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5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여고생들이 새정치민주연합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서명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수도권의 한 새누리당 중진 의원은 거친 표현을 섞어가며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불만을 털어놨다. 부산·경남(PK)이나 대구·경북(TK)은 보수층이 결집할지 모르나 서울·경기 등 수도권에서는 반대로 진보층이 집결할 수 있는 동력이 국정화에 녹아있다는 우려를 숨기지 않았다. 그러면서 이 의원은 “느닷없잖아요? 이게 경제하고 민생하고 안보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라며 “먹고 살기 힘들다는 주민들에게 할 말이 없다”고 했다.
수도권 의원들을 만나면 대개 이런 말들이 오프더레코드(보도유예)를 조건으로 터져 나온다. 수도권 의원들의 불만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먼저 공무원연금 개혁에 이어 노동개혁 등 개혁 이미지를 이어가다 왜 국정교과서 이야기로 개혁 레일이 바뀌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 다른 하나는 집권 여당 내 의견수렴은 물론 공청회나 세미나 등 공론화 과정도 없이 정부가 밀어붙이기식으로 나서냐는 것이다.
이를 두고 여의도 정가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왜 이 시점에 국정화를 이야기하는지 해석하면서 여러 설들을 내뱉고 있다. 한 재선 의원은 “경제와 인사를 가릴 수 있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면서 “경제는 나아지지 않고 세금은 더 오르는 것 같고 그러면 사람들은 정부가 경제를 망쳤다고 생각한다. 또 정치인 국무위원을 모두 당으로 돌려보내고 인사청문회 문제 등도 색깔론에 일부 희석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맞아야 할 매를 피하면서 여론의 주목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일종의 페이크(Fake) 전략이라는 것이다.
TK 한 중진 의원은 “18대 대선과 19대 국회 때 각종 재·보궐 선거에서 색깔론이 먹혔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이른바 ‘색깔 전승론’이다. 이 의원은 “대선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회의 이야기가 먹혔죠. 김무성 대표 취임 뒤 모든 재보선도 우리가 이겼는데 사실 그때마다 우리가 색깔 공세를 해왔지 않느냐”면서 “지금 저쪽(야당)에서는 신당이니 분당이니 분열통을 앓고 있지만 우리는 역사교과서 이야기하며 지지층을 결집시킬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실제 김 대표는 지난해 세월호 참사에 이어 인사 난맥상, 연말 비선실세의 국정농단 의혹 사건, 올해 성완종 리스트 파문 등 크고 작은 악재 속에서 재보선 압승을 이어왔다. 지난해 7·30 재보선에선 11곳을 이겼고, 올해 4·29 선거에서는 전패 예상을 뒤집고 4곳 중 3곳을 거둬들였으며 이번 10·28 재보선에서는 야권이 선점했던 지역까지 가져왔다. 통합진보당 종북 논란이나 좌편향 역사교과서 논란 등이 그만큼 폭발성이 크다는 것이다.
음모론적인 시각이긴 하지만 올 한 해 흘러왔던 정치적 사건이 마치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위한 정지작업이 아니었겠느냐는 시각도 있다. 정치권의 한 소식통은 “대표적인 것이 유승민 축출 사건”이라면서 “뜻을 거스르려는 자는 이렇게 축출해버리겠다는 선례를 남기니 국정화 정국에서 불만들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면서 그는 “누가 봐도 유승민 의원은 국정화 할 사람이 아니지 않느냐. 또 쓴소리 할까봐 미리 싹을 잘랐을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유승민 의원의 원내대표 사퇴를 전후해 친박계의 목소리가 커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당내 주류지만 소수파임이 확인된 친박계가 똘똘 뭉친 계기도 국회법 파동 때였다. 유 의원이 원내대표에서 물러난 이후 서청원 홍문종 이정현 윤상현 김재원 조원진 이장우 김태흠 등 친박계 의원들은 김 대표를 겨누기도 했다. 다시 말해 “친박계가 방귀깨나 뀔 수 있도록 길을 열어놓고 국정화 드라이브를 걸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국정화에 대한 반대여론이 높다는 조사결과가 이어지고 수도권 위기론까지 등장하면서 당내에 이견이 조금씩 표출되는 분위기다. 대국민 설득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 들여다보면 수도권 출신뿐 아니라 TK, PK 등 텃밭에서도 반대 목소리가 새어나온다.
18대 국회에서 쇄신파로 분류됐던 ‘남(경필)·원(희룡)·정(병국)’의 정병국 의원은 최근 여러 매체를 통해 “역사를 왜곡·편향되게 기술하는 것은 바로 잡아야 하지만 그 바로잡는 방법이 꼭 국정교과서여야 하느냐는 부분에는 이견이 있다”면서 “국정교과서가 아니어도 역사를 바로 기술해서 바른 역사를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다고 하면 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왼쪽부터 정병국 의원, 이재오 의원, 유승민 의원.
서울의 이재오 의원은 “처음부터 정치권이 나설 일이 아니었다. 지금은 연말정국이고 민생이 최우선”이라고 했고, 정두언 의원은 “시대를 역행하는 국정화를 갑자기 획일적으로 독점적으로 하겠다는 것”, 김용태 의원은 “당이 민심을 거스르고 있다.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했다.
TK의 유승민 의원도 언론 인터뷰를 통해 “친일과 종북을 모두 버린 균형 잡힌 역사를 교과서에 싣고 가르쳐야 한다. 하지만 국정교과서가 최선의 방법인가에 대해선 고민을 더 해야 하고 더 설득하고 소통하는 민주적 절차를 가지면 좋겠다”면서 “역사교과서가 블랙홀이 되면서 노동개혁 문제 등이 갑자기 사라져버린 형국이 됐다”고 했다. 부산의 박민식 의원은 “국정교과서 검정 체제로 생긴 편향된 역사교과서를 바로 잡자는 취지에서 나온 고육지책으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밝혔다.
이런 와중에 교육부 산하에 국정화태스크포스(TF)가 꾸려져 예비비가 운영비로 쓰였다는 것이 확인됐다. 정가에서는 국정화에 소극적인 데다 추진 과정에서의 실수를 들킨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의 경질론을 제기하면서 “유승민 때처럼 찍히면 끝이라는 공식이 다시 대입될 것”이라 말한다.
정가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오히려 이번 재보선 압승이 새누리당에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투표율 20%대인데 국정교과서를 국민이 찬성해줬다고 호도하면 반대쪽에서 결집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2017년 탄생할 수도 있는 국정역사교과서가 그 해 연말 대통령선거에서 크게 쟁점화 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기도 한다. 국정화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폭풍이 만만찮을 것이란 경고다. 즉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정권 때의 일련의 사건이 미화될 경우 여권에게 역풍이 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이재오 의원의 말은 따갑게 다가온다.
“교과서가 어느 한쪽으로 편향돼 있다면 (좌편향이든 우편향이든) 어느 쪽이든 대선 쟁점이 될 것이다. (만약 정권이 교체될 경우) 겨우 1년도 사용 못할 교과서에 100억 원이나 쏟아 부을 필요가 있는가.”
이정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