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밤 11시 30분쯤 ‘일요신문’은 서울 모처에서 전직 빙상 선수 A 씨를 만날 수 있었다. 처음 연락을 시도한 지 1년이 다 돼가는 시점이었다. A 씨는 지난해 초부터 빙상계가 성추행 사건의 피해자로 파악한 사람이었다. 과거 한체대에서 2년 가까이 사설 강습을 받았던 A 씨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내기 시작했다. 피해는 대부분 한체대에서 이뤄졌다는 A 씨의 고백이 1시간 내내 이어졌다.
약 10년 전부터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한 A 씨는 10대 시절이었던 2016년 초부터 2017년 하반기까지 약 2년 가까이 한체대에서 스케이트 사설 강습을 받았다. 한체대는 한체대 소속 빙상단 외 초중고생 선수반 약 70여 명에게 사설 강습을 했다. A 씨가 지목한 피해 장소는 모두 한체대 빙상장 안이었다. 한체대는 사설 강사가 쉴 수 있는 공간을 따로 배정해 놓는데 이 장소는 사설 강사와 10대 학생이 일대일로 대면하는 밀폐 공간으로 변질됐다.
A 씨는 “주로 한체대 빙상장 지하에 있는 방에서 일어난 일”이었다고 말했다. A 씨에 따르면 사설 강사 B 씨는 지속적으로 A 씨를 한체대 빙상장 지하에 위치한 한 작은 방으로 불러 껴안거나 강제로 입을 맞췄다. 이제껏 발생한 스포츠계 미투에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은 “훈련 도중 자세를 교정해 주다 발생한 오해일 뿐”이란 반응을 보여왔다. ‘오해’라는 단어가 변명으로 사용됐다. 하지만 A 씨의 피해는 이런 변명이 통할 수 없는 장소에서 발생했다.
A 씨는 “스케이트 날을 봐준다는 이유로 자주 불렀다. 한체대에는 스케이트장 지하에 조교나 사설 강사가 쉴 수 있는 작은 방이 있다. 거기에서 단둘이 있을 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껴안거나 강제로 입을 맞췄다. 얼굴 표정이 일그러질 정도로 꽉 껴안았다”며 “빙상 경기를 보러 다른 빙상장에 갔을 때 등 훈련과 상관 없는 장소와 시간대에 B 씨의 행동이 계속됐다. 빙상장에서 훈련할 때는 전혀 그러지 않았다”고 밝혔다. 외국으로 전지훈련 갔을 때도 이런 피해는 계속 이어졌다. A 씨에 따르면 B 씨는 A 씨만 따로 불러다가 호텔방에서 장비를 보며 비슷한 행동을 계속했다.
강제 입맞춤과 강제 껴안기뿐만 아니었다. A 씨에 따르면 한체대 사설 강사 B 씨는 지속적으로 A 씨에게 “사랑한다”거나 “영화를 보자”고 메시지를 보냈다. A 씨는 다른 일이 있다는 식으로 계속 거절 의사를 밝혔지만 B 씨의 집요한 요청은 계속됐다.
폭언 피해도 털어놨다. 스케이트장에서 훈련을 하다 B 씨를 스쳐가면 갑자기 B 씨는 A 씨에게 “돼지 같은 X”이라고 소리치거나 “미친X아”라고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강제 입맞춤이 이어졌다. A 씨는 “정말 황당했다. 욕하다가 또 껴안고 입을 맞춰 더러운 기분이 들었다. 폭언을 하면서 입을 강제로 맞추거나 껴안으니 얼굴도 보기 싫고 말도 하기 싫었다”고 했다.
다른 선수의 폭행 피해도 나왔다. A 씨는 “난 폭행 당한 적은 없다. 초등학교 때부터 너무 맞아서 한체대에서 사설 강습을 받기 전에 미리 ‘나는 만약 맞으면 바로 그만둘 것’이라고 말했던 까닭”이라며 “다른 학생이 맞는 건 수도 없이 봤다. 헬멧을 내리치거나 스케이트 날 덮개로 계속 때렸다”고 전했다.
특히 한체대 소속 선수단의 폭행 피해가 이어졌다. “한체대 선수반은 정말 심하게 맞았다. 학부모가 보는데 따귀를 날리는 적도 많았다. 한번은 빙상장 현관문 안쪽에서 선수단을 때려 빙상장 밖에까지 맞는 소리가 들린 적 있었다. 선수 얼굴이 시뻘건 색으로 변할 정도였다. 밖에 있는 학부모는 ‘이거 맞는 소리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지만 말리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며 “한체대 빙상장 2층 전명규 교수실 바로 앞에는 다목적실이 있다. 거기에서 선수단을 엎드리라고 한 뒤 지옥훈련이라고 하는 벌을 주고 일어서면 때리는 행위가 계속 이뤄졌다. 빙상장에서는 아예 폭행 시간이 있었다. 한체대 빙상장 1층에는 빙상장의 훈련 광경을 지켜보는 큰 통유리가 있다. 사설 강사는 이 통유리를 암막이 덮으면 폭행이 시작된다”고 일렀다.
A 씨는 특히 사설 강사의 한체대 선수반 폭행이 가장 이해할 수 없었다고 했다. 사설 강사와 한체대 선수단은 전혀 관계가 없지만 고등학교 사설 강습반과 한체대 선수단이 함께 훈련을 했으며 사설 강사가 한체대 선수반을 폭행하는 장면을 수도 없이 봤다고 전했다. 실제 ‘일요신문’은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사설 강사가 전명규 한체대 교수나 한체대 조교를 대신해 한체대 빙상단을 이끄는 모습을 집적 사진기에 담은 적도 있었다.
2018년 4월 국가대표 선발전 때 한체대 선수단을 지휘하는 사설 강사. 이 사설 강사는 2012년 자신의 제자를 성추행했다는 의혹에 빠졌지만 아무런 조사도 받지 않았다. 최근까지 한체대 사설 강사로 활동하고 지금은 목동빙상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
피해 사실을 알리기엔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고 밝혔다. 조직폭력배 관련 영화를 닮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벗어나고 싶단 마음이 강했다. 하지만 여기를 벗어나면 선수생활을 못한다는 걸 우린 모두 알고 있었다. 다른 팀으로 가도 좋게 가는 게 아니다. ‘쟤 어떻게 좀 해라’라는 보복이 올 걸 알기 때문에 다른 팀으로 간다는 건 매우 어렵다”며 “이런 말도 들었다. 말을 안 들으면 ‘네가 한체대에 온다고 하면 너를 뽑겠냐? 다른 사람을 뽑겠냐’는 말이었다”고 했다.
A 씨는 아직도 순간순간 떠오르는 그때 기억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잊고 살려고 다른 쪽에 집중하곤 했는데 빙상 관련 매체를 보거나 사진을 보면 그때 기억이 떠오른다. 집에서 거의 나오지 않고 모든 연락을 다 끊었다”며 “스케이트를 타면서 난 나서서 운동하고 늘 즐거워했다. 성취감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 사람 때문에 조금씩 싫어졌던 스케이트가 이제는 아예 보기도 싫을 정도가 됐다”고 말했다.
빙상계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이번에는 꼭 처벌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남겼다. “고발하고 싶었지만 사건이 늘 묻히는 걸 보며 ‘나도 말해봤자 안 되겠구나’ 싶었다.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은 늘 한체대로 돌아왔기 때문”이라며 “이번에 석희 언니가 기회 만들어 줬으니까 다른 피해자도 함께했으면 한다. 어떤 방식이라도 좋으니까 자기가 피해본 걸 이야기하고 위축되지 말았으면 좋겠다. 진짜 벌 받을 사람은 벌을 받고 정리될 건 정리돼야 할 거 같다”고 했다. 도움도 요청했다. “한체대 라인에서 성범죄 일으킨 사람 가운데 성범죄로 처벌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다 돌아왔다. 위에 계신 분들이 이번에는 정말 묻지 말고 해결해줬으면 한다”고 전했다.
A 씨는 스케이트를 그만두기 전까지 ‘스케이트’라는 말을 들으면 ‘하늘색’이 떠올랐단다. “뭔가 투명한 하늘색 같은 그런 느낌이었어요”라고 답했다. 지금 A 씨가 생각하는 스케이트는 붉은색이다. “지금 스케이트란 단어를 들으면 검붉은색이 떠올라요. 더러워서요”라고 덧붙였다.
17일 태릉국제빙상장 주차장에서 장비를 꺼내는 한체대 사설강사 B 씨.
이와 관련 ‘일요신문’은 17일 태릉국제빙상장을 찾아 가해자로 지목된 한체대 사설 강사 B 씨를 만났다. 이제껏 수십여 차례에 걸쳐 인터뷰를 요청하고 전화를 했지만 한 번도 응하지 않던 그였다. 어렵사리 만난 그는 “조사 받을 게 있으면 성실히 조사를 받겠다”고만 했다.
이날은 2019 종별종합주니어통합대회 마지막 날이었다. 사설 강사 B 씨가 관리하는 한체대 강습반 학생 3명은 경기가 끝난 뒤 한참이 지났지만 경기장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B 씨가 있는 로커룸 밖에서 옹기종기 모인 셋은 “가도 될까?”, “네가 물어 봐봐”하며 실랑이를 벌였다. 이윽고 한 명이 총대를 메고 B 씨가 있는 로커룸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나온 한 학생에게 밖에 있던 둘은 “야. 안 맞았냐?”라고 물었다. B 씨와 만나고 나온 학생은 “어. 집에 가래. 상태 좋은데?”라고 답했다. 나머지 둘은 그 이야기를 듣고 바로 B 씨가 있는 로커룸으로 들어갔다가 나와 집으로 향했다.
‘일요신문’ 취재진은 이들 셋에게도 빙상장에서의 폭력 등의 피해 여부를 물었다. 그들은 말했다.
“저희는 그런 거 당해 본 적 ‘전혀’ 없습니다.”
최훈민·이동섭 기자 jipchak@ilyo.co.kr
유도 레슬링 태권도계에서도…여기가 정글이냐 레슬링과 유도, 태권도계에서도 성폭력 의혹이 연이어 제기되고 있다. 허나 종목단체와 대한체육회의 방관으로 피해자가 받는 고통의 시간은 나날이 길어지고 있는 상태다. 13일 레슬링 여자국가대표선수 일부가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직전 진천선수촌에서 상습적인 성추행 피해를 당했다고 밝혔다. 훈련 도중 몸을 더듬는 등 불필요한 신체 접촉이 계속됐다는 주장이었다. 거부 의사를 밝혀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이 선수들은 다른 지도자를 찾아갔지만 돌아오는 건 가해자 감싸기였다. “너희들이 계속 이렇게 하면 선수촌에서 함께 훈련할 수 없다”는 말도 들었다고 했다. 14일에는 유도계가 뒤집혔다. 여자 유도선수로 활동했던 신유용 씨의 폭로가 나왔다. 신유용 씨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전북 고창군에 위치한 영선고 재학 시절인 2011년 여름부터 고교 졸업 뒤인 2015년까지 옛 유도부 코치에게 약 20차례에 걸쳐 성폭행을 당했다고 했다. 이 코치는 2011년부터 2013년까지 영선고 유도부 코치를 맡은 인물이었다. 태권도계에서도 터져 나왔다. 이지혜 씨는 “초등학교 6학년이던 1998년부터 2002년까지 5년간 C 씨에게 폭력과 성폭력을 당했다”고 했다. 전 대한태권도협회 이사 C 씨가 운영하던 태권도 도장에서 사건이 발생했다는 폭로였다. 이 씨에 따르면 당시 태권도를 배우던 많은 원생이 피해를 입었다. 중학생 때부터 수십 차례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한 사람도 세 명이나 됐다. 이지혜 씨에 따르면 C 씨는 체육관과 합숙소 등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신체 변화를 알아야 한다며 만지고 성폭력을 했다는 폭로였다. 이 씨는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C 씨와 비슷한 사람을 보면 온몸이 얼어붙는다. 늦은 밤 큰 쓰레기봉투를 보고 (C 씨로 착각해) 주저앉은 적도 있다”고 했다. 피해자 가운데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사람도 있었다고 전했다. 사건 처리는 감감무소식이다. 대한레슬링협회는 이번 사건 관련 자체 조사를 마쳤고 2차 조사를 앞두고 있지만 은폐 의혹에 휩싸여 있다. 선수들은 사건 뒤 대한체육회 선수인권위원회에 신고했으나 아무런 조치도 없었던 까닭이다. 대한유도회도 마찬가지다. 피해자와 피의자가 유도계를 떠났다는 이유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심석희 폭로로 세간의 화제가 되자 뒤늦게 징계안을 들고 나왔다. 대한유도회는 “이 사건은 수사촉탁으로 인한 시한부 기소중지가 이뤄진 상태이며 서울 중앙지검에서 피의자 관련 수사가 재개될 예정인 것으로 확인됐다. 피해자와 피의자의 주장이 상이해 수사결과에 따라 징계의 확정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며 “사실여부를 떠나 학생을 선도해야 할 지도자가 정신적으로 성숙되지 않아 성적으로 자기결정권을 제대로 행사하기 어려운 미성년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사실이 인정된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판단된다”고 했다. 이어 “또 다른 유사 피해가 발생되지 않도록 해당자에 대한 영구제명 및 삭단(유도 단급을 삭제하는 행위) 조치를 내리는 방안을 19일 이사회에 긴급 안건으로 상정해 처리한다. 유도회는 향후 이런 사건이 재발되지 않도록 일벌백계 차원에서 관계자에 대해 엄중 조치하고 관계부처와 협의해 관련규정을 강화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이지혜 씨를 비롯한 피해자 15명은 피해자연대를 꾸려 지난해 4월 대전지검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현재 1심 공판이 진행되고 있다. 최훈민 기자 |
[추후보도] 빙상 선수 A 씨에 대한 B 코치의 성추행 의혹은 검찰 조사 결과 기각 본지는 2019년 1월 19일 특종/단독면에 ‘“돼지 같은 X, 폭언하며 강제키스” 빙상계 두 번째 미투 피해자 단독 인터뷰’라는 제목의 보도를 했습니다. 이에 대해 보도에 언급된 빙상 코치(강사)가 “2019년 4월 검찰로부터 피해 사실에 대한 진술을 청취할 수 없고, 피의사실을 인정할만한 충분한 근거가 없다는 것일 이유로 각하 처분을 받았다”고 밝혀와 알려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