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전 대표가 광주를 방문해 더불어민주당 총선 후보 지지를 호소했다. 광주의 반노 정서를 정면 돌파하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호남 민심을 얻지 않고서는 대권 역시 힘들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광주는 야권의 성지이자 심장이다. 과거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은 광주를 기반으로 대권을 거머쥘 수 있었다. 그런데 지난 2012년 대권주자이자 야권 차기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문재인 전 대표는 이번 총선에서 광주 유세를 끝까지 망설였다. 문 전 대표를 중심으로 한 친노 세력에 대한 반감 기류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았던 이유에서였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총선 내내 웃지 못 할 해프닝들이 이어졌다. 더민주 당적으로 광주 북구갑에 출사표를 던진 정준호 후보는 유세 기간 문 전 대표의 대선 출마 포기를 촉구하는 3보1배 행진을 했다. 정 후보는 “모든 선거에서 참패를 하고도 책임지는 모습 한번 보이지 않았다”며 문 전 대표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이에 대해 문 전 대표 측은 정 후보자의 총선 전략 일환이라며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불쾌해하는 기류가 역력했다. 친노계의 한 의원은 “아무리 총선 승리가 중요하긴 하지만 그래도 당의 전직 대표이자 유력 주자를 공격하면서까지 선거 운동을 해야 했는지 안타깝다”면서도 “그만큼 문 전 대표를 바라보는 광주 시민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방증이라는 점에서 반성도 필요할 것”이라고 털어놨다.
실제로 광주 지역 정가의 여론은 싸늘하기만 하다. 광주지역에 출사표를 던진 8명의 더민주 후보 중 문 전 대표에게 ‘SOS’를 보낸 후보는 한 명도 없었다. 선거공보물이나 홍보 영상에 문 전 대표가 등장하는 모습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새누리당이 텃밭인 영남권에선 계파를 막론하고 ‘박근혜 마케팅’ ‘김무성 마케팅’을 펼치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광주 지역의 한 후보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안 그래도 국민의당 후보와 접전을 펼치고 있는데 문 전 대표가 오면 그나마 있던 표도 떨어질까 걱정스러웠다. 문 전 대표 측이 지원을 해준다는 제안을 했지만 거절했다. 선거 운동을 다니다 보면 ‘당신도 친노냐’라고 묻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게 광주의 현실이다. 문 전 대표가 대선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반드시 광주의 민심을 되돌려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총선을 진두지휘한 김종인 비대위 대표는 공개적으로 이러한 상황을 꼬집기도 했다. 김 전 대표는 4월 3일 문 전 대표 광주 방문과 관련해 “검토하는 것은 자유지만…. 광주 출마자들이 요청하면 갈 수 있겠지만 과연 요청할 사람이 있겠느냐”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기자들이 ‘광주 반감 때문이냐’고 묻자 김 대표는 “광주 분위기를 봤으면 안 물어봐도 알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김 대표는 앞선 4월 2일 문 전 대표의 수도권 유세에 대해 “그러고 다니니 호남 민심이 나빠진다. 돕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착각”이라며 날을 세우기도 했다.
국민의당은 선거에서 이를 적절히 활용하며 문 전 대표를 향해 ‘도발’했다. 더민주를 탈당해 광주 동구남구을에 출마한 박주선 국민의당 의원은 총선을 앞두고 “문 전 대표에 대한 호남 민심이 사납다. 광주를 찾게 되면 오히려 국민의당 지지율이 반등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의원뿐 아니라 국민의당 내부에선 공공연히 문 전 대표의 광주 방문을 바라는 이들이 적지 않은 모습이었다.
총선 후 정계개편을 준비 중인 김한길 국민의당 의원도 문 전 대표를 겨냥했다. 김 의원은 선거 유세를 통해 “광주가 환영하지 않는 야권의 대권후보는 있어본 일도 없고, 있은 적도 없고, 있어봐야 정권교체도 안 된다”고 꼬집었다. 이어 김 의원은 “제1 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겠다는 사람이 총선기간에 광주와 호남에 오지 못하고 있다. 대권 주자가 되겠다는 사람이 선거 중에 지원 유세도 못 오는 지금의 현실에 모두가 가슴 아파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실 광주에서의 반 친노 기류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참여 정부 시절 ‘호남 홀대론’이 불거졌고, 당시 정권 주류였던 친노 세력이 그 타깃이 됐던 것이다. 지난 2012년 대선 당시 문 전 대표가 “참여정부가 호남에 드린 서운함을 잘 알고 있다. 참여정부는 지나갔지만 이제 제가 참여정부를 계승해야 하는 입장이므로 제가 그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안다. 참으로 송구스럽다”고 사과했던 것도 이런 배경에서 받아들여졌다. 성난 호남 민심을 달래야만 대선 승리가 가능하다고 판단했다는 얘기다.
특히 광주를 중심으로 한 호남지역에서 문 전 대표에 대한 최근 반감은 심상치 않은 수준이다. 반노가 아니라 반문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더민주 소속의 한 비노계 의원은 “PK 출신의 문 전 대표가 참여정부 시절 호남 역차별을 주도했다는 게 광주 정서다. 문 전 대표가 비서실장, 민정수석 등 요직을 거치며 호남 인사들을 중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라면서 “이런 상황에서 문 전 대표가 국보위 출신의 김종인 대표에게 당까지 맡겨버리니 여론이 좋을 리가 있겠느냐”라고 되물었다.
권대우 정치평론가는 ‘문재인 필패론’이 지금 호남 민심의 밑바탕이라는 주장을 내놨다. 그는 “2030세대보단 5060세대에서 문 전 대표 여론이 안 좋다. 호남의 5060세대는 우여곡절 끝에 DJ와 노무현이라는 두 명의 대통령을 배출해 본 경험이 있다. 어느 정도 정치적 의식을 갖췄다는 얘기다. 정권교체에 대한 열망도 높다. 그런데 2012년 몰표를 줬지만 문 전 대표는 실패했다. 내년에도 문 전 대표로는 정권을 되찾아오기 힘들다고 보는 것 같다. 시간이 갈수록 문재인 필패론은 확산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 전 대표 측 위기감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야권의 집토끼라고 할 수 있는 광주와 호남에서 외면받을 경우 향후 대권 행보가 어려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야권 내부에선 문 전 대표를 대신할 차기 주자를 찾기 위한 정황들이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비노 진영뿐 아니라 몇몇 친노 인사도 동참하고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더민주 공천 과정에서 불만을 품은 친노 인사들이 문 전 대표로부터 돌아선 것이다. 친문을 제외한 야권의 거의 모든 계파가 사실상 ‘문재인 필패론’에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비노계 움직임은 꽤나 구체적이다. 총선 내내 가동된 것으로 알려진 김종인 더민주 대표와 김한길 국민의당 의원 간 ‘핫라인’도 차기를 위한 논의를 주고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총선에서의 야권 연대는 실패했지만 대선 주자만큼은 정계개편 등을 통해 단일 후보를 내자는 게 핵심이다. 이른바 ‘문재인 축출 시나리오’를 구상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이 과정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는 한 야권 의원의 말이다.
“문재인으로는 정권 교체가 힘들다는 공감대가 퍼져 있다. 총선 후 야권 지형은 재편될 것이다. 이를 위해 양김(김종인 김한길)이 머리를 맞대고 있는 것이다. 문 전 대표를 앞세운 친노의 자리는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대선에서 한번 패배했던 문 전 대표를 빼고 대권 지도를 그리겠다는 얘기다. 광주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하는 야당 정치인이 무슨 대권이냐. 문 전 대표는 결국 고립될 것이다. 본인 스스로가 버티지 못하고 물러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이를 들은 친노 핵심 의원은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여야 통틀어 지지율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유력 주자를 안팎에서 흔들고 있다. 그러고도 정권 교체를 원하고 있다는 말을 할 수 있느냐. 김한길 의원이 위장탈당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광주에서의 반문 정서, 그리고 문재인 필패론 배후에 김 의원 등이 이끄는 비노계가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문 전 대표 영향력을 줄이고 본인들이 지지하는 후보를 내세우겠다는 전략 아니겠느냐”라고 말했다.
친노 일각에선 이러한 비노 진영 복안을 두고 ‘김종인 대망론’과 관련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도 나온다. 김 대표가 총선 후 ‘문재인 대체제’ 또는 ‘킹메이커’가 되기 위한 일환으로 야권 전략가로 통하는 김 의원과 함께 거대한 정계개편 전략을 세우고 있다는 얘기다. 앞서의 친노 핵심 의원은 “문 전 대표가 데려온 김 대표가 총선을 통해 친정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 선거 후 자기 정치를 하기 위해서라고 보고 있다”면서 “향후 비노진영의 김 대표와 친노의 문 전 대표 간 주도권 싸움이 펼쳐질 것”이라고 점쳤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