부 등 투사보다 강인해야 하는 언론인의 기개를 떨친 분”이라는 헌사를 남겼다.
박권상 선생이 걸었던 ‘언론 50년’은 자유로운 시대가 아니었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삼엄한 계엄통치하에 모든 기사가 ‘사전 검열’을 받는 어렵고 힘든 상황이 이어졌다. 하지만 박권상 선생이 1962년부터 1980년 8월까지 일했던 당시의 <동아일보>는 ‘대부분의 언론’과는 달랐다.
특히 1969년 3선 개헌과 1972년 10월 유신 당시 박권상 선생은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대리하고 있었다. 당시 언론은 강약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부분 3선 개헌을 지지하던 때였다. 자연스레 <동아일보>의 향방에 관심이 쏠렸다.
박권상 선생은 개헌을 비판하는 내용의 원고지 15매 분량의 사설 원고를 사장에게 제출했다. “박 대통령이 경제건설과 국가방위에 초석을 깔아 놓았듯이, 헌정제도를 건전히 운용하는 데 필요한 관례를 세웠으면 한다”면서 “본보는 개헌안에 반대하는 입장을 명확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박권상 선생이 <동아일보> 편집인 겸 논설주간으로 있을 1980년 5월, 광주항쟁이 벌어졌다. 이때 <동아일보>는 항의의 뜻에서 ‘무사설’로 신문을 발간했다. 6월 국보위가 탄생했을 때, 이를 지지하는 사설을 써달라는 요청을 간접적으로 받았으나 거절했다. 모든 신문이 국보위 발족에 아부성 사설을 쓰는 판에 독야청청했던 셈이다.
3일 열린 박권상 선생 1주기 추모회에 각계 인사들이 참석했다. 앞줄 왼쪽부터 김선홍 전 기아차 회장, 이대훈 전 동아일보 출판국장, 김인규 전 KBS 사장, 한승헌 전 감사원장, 박권상 선생 부인 최규엽 여사, 김진배 박권상기념회 이사장, 김원기 전 국회의장, 김진현 전 과학기술처 장관, 남시욱 전 문화일보 사장, 이종찬 전 국정원장. 뒷줄 왼쪽부터 박종렬 가천대 교수, 유균 극동대 석좌교수, 이연택 전 대한체육회장, 이경재 전 방송통신위원장, 심상기 서울미디어그룹 회장,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임홍빈 문학사상 회장, 제재형 전 대한언론인회장, 김용운 한양대 명예교수, 윤재홍 전 KBS 제주방송총국장.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가장 어렵던 것이 그해 7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이었다. 당연히 국보위 입장을 지지해달라는 지시가 간접적으로 왔다. 사설을 쓰기는 써야겠는데, 누구도 거론하는 자가 없었다. 총칼 앞에서 만용을 부리는 일에 가까웠다.
결국 그가 총대를 멨다. 사전 검열을 통과할 수 있는 테두리 안에서 “사건에 대한 진실의 규명과 공정한 재판을 요구한다”는 온건한 내용을 담았다. 하지만 그가 쓴 사설은 검열 과정에서 보류된 이후 전문삭제 결정이 내려졌다. 박권상 선생은 차라리 후련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동아일보>를 떠났다. 당시 미국의 <LA타임스>는 ‘남한, 400명의 언론인 숙청’이라는 장문의 기사에서 박권상 선생의 이름을 맨 앞에 거론했다.
3일 추모식에서는 두 권의 책이 헌정됐다. 그가 언론에 대해 쓴 글 960여 편 가운데 34편을 골라 수록한 유고집 <박권상 언론학>과 신문·방송·학술·정치사회 분야 인사 42명의 회고담을 실은 추모문집 <박권상을 생각한다>다. 박권상 선생은 언론계는 물론 정치권에까지 인적 네트워크를 교류하는 일에도 열성이었다.
박권상 선생은 중견 언론인 단체인 관훈클럽 발족에 산파 역할을 하기도 했다. 관훈클럽에서 오랜 인연을 이어갔던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은 “박(권상) 선배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정기적인 모임을 조직했다. 모임은 노태우 정권 중간에 시작해 김대중 정권 초기까지 계속됐다. 여야로 나뉘어 있으나 모두 점잖고 온건한 정치적 자세를 갖춘 인물들이었다. 박 선배는 반은 정치인이었다. 그것도 아주 유능한 정치인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종찬 전 국정원장 역시 “1989년 여야 간 대화 단절이 심했던 당시 포럼을 만들고 여야 중진이 참여하는 대화의 문을 열었다”라며 “중재자로서 여야가 대화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든 박 선생의 역할이 지금 정치 상황에서도 절실하게 그립다”고 말했다.
지난해 2월 박권상 선생의 영결식. 구윤성 기자 kysplanet@ilyo.co.kr
1992년 4월 창간한 <일요신문>에도 그의 자취가 적잖이 남아있다. 그는 ‘<일요신문>의 창간에 부쳐’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뉴스매체는 스스로 진실의 추구와 진실의 보도에 성심 노력해야 한다”면서 “일간 신문보다는 일주일을 단위로 하는 언론매체가 훨씬 책임 있는 보도와 깊이 있는 논평을 가할 수 있다. 속보성에서는 뒤지겠지만 정말 독자가 필요로 하는 정신적인 영양제를 공급할 수 있다”고 밝혔다. 박권상 선생은 1998년 KBS 사장에 임명되기 전까지 매주 <일요신문>에 ‘시론’을 썼다.
김대중 정부 5년간 KBS를 이끌었던 그는 영국의 BBC처럼 만들겠다는 포부로 매진한 끝에 KBS를 가장 신뢰하고 영향력 있는 매체로 발돋움시켰다. 박지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김대중 대통령 재임 시 청와대에 가장 자주 온 분이 김수환 추기경, 강원룡 목사, 그리고 박권상 사장이었다”라며 “박권상 선생은 김대중 대통령을 그처럼 많이 만나셨지만 대통령께 어떠한 민원도 하지 않은 유일한 분으로 기억된다. 현안에 대해서 가감과 첨삭도 없이 직언하고 대통령의 잘못을 지적했다. 그래서 저와도 알력이 많았다”라고 회상했다.
지난해 12월 발족한 박권상기념회는 앞으로 박권상 언론상과 학술상을 제정하고, 기념관도 설립할 계획이다. 김진배 이사장은 3일 추모식에서 “박 선배는 신문과 방송 등 미디어에서 일하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하나의 지침을 준다”면서 “그 분이 남긴 찬란한 언론의 정신과 기백은 우리 가슴 속에, 우리 핏속에, 우리 뼛속에 살아 있다”고 말했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