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호텔 28층에서 바라본 제2롯데월드.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대기업 수사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소식은 비자금이다. 대기업 총수 일가의 비자금 조성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계열사와 거래, 또는 회사 돈을 밖으로 빼돌리는 수법이다.
전자의 경우 일감 몰아주기, 비정상적인 가격 거래 등이다. 롯데케미칼은 해외에서 원료를 들여오면서 협력사의 해외법인과 일본 롯데물산을 끼워 넣어 거래대금을 부풀려 수백억 원의 비자금을 만든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또 신격호 총괄회장 등이 보유한 부동산을 계열사들이 비싼 값에 사거나 롯데시네마 등의 매점을 총수 일가 가족회사가 독점하는 방법 등이 이 범주에 속한다.
후자의 경우 인수합병(M&A)이나 투자 등을 통해 회사 돈을 지출하는 과정에서 비자금을 만드는 수법이다. M&A 가격을 부풀린 후 뒷돈을 받거나 사업상 손실을 내 회사 돈을 밖으로 빼돌리는 방법이다. 검찰은 신동빈 회장이 공격적인 M&A와 해외사업 투자 실패 등의 과정에서 수천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했을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혐의가 사실이라면 횡령과 배임죄를 적용받을 수 있다.
현행법상 횡령과 배임으로 인한 이득액이 50억 원 이상일 때는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이 가능하다. 또 이득액 이하에 상당하는 벌금형도 함께 받을 수 있다. 만약 비자금이 해외에서 조성됐거나 조성된 비자금을 해외로 빼돌린 경우 그 금액이 50억 원을 넘으면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형이 가능하다.
# 비자금 어디에 사용했나
대기업 총수 일가들이 비자금을 만드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세금을 피해 부를 대물림하거나 로비를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조성된 비자금은 현금으로 보관하거나 차명계좌·주식으로 관리되는 경우가 많다. 최근 들어서는 그림 등 예술품이 활용되기도 한다.
롯데의 경우 제2롯데월드 인허가 과정에서 이명박정부 고위층에 로비를 한 게 아니냐는 의심을 받아왔다. 이번 검찰 수사에서도 이 부분은 주요 관심사다. 재계 관계자는 “롯데는 부동산 투자와 개발로 큰돈을 벌었다. 부동산은 인허가 업무가 필수고, 그만큼 로비 필요성도 높다. 사업을 위해서라도 비자금이 필요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경영권 유지 또는 강화를 위해서도 비자금은 요긴하다. 총수 일가들의 공식적인 수입은 급여와 배당이지만 경영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보다 더 많은 돈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당장 상속과 증여만 하더라도 세금을 그대로 내면 보유 지분이 반토막 나기 십상이다. 차명 등을 활용해 지분을 늘리든지 세금 낼 돈을 미리 만들어둘 필요가 있다.
신동빈 회장의 경우 롯데 주요 계열사 지분율이 아버지인 신격호 총괄회장과 형인 신동주 SDJ코퍼레이션 회장에 비해 확고한 우위에 있지 못하다. 한국 롯데그룹의 지주사 격인 호텔롯데 지분도 전혀 없다. 경영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는 지분 확보가 필수다. 돈이 필요하다.
# 그룹 경영권은 어디로
롯데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은 호텔롯데다. 일본의 롯데홀딩스가 최대주주다. 롯데홀딩스는 일본인 임직원으로 구성된 주주회가 경영권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현재 이 주주회가 신동빈 회장을 지지하고 있다. 아울러 국내 롯데 주요 계열사의 이사회도 신 회장이 장악하고 있다. 따라서 계열사끼리 보유하고 있는 계열사 지분들은 신 회장 쪽에 우호적이다.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신동빈 회장으로서는 호텔롯데 상장을 통해 경영권을 확고히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관건은 신동빈 회장이 얼마나 빠른 시간에 지주사 격인 호텔롯데의 실질적인 최대주주가 되느냐다. 검찰 수사와 재판 결과 신 회장 신상에 변화가 생길 경우 경영권을 담보할 수 있는 지분은 절실하다. 주어진 시간은 검찰 수사 이후 재판을 마치기 전, 대법원까지 갈 경우 1~2년가량이다. 분수령은 호텔롯데 상장이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신 회장 입장에서는 호텔롯데 상장을 통해 롯데홀딩스 등 일본 계열사 지분을 줄이고 본인 또는 우호지분을 늘려야 한다. 보유 현금으로 주식을 매입하든지 아니면 보유 중인 다른 계열사 지분을 호텔롯데에 현물출자하고 대신 주식을 받는 방식이다. 호텔롯데 지분만 확보하면 일본 주주 그늘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신동주 회장 측 반격의 여지도 봉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검찰 수사로 7월 예정된 호텔롯데 상장이 불발됐지만 신 회장은 신속히 재추진 의사를 밝혔다. 그는 지난 14일(현지시간) 미국에서 한국 특파원들과 만나 “연말까지 상장하겠다”고 강조했다.
# 왜 지금, 롯데인가
제2롯데월드를 둘러싼 의혹들은 이명박정부 때부터 꾸준히 제기돼왔다. 그런데 왜 하필 이 시점에서 검찰이 전방위적인 수사에 나섰을까. 재계와 증권가에서는 다양한 추론이 나온다.
정치권 한 관계자는 “롯데는 이명박정부 당시 급성장했다. 제2롯데월드 인허가를 얻은 것 외에도 숱한 M&A를 성사시키며 몸집을 크게 불렸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지지세력인 친이계는 현재 새누리당에서 친박계의 대척점에 서 있다. 정치공학적으로 보면 비박과 친이가 손을 잡을 경우 친박의 당내 입지가 약해질 수 있고, 이는 곧바로 내년 대선 경선까지 이어진다”고 풀이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지난 총선에 참패한 정부와 여당으로서는 국면전환이 절실하다. 노동개혁을 앞세우는 마당에 재벌개혁에 소홀할 수도 없다. 이는 내년 대선과도 직결된다. 게다가 롯데는 국가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그리 크지 않아 가장 적합한 상대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롯데의 주력은 주로 유통과 내수업종이다. 시장점유율도 높다. 경영공백이 어느 정도 생기더라도 치명적이지 않을 수 있다. 예전 SK 역시 제조업이 주력이 아니어서 경영공백 우려나 국가경제에 미치는 충격파가 그리 크지 않다는 평가가 많았다. 더불어 롯데는 지난해 형제의 난으로 경영권에 빈틈도 생겼다.
# 내부정보 누가 제공했나
그동안 대기업 비자금 사건에는 늘 내부고발자가 존재해왔다. 철옹성으로 불렸던 삼성도 김용철 변호사의 내부고발로 특별검사 수사까지 받고, 이건희 회장이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내부자가 아니면 접근이 어려울 정도로 대기업들의 보안이 철저하기 때문이다. 특히 롯데는 수년 전 이미 한 차례 검찰 조사를 받은 바 있다. 확실한 증거 없이 검찰이 또 다시 수사를 시작하기 어렵다.
검찰 수사가 시작됐을 때 내부고발자로 가장 먼저 지목된 곳이 신동주 회장 측이다. 신동빈 회장과 ‘형제의 난’을 벌인 상대라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신동주 회장을 내부고발자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당장 본인이 이를 부인하고 있고, 검찰 조사를 받을 경우 신격호 총괄회장과 신동주 회장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자신을 후계자로 인정한 신 총괄회장에게 불똥이 튀면 신동주 회장으로서는 정통성에 타격을 입을 수 있다. 형제의 난으로 옷을 벗은 여러 임원들 가운데서 내부고발자가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추측했다. 또 다른 대기업 관계자는 “최근 대기업들은 퇴임 임원에 대해서도 단속을 철저히 하는 편이다. 하지만 롯데의 경우 형제의 난으로 공백이 생기면서 제대로 단속이 되지 않았을 수 있다”고 풀이했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