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국회의장에 오른 지 10개월 정도가 됐다. 지난해 가장 큰 보람과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역시 기억에 남는 일은 세월호특별법이다. 지난해 5월 의장직에 오른 직후 세월호 사건과 그로 인한 여야 대치로 인해 140여 일 동안 아무런 법안을 통과시키지 못했다. 한마디로 법안 제로였다. 굉장히 아쉬웠다. 다행히 9월 말 여야 합의하에 세월호특별법을 도출할 수 있었다. 이 점은 다행이면서도 내겐 보람이었다. 또 무엇보다도 1987년 개헌 이후 사실상 최초로 익년 예산안을 제때 통과시켰다는 점이 큰 보람이었다. 물론 12년 전, 16대 대선을 앞두고 딱 한번 제때 예산안을 통과시킨 적이 있었지만, 이는 대선 국면이란 이유가 있었다. 이 같은 이유 없이 원만하게 여야가 합의해 예산안을 통과시킨 것은 지난해가 사실상 처음이다. 이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년간의 나라살림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 덧붙이자면, 지난해 여야가 막말을 하거나 폭력을 행사한 일이 거의 없었다. 품위 있는 국회로의 변화, 그리고 대화와 타협이 가능하다는 모습을 국민에 보여줬다.”
―신년사를 통해 남북 의회회담 추진 의사를 밝혔다. 그 기점을 설 전후로 예고했는데.
“보통 설이라는 시점이 남북 대화를 트거나 특히 이산가족 문제를 논의할 때다. 이 기점으로 당국자회담과 이산가족 문제가 잘 풀리게 되면, 국회회담도 숟가락을 얹혀 진행해보겠다는 의미였다. 당국자회담이 우선이다. 다만 만약에 (당국자회담이) 정말 안 되겠다 싶으면, 내가 결단해야 한다. 대강 2월 말 정도면 답이 나올 것이다. 또 한 가지는 북한의 반응이다. 우리가 제안을 했음에도 북에서 받아주지 않으면 꼴 우습게 된다. 지난 연말, 국회에서 남북 의회회담을 적극 지원한다는 내용이 담긴 결의안을 판문점을 통해 북측에 전달했지만 거부당한 상황이다. 우선 북이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이 설 때 내가 제안을 해야 한다.”
―북한의 의회는 최고인민회의(최태복 의장)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김영남 상임위원장)로 구성돼 있다. 회담의 형태도 여러 가지 모델이 가능할 것 같다.
“우선 북측 대표는 최태복 의장이다. 최 의장에게 먼저 만나자고 제안하는 게 맞다. 만약 최 의장과 만나게 되면, 차후 회담을 어떤 식으로 할 것인지 협의하는 거다. 모델은 그때 가 봐야 안다.”
―그렇다면, 일단 북측의 최태복 의장과 사전에 만난 다음 합의를 도출하여 본격적인 의회 회담을 진행한다는 얘기인가.
“그렇다. 1차적으로 수장 회담을 진행하고 협의하에 남북 의회회담을 진행하는 것이다. 대강 내가 생각하는 디자인은 양당(새누리당·새정치민주연합)의 당대표가 함께 가는 것이다. 물론 1차적인 수장 회담 때부터 원혜영 남북특위위원장은 함께 간다.”
―모든 것은 당국자회담의 진행상황에 따라 가늠하게 되나.
“앞서 말했지만, 당국자회담이 안 되면 내가 결정해야 한다. 물론 국회가 단독으로 가면 모양새가 좋지는 않다. 누가 보면 ‘정의화라는 정치인이 단독으로 풀어간다’고 할 것 아닌가. 난 그런 의심을 받고 싶진 않다. 또 북측에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사가 어렵다.”
시진핑 중국 주석의 방한 당시 기념촬영한 모습.
―국회 부의장 시절부터 남북 의회회담을 강조해 왔다. 이유가 뭔가.
“통일은 주어진 길이지 선택의 길이 아니다. 그 이상의 명분도 배경도 없다. 분단 70년이다. 이 시점에서 북측과의 화해와 협력을 서둘러 남북통일의 길로 전진해야 한다. 지금 내 나이가 예순일곱이다. 이제 10~15년 더 살 수 있지 않겠나. 이건 개인 정의화의 문제가 아니다. 전 국민의 문제다. 만약 이것(남북 화해협력 시도) 실패하면, 죽고 나서 조상 볼 면목도 없다.”
―정치 현안으로 넘어가자. 지난 2월 8일 문재인 신임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전당대회 직후 ‘박근혜 정부와의 전면전’을 선포했다. 일각에선 의회 내 여야 갈등이 격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문재인 대표가 생각하는 전면전은 야당으로서 할 얘기는 하고, 도울 것은 도와 야당다운 야당이 되겠다는 뜻으로 본다. 여야가 무슨 원수지간인가. 양측 모두 좋은 나라로 이끌고 가자는 입장이다. 전면전의 의미를 단순히 전쟁으로 보지 않는다. 좋은 야당이 있어야 훌륭한 여당과 정부가 나온다. 그래야 성공한다. 여당과 정부도 야당의 자극을 받고 논의하고 하는 것이 맞다. 철저한 의회주의자로서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문재인 대표의 전면전 발언을) 나쁘게 보지 않는다.”
―이전 국회의장과 많이 다르다. 할 말은 하고 행동도 적극적이다. 특히 야당에게서 호평을 받고 있다.
“난 정치인이다. 내가 폼 잡고 대접받으려고 국회의장 된 것 아니다. 국회는 대한민국 국민의 대표들이 모인 곳이다. 난 그 대표들의 대표다. 당연히 해야 할 발언과 행동을 하는 것이다. 국회의장은 국가 의전서열 2위다. 권력으로 따지면 대통령 다음이다. 외부에선 정의화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적극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다음 일을 하늘 외에 누가 어떻게 알겠나. 다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신념에 따를 뿐이다. 난 확실히 다른 의장과는 다를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과는 자주 소통하나.
“며칠 전에도 통화를 했다. 통화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히긴 어렵지만, 박근혜 대통령께서 직접 전화를 주셨다. 나 스스로도 대통령과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지난해 10월 박 대통령이 시정연설을 앞두고 정 의장과 악수하는 모습.
―대통령과는 보통 어떤 내용의 말들이 오가나.
“크게 두 가지 정도가 기억난다. 지난해 10월 1일, 대전 계룡대에서 뵌 적이 있다. 지난해 9월 26일 국회에서 많은 일이 있었지 않나(당시 여당의 단독 국회 소집 및 의사일정이 강행될 가능성이 높았지만, 정 의장은 야당의 연기 의사를 받아들여 결국 소집 해산 후 국회 일정을 연기했다. 이로 인해 정 의장은 일부 여당 의원들로부터 강도 높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내 입장에선 무신불립(無信不立·믿음이 없으면 일어설 수 없다)의 신념하에 야당의 문희상 당시 비상대책위원장과 박영선 원내대표의 의견을 듣고 행한 것이다. 그 직후 박 대통령과 만났다. 그때 난 대통령께 ‘2015년은 매우 중요하다. 선거가 없기 때문에, 대통령께서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해다. 주변에서 누가 무슨 얘기를 하더라도 절대 현혹되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또 지난 2일, 신년회에서 뵈었다. 그때 대통령께서 내게 건배사를 제의했다. 짧은 시간이 주어졌지만 나는 마이크를 잡고 오래 이야기를 했다. 대통령께 ‘박정희 대통령은 새마을 운동을 통해 산업화에 성공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새정신운동을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새정신 운동은 결국 우리 사회 근본을 다시 세우자는 것이다. 지금 우리사회의 신뢰와 양심이 무너지고 있지 않나. 이기주의와 물질주의만 있다. 세월호 사건도 결국 이러한 인명경시 풍토와 안전 불감증에서 나온 현상이다. 또 자살률도 높다. 이건 국력의 대단한 마이너스다. 이 때문에 당시 박 대통령에게 완곡하게 부탁했다.”
―퇴임 후 어떤 계획이 있나.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있다. 내 장인어른이 6·25 이전, 평양 만경대구 근처에서 봉생의원을 차려 환자를 돌봤다. 그 근처와 장모님 고향 의주에 다시 병원을 세우고 싶다. 현재 내 병원(부산에 위치한 봉생병원)의 직원이 1200명 정도 된다. 직원들과 팀을 만들어 북에 오가며 일을 하고 싶다. 한국의 슈바이처가 내 소원이다. 이것만이 내 유일한 (퇴임 후) 결정 사안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국회의장 출신 대통령은 생각 없나(이승만 전 대통령이 제헌의회 의장 출신이지만, 이는 대통령 선출을 위한 사실상의 임시 의장직이었다).
“죽기 전, 남북통일이 되는 것을 보고 싶을 뿐이다. 그저 통일에 기여했던 정치인, 의회를 사랑했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내가 봐왔던 대통령들이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 다음은 하늘에 맡긴다. 난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과정이 좋으면, 중간 결과는 나빠도 정말 마지막 결과는 좋다. 마지막 결과는 결국 죽음 아닌가. 죽을 때 내 신념대로 프랑크 시나트라의 노래 ‘마이 웨이’처럼 살았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것이 제일 좋은 거다.”
―마지막으로 <일요신문> 독자에게 설날 덕담 부탁드린다.
“지금 살기가 굉장히 어렵다. 나도 잘 안다. 그러나 산다는 것은 늘 높음이 있으면 낮음도 있는 법이다. 부디 용기 잃지 말아 달라. 지금 우리나라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48%를 가져간다. 지니계수도 무척 높다. 걱정이 크다. 이런 양극화는 빨리 줄여야 한다. 이제 경제 발전과 성장만으로는 안 된다. 내가 낸 결론은 결국 우리 사회의 부정과 부패를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올해엔 국회의장으로서 김영란법을 빠른 시일 내에 통과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국민 여러분 힘을 내달라.”
이성로 기자 roilee@ilyo.co.kr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