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에서 ‘환금성’은 매우 중요하다. ‘환금성’을 높이면 돈이 잘 굴러가고 돈을 모으기도 쉬워진다. 최근 자금시장에서 문제가 된 RP(환매 조건부 채권)나 PF-ABCP(자산담보부 기업어음) 모두 ‘환금성’을 보완한 금융상품이다.
RP는 보유하고 있는 채권의 만기가 장기여서 오랫동안 자금이 묶일 때 위 채권을 곧 다시 매입하는 조건으로 팔고, 나중에 소정의 이자를 붙여 되사는(또는 할인 매도 후 원금 상환) 채권이다. RP 매수자는 만일 약정기일에 환매하지 않으면 담보가 된 위 채권을 팔아서 자금을 회수할 수 있기 때문에 안심하고 돈을 빌려줄 수 있고, 결국 장기채권 보유자는 RP를 통해 장기 채권을 현재의 현금으로 환금할 수 있다. PF-ABCP도 마찬가지 원리다. 부동산을 개발해서 벌어들일 미래수익을 담보로 어음을 발행해서 현재의 현금으로 환금하는 것이다.
주식회사의 시초인 네덜란드와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이런 배경에서 탄생했다. 15세기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면서 인도 등 아시아에서 향료를 수입해 유럽에 팔면 엄청난 돈을 벌 수 있었다. 문제는 배를 띄우는 데 막대한 돈이 필요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무역 상인들은 몇 년 뒤에 배가 들어오면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뿐 아니라 혹시라도 도중에 돈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이 종이(주식)를 다른 사람에게 팔아서 회수할 수 있다고 투자자를 유인했다.
종전에는 자신의 투자금을 양도하는 절차가 복잡해서 환금성이 떨어졌지만, 주식회사 제도를 만들어서 전혀 모르는 사람끼리도 주식이라는 종이를 양도하는 절차로 간소화시켜 환금성을 높였다. 거기다가 혹시라도 잘못되면 종이에 적힌 투자금만큼만 손해를 본다고 예측 가능성까지 높였으니 투자 유인은 더욱 확대됐다.
주식회사 제도는 돈을 모으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19세기에 후발국인 독일은 단기간에 중화학공업을 육성할 목적으로 주식회사 설립을 장려해서 자금을 대규모로 모았다. 그러나 어두운 면도 많았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주식회사의 확산은 대자본이 중소자본을 흡수하고 병합하는 자본의 집중을 야기한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과반수 지분만 차지하면 전체 기업을 장악할 수 있는 주식회사의 특성 때문에 갈수록 소수 대자본으로 쏠림 현상은 심각하다. 주식회사는 장점이 많은 법제도지만 절대 불변의 금과옥조는 아니다.
대부분 주식회사 형태인 대기업들은 이제 우리 생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제빵공장 노동자의 죽음을 생각하면 SPC 빵을 먹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근처에 있는 SPC 계열사인 파스쿠찌 카페까지 이용하지 않는 것은 어렵다. 먹통대란을 야기한 카카오도 마찬가지다.
대자본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하고 대안으로 출발한 것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SRI)’과 ‘건강하고 안전하며 지속가능한(ESG) 경영’ 개념이다. 기업이 더 이상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지 말라는 것이다. ‘돈 벌 자유’와 ‘기업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만 외치다가 기업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면 그때서야 일시적·감정적으로 벌주지 말고, 기업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도록 지속적·체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기업의 이익보다 인간이 먼저다.
이상훈 변호사(금융경제연구소장)는 기업 지배구조 발전을 위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서울대 경제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과 대학원을 수료했으며, 사법연수원(27기) 수료 후 변호사로 활동(1998년)하고 있다. 현재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실행위원으로서도 힘을 보태고 있다. 그는 ‘상장기업법(2021)’ 공동 저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상훈 변호사(금융경제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