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코공대위, IDS홀딩스, 밸류인베스트코리아 피해자연합회 등 금융피해자연대 회원들과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민생경제연구소 등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지난 4월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내자동 서울지방경찰청 앞에서 금융범죄 사건 재수사를 촉구하며 해당 기업, 은행 등을 고발하기 앞서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금감원의 키코 배상권고를 거부한 곳은 신한은행(배상액 150억 원)과 하나은행(18억 원), DGB대구은행(11억 원), 한국씨티은행(6억 원) 등 시중은행과 국책은행인 KDB산업은행(28억 원)이다. 신한은행과 하나은행, 대구은행은 다섯 차례나 수락 기간 연장을 요청하며 시간을 끌었으나 결국 배상안 불수용 결정을 내렸다. 은행들은 불수용 이유를 밝히며 “법률적 검토와 내부 논의를 거쳤다”고 밝혔다.
이들 은행이 배상을 거부한 배경에는 2013년 대법원 판결이 있다. 당시 대법원은 키코 계약의 사기성은 인정하지 않았다. 다만 상품 위험성을 제대로 고지하지 않은 것은 문제라며 불완전판매 가능성은 인정했다. 키코 사건을 재조사한 금감원 또한 불완전판매 문제를 지적하며 배상을 권고했다. 금융위는 은행들이 배임 문제를 이유로 권고안 수용을 망설이자 “키코 배상이 은행법상 배임혐의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유권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피해기업들 키코 상품 ‘수학적 증명’ 나선 배경
은행들은 이미 키코 상품이 사기 상품이 아니라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기 때문에 법적 강제성이 없는 권고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은행들은 은행협의체에 참여하고 법원에 판단을 구하지 않은 피해기업 145개 기업에 대한 배상을 자율적으로 논의하겠다는 입장이다.
금감원은 은행협의체와 관련, 은행들의 참여 여부를 확인한 후 이르면 이달 말부터 협의체를 가동할 계획이다. 그러나 은행협의체가 내놓을 자율 배상안은 권고안 수준에는 미치지 못할 것으로 전망된다. 더욱이 피해기업들은 키코 판매은행 전원 참여를 원하고 있지만, 일부 은행들은 은행협의체 참여 여부조차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법원 판결을 받은 다수 기업이 배상에서 제외된다는 점이다. 키코 사태 당시 발표된 피해기업은 732개. 이 중 오버헤지(실제 수출대금을 초과해 과도한 규모의 키코계약을 체결한 경우)가 발생한 기업 206개 가운데 중 61개 업체가 이미 소송을 제기하거나 해산했다.
금감원도 키코 상품의 공정성에 대해 대법원 판결을 거스르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키코 공대위는 지난 6월 17일 금감원과 비공개 간담회를 진행하고 키코 상품의 공정성에 대한 수학적 증명을 요구했으나, 금감원에서 이를 완곡히 거절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 시간가량 면담을 마치고 나온 조붕구 키코 공대위원장은 “금감원에 키코 상품의 수학적 증명을 요구했으나 이미 대법원 판단이 내려진데다, 분석할 수 있는 전문 팀이 없어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전했다.
이에 키코 공대위는 대법원 판결 논리가 잘못됐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직접 공신력 있는 기관에 의뢰해 키코 상품을 분석하겠다는 계획이다. 이를 통해 키코 계약의 불공정성과 대법 판결의 오류를 수학적으로 증명하고, 금융당국의 유권해석을 받겠다는 방침이다. 과거 대법원은 은행의 마진율이 높지 않다는 이유로 키코 상품에 대해 불공정 계약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린 바 있다.
조봉구 위원장은 “숫자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2013년 대법원 판결 이전에도 상품 구조를 분석한 증명을 내놨지만, 대법원에서 논리를 왜곡해 대입했다”며 “이번에는 키코 상품과 계약을 분석해 대법 판결에 잘못된 논리가 대입된 것을 밝히겠다”고 말했다. 금감원은 키코 공대위의 분석 결과 타당성에 대한 유권해석 요청에 추후 내부 협의를 통해 입장을 밝힐 예정이다.
#양승태와 민판련, 김앤장 삼각커넥션 결과?
키코 공대위가 키코 상품 계약에 대한 수학적 증명을 다시 하는 이유는 키코 사건에 대한 법원 판결에 의혹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2008년 시작된 소송에는 250여 개의 기업이 참여했지만 대법원은 소수 기업의 일부 손해만 인정하는 전원합의체 판결을 내렸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받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 6월 3일 오전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에서 열린 속행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그러나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과 함께 양승태 대법원의 재판거래 사법농단 의혹 사건이 불거지면서 키코 사건이 재조명됐다. 양승태 대법원 재판거래에 키코 사건이 포함된 정황이 드러나며 2013년 키코 사건을 일단락시킨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 의문이 제기됐다. 키코 공대위 관계자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특별조사단이 확보한 문건에 키코 사건이 포함됐다”며 “당시 양승태 대법원과 은행 측을 변론한 대형 법무법인 김앤장 변호사, 키코 판결 당시 담당 대법원 재판연구관 등이 ‘민사판례연구회’ 소속이었다”고 지적했다.
사법부 내 학술연구 단체인 민사판례연구회는 순수 학술모임으로 출발했으나, 소속 회원 출신이 주요 보직을 꿰차며 하나의 권력집단으로 자리잡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양승태 대법원 당시 민사판례연구회는 양 전 대법원장을 포함해 8명의 대법관을 배출했다. 이 가운데 양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대법관(전 법원행정처장), 고영한 전 대법관 등 6명은 키코 사건 전원합의체에 참여해 판결한 대법관이다. 키코 판결 당시 담당 대법원 재판연구관 4명도 민사판례연구회 소속이었다.
키코 공대위는 대법원 판결 이전 민사소송(1심) 판결에서도 민사판례연구회가 역할을 했다고 보고 있다. 소송에서 은행 측 변론을 담당했던 김앤장 변호사 18명이 민사판례연구회 회원이었으며, 키코 1심 판결을 선고했던 여훈구 전 부장판사가 퇴임 후 김앤장으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이다. 김앤장은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제기된 106건의 키코 소송 가운데 78건을 맡아 은행 측을 변론했다.
키코 사건에 정통한 이대순 법무법인 정률 대표변호사는 “민사판례연구회는 서울대 법대를 중심으로 우수한 인원이 모여 시작돼 법원 인원이 많아지며 엘리트 중심으로 변질됐다. 양승태 대법원과 민사판례연구회, 김앤장의 관계는 합리적 의심이 가능하지만 담당 판사 지정 과정 등에 개입했느냐 하는 문제를 밝혀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그는 “사법농단이 불거진 당시와 현재의 사법부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법조계에서도 양 전 대법관 비위 문제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분위기가 있어 키코 사건 피해기업의 어려움이 여전하다”고 덧붙였다.
여다정 기자 yrosad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