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뿌리는 날 쇠창살을 통해 교도소 마당을 바라보면 담 밑에 피어난 작은 풀들이 촉촉이 젖는 게 보여요. 그럴 때면 비를 맞으면서 걷고 싶죠. 그런데 그게 바로 몇 미터 앞인데도 그럴 수 없는 게 이 감옥이고 징역살이예요.”
소년시절 감옥에 들어온 그는 중년을 맞이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평범한 식당에서 된장찌개를 사먹어 보고 싶다고도 했다. 사람들이 공기처럼 느끼는 평범한 것들이 갇힌 사람들에게는 가장 소중했다. 오랫동안 독방에서 징역생활을 또 다른 사람이 쓴 이런 짧은 글을 읽었다.
‘눈을 감고 천천히 걸었습니다. 한 걸음 두 걸음 반이면 이마에 섬뜩한 철문. 뒤로 돌아 한걸음 두 걸음 반이면 코 앞에 쇠창살. 그곳에는 이슬 젖은 산책길이 있나요. 그곳에는 저물어 가는 들길이 있나요. 시장 골목에 손님 부르는 소리 들려오나요. 거리에는 연인들이 팔짱을 끼고 걷고 있나요. 나는 걷고 싶습니다. 걷다가 걷다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끝도 없이 걷고 싶습니다.’
변호사인 나는 감옥생활을 하는 그들에게서 진한 감동으로 전해져 오는 걷는 행복을 배웠다. 어느 날 여의도에서 볼일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강변을 걷고 싶었다. 노을에 붉게 물들어 출렁이는 강물을 보며 걸었다. 멀리 도심의 빌딩위에 걸린 밝은 진홍색의 해가 황홀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무엇에 홀린 듯 계속 걸었다. 뚝섬 쪽 강가에 이르렀다. 기억의 영사막 속에서 강가에 앉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 흑백사진 같이 나타났다. 아버지는 무심히 흐르는 강을 좋아했다. 강 길을 따라 걷다가 광나루의 강가 벤치에서 잠시 아픈 다리를 쉬었다. 어스럼 속에 물결치는 강가에 50년 전의 넓은 모래사장이 솟아오르는 상상을 했다.
모래사장에서 텐트를 치고 놀던 햇볕에 까맣게 탄 소년시절의 내가 나타났다. 주변에는 키타와 간단한 스네아드럼 만으로 구성된 밴드가 연주하던 ‘울리불리’라는 곡이 머리 속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어둠이 밀려오는 하남 쪽의 적막한 강은 말없이 내게 인생은 무엇이었던가를 묻고 있었다.
나는 강변풍경에 취해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걸었다. 들꽃이 가득 핀 인적 없는 여주강가의 들판을 지나면서 홀가분한 자유를 느꼈다. 그렇게 충주까지 걸어갔었다. 밤이 되면 강가의 조용한 모텔에 들어가 자고 다음날 아침 또 걸었다. 발톱이 빠지는 바람에 걷기를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행복한 걷는 길이었다. 내게 걷는 행복을 가르쳐 준 죄수가 이십년 만에 석방이 되어 나를 찾아왔다. 세상에 나오니 그는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감옥에서 노동을 해서 번 돈으로 성남에 작은 방 하나를 얻었다고 했다. 저녁이면 쓰레기가 널린 뒷골목을 걸어도 좋기만 하다고 했다. 걸으면서 부부끼리 악다구니를 쓰고 싸움을 하는 광경을 보면서 속으로 말했다고 한다.
감옥의 독방에 갇혀 있을 때 누구와 싸우는 것도 행복이라고 생각했다고. 미친 듯 걷고 싶다고 글을 썼던 또 다른 죄수는 사면이 된 후 인도로 티벳으로 이 지구별을 한없이 걸어 다니며 별같은 시를 쓰고 있었다. 변호사인 나는 감옥을 드나들면서 작은 행복 하나씩을 낚시하듯 잡아 건져오고 있다. 행복은 발견하는데 있다. 반지하방의 가난한 셋방살이에도 따뜻한 햇살은 깨진 창으로 어김없이 들어온다. 그런 진짜 행복들은 부자와 차별이 없는 것 같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