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가 한전 부지를 10조 5500억 원에 낙찰받았다. 이는 예상을 훨씬 웃도는 가격으로, 일각에서는 경영 부담이 가중될 수 있다는 우려를 보내고 있다. 일요신문 DB
현대차그룹의 한전 부지 낙찰이 확정된 18일 증시에서 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 ‘컨소시엄 3인방’ 주가는 그야말로 폭락 수준이었다. 낙폭은 현대차가 9.17%, 현대모비스가 7.89%, 기아차가 7.8%에 달했다. 1년 안에 3사 보유 현금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0조 원이 넘는 현금이 유출됨에 따라 기업가치 훼손이 불가피할 것이란 우려의 결과다.
익명의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현대제철 고로 건설에도 10조 원이 들었는데, 그나마 그 기간 동안에는 현대차와 기아차가 가파른 성장을 해줬다”면서 “하지만 앞으로 성장이 예전 같지 못할 가능성이 높고, 중국 4공장, 멕시코 공장, 체코 공장 등을 신·증설해야 하는 데 이에 따른 부담이 상당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재계 관계자도 “과연 10조 5500억 원을 들여서 인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며 “과열경쟁으로 너무 높은 금액을 소진해 현대차의 경쟁력이 약해질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대규모 현금 유출에 따른 노동조합과 주주들의 반발 가능성도 있다. 현재 현대차와 기아차 노사는 통상임금의 범위를 놓고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다. 벌써부터 무리한 인수가를 적어낸 데 대해 정몽구 회장의 욕심에 노조와 주주들의 이익을 외면했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현대차 노조의 한 관계자는 “통상임금의 범위를 확대하면 마치 회사가 망할 것처럼 반대하더니 통상임금 범위 확대에 따른 인건비 부담의 몇 배가 되는 돈을 사옥 건설에 쓴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흥분했다. 한 증권사 펀드매니저도 “그동안 현대차그룹이 고성장을 지속하면서 배당에 대한 주주들의 요구가 낮았지만, 글로벌 경쟁 격화로 성장이 둔화되면 결국 배당 요구가 높아질 수 있다”며 “신사옥 건설로 배당 여력이 줄어들면 주주들이 좋아할 리 없다”고 꼬집었다.
하지만 정 회장의 결단을 긴 안목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신중론도 적지 않다. 신사옥이 워낙 절박했고, 보유 현금이 그래도 넉넉한 편인 데다, 서울의 새로운 랜드마크를 갖게 된 데 따른 브랜드 가치 상승효과도 크다는 분석이다. 한국투자증권 서성문 연구원은 “현대차와 기아차의 브랜드 가치는 각각 90억 달러와 47억 달러로 일본 도요타의 353억 달러, 혼다의 185억 달러에 한참 못 미친다”면서 “장기적으로 부지 매입에 따른 무형 가치와 시너지 창출 효과가 부정적 영향을 상쇄할 것”으로 내다봤다. 현대차그룹이 한전 부지에 ‘글로벌 비즈니스 타워’를 건설하면 이 일대를 국제교류복합지역으로 개발한다는 서울시의 구상과 시너지 효과를 낼 것이라는 해석이다.
우려의 시선이든 긍정의 시선이든 모두 동의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현대차그룹 후계구도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대규모 현금 유출로 현대차, 기아차, 현대모비스 주가가 부진하면 정의선 부회장이 보유한 현대글로비스 지분가치로 그룹 지배력을 확보하기에 용이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대차그룹은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의 순환출자 구조를 갖고 있다. 세 회사 중 한 곳의 최대주주가 되면 그룹 경영권을 가질 수 있다.
당장 주가 급락으로 기아차가 가진 현대모비스 지분가치는 4조 2229억 원, 현대차가 가진 기아차 지분가치는 7조 4712억 원, 현대모비스가 가진 현대차 지분가치는 9조 631억 원이 됐다. 반면 18일에도 현대글로비스 주가만은 2% 넘게 오르면서 정 부회장의 현대글로비스 지분가치는 3조 7479억 원으로 올랐다. 기아차가 가진 현대모비스 지분가치와 엇비슷해진 셈이다.
게다가 정 부회장은 현대엔지니어링 지분 11.72%를 갖고 있다. 역시 조 단위의 대규모 사업이 될 신사옥 개발을 현대엔지니어링이 수행한다면 상당한 매출 및 이익이 확보돼 기업가치가 올라간다. 이렇게 되면 현대엔지니어링은 직접 상장하든지, 아니면 최대주주인 상장사 현대건설과의 합병을 통한 우회상장으로 막대한 현금을 손에 쥘 수 있다. 증시 관계자는 “정 회장이 후계구도까지 염두에 두고 인수가를 높게 설정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예상을 뛰어넘는 인수가가 후계구도에는 긍정적인 효과를 낳게 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예상 밖의 높은 인수가가 현대차그룹과 정부와의 밀월관계를 낳을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인수가가 높을수록 한전이 낼 양도소득세와 현대차그룹이 낼 취득세가 높아져 각각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살림에 보탬이 된다. 세수부족 상황에서는 가뭄에 단비라 할 만하다. 만성적인 적자에 시달리는 한전도 막대한 매각차익으로 유동금융부채 대부분을 갚을 수 있게 됐다. 정부로서는 한전의 만성적자 부담을 덜면 전기요금 인상과 이에 따른 국민적 반발을 줄일 수 있다.
한편 현대차그룹이 보유중인 현금성자산으로 부지 인수대금 10조 5500억 원을 현금화하더라도 금융시장이 미치는 영향은 미미할 전망이다. 현대차그룹의 여유 현금은 예금과 머니마켓펀드(MMF)와 콜 시장 등 시장성 금융상품으로 운용되고 있다. 두 시장 모두 90조 원과 30조 원이 넘을 정도로 규모가 커 현대차그룹이 내놓을 물량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된다.
또 최근 한국은행이 내달 금리인하를 시사하고, 정부도 확장적 재정정책을 펼치며 저금리를 유도하고 있어 현대차그룹이 내놓은 금리상품 매물을 시장이 소화하는 데 무리가 없다는 게 채권시장 관계자들의 관측이다.
최열희 언론인
삼성은 얼마나 써냈을까 5조원 미만 관측 현대차그룹의 한전 부지 낙찰의 이면에 관심을 끌고 있는 부분이 있다. 과연 삼성전자가 인수가로 얼마를 적었느냐다. 한전 부지 인수전에서 패한 삼성전자가 과연 얼마를 써냈는지도 관심을 끌고 있다. 보통 경쟁입찰에서는 낙찰자 외 탈락자들이 제시한 인수가는 공개되는 않는다. 삼성전자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확인해줄 수 없다는 입장이다. 때문에 시장에서는 이와 관련한 추측들이 난무하고 있다. 가장 유력한 설이 5조 원 미만을 썼을 것이란 추측이다. 감정가보다 50% 정도 프리미엄을 얹은 가격인 데다, 당초 전문가들도 4조~5조 원을 적정 수준으로 예상한 까닭에서다. 다른 시각도 있다. 지난 2007년 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사업 입찰 당시 삼성물산 컨소시엄은 감정가(3조 8000억 원)의 2배 이상인 8조 원을 써내 현대건설 컨소시엄을 제치고 개발 사업자로 선정됐다. 경쟁입찰 경험이 풍부한 삼성이 강력한 인수 의지를 가진 현대차그룹을 꺾으려면 최소한 이보다는 높은 가격을 제시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삼성이 입찰참여 여부를 끝까지 비밀에 부쳤지만 서울의 새로운 랜드마크를 건설한다는, 그리고 재계 대표그룹의 자존심이 걸린 대결의 차원에서 최고경영진들의 인수전 의지가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입찰 참여 여부를 입찰 직후까지 밝히지 않았던 삼성전자가 결국 입찰에 참여한 것도 인수가를 5조 원보다는 훨씬 높은 수준으로 써냈을 것이라는 근거가 된다. 재계 관계자는 “현대차그룹에 패하기보다는 차라리 입찰에 참여하지 않는 편이 나을 수 있는데, 굳이 인수 가능성도 없는 낮은 금액으로 입찰 참여를 강행했다는 점은 잘 납득이 안 간다”고 말했다. 현대차그룹이 제시한 10조 5500억 원이라는 가격에서도 경쟁사 삼성전자의 인수가를 추측할 만한 단서가 있다. 보통 경쟁입찰에서는 끝자리 부분을 길게 제시한다. 경우에 따라 아주 미세한 금액 차이로 낙찰과 탈락이 가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현대차그룹 쪽에서 10조 원이 넘는 금액을 써낸 것은 삼성이 최대 10조 원 가까운 금액을 쓸 수 있는 상황에 대비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또 다른 재계 관계자는 “현대차그룹도 2007년 용산국제업무지구 입찰 때 삼성의 행보를 분석했을 텐데, 그렇다면 최소 7조~8조 원, 공격적으로 나온다면 9조 원 이상을 쓸 것이라고 예상했을 수도 있다”면서 “애초 현대차그룹이 너무 많은 금액을 썼다고 여겼지만 과거 삼성의 행보를 감안한다면 결코 써낼 수 없는 금액도 아니라고 여겨진다”고 말했다. [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