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청화괴석꽃무늬병, 조선 19세기, 높이 19.5cm.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청화백자는 한자말 그대로 백자 위에 푸른색 무늬를 그려 넣은 자기다. 푸른색을 내려고 코발트 안료를 사용했다. 청화 백사기, 청화자기라고도 부른다. 청화백자는 14세기 말 고려 때 중국에서 들어왔다. 조선이 본격적으로 생산단계에 들어간 것은 15세기 중엽. 코발트를 페르시아에서 전량 수입해야 했으므로 가격이 비쌌다. 때문에 왕실이나 사대부 집안에서 사용하였다. 영 정조 시기에는 사치품으로 생산을 제한하기도 했다.
서양인들은 고려청자보다 조선시대 백자를 더 좋아한다. 사실 백자는 청자보다 고난도의 제조 기술을 요한다. 백자는 청자보다 굽는 온도가 더 높아 1300~1350℃를 며칠간 유지해야 한다. 또 유약에 불순물이 들어가지 않게 해야 한다. 청자는 표면에 미세한 균열이 있지만 백자는 티 하나 찾기 어려울 정도로 반들반들하다. 백자는 문양이 그려지지 않은 순백자와 그림이 그려진 백자로 나뉜다. 순백자의 맛은 군더더기 없는 단순한 형태감과 유약에 의해 만들어지는 미세한 색조의 변화에 있다. 흰색이지만 살며시 푸른색을 띠기도 하고 은근히 회색이 감돌기도 한다. 달항아리가 대표적이다. 그림이 그려진 백자는 어떤 재료를 사용했느냐에 따라 크게 청화백자, 철화백자, 진사백자로 나뉜다. 가장 고품격 백자는 회회청(回回靑·코발트블루)으로 그림을 그려 넣은 청화백자였다.
백자청화보상화문합, 조선 19세기, 높이 15.0cm.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다른 청화백자도 비슷한 고초를 겪었다. 청화백자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박물관과 수집가 사이에 큰 인기를 끌었다. 발견되는 즉시 대부분 일본으로 밀수출됐다. 그래서 국내에는 거의 실물이 남아 있지 않다. 이렇게 일본으로 건너간 청화백자는 여러 손을 거쳐 국공립 박물관이나 개인 소장처로 옮겨졌다.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은 한국과 중국 도자기를 소장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자기 전문 미술관이다. 고려청자 등 해외 최고의 한국 도자기 수장처로도 유명하다. ‘아타카(安宅) 컬렉션’을 기반으로 1982년 문을 연 뒤 이병창 씨의 기증품 363점 등을 포함해 한국 도자기 1200여 점을 보유하고 있다.
우리는 1960년대 초기까지 청화백자의 존재를 잊고 살았다. 1920년대에 발행된 <동아일보>에는 1960년까지 청화백자란 단어가 한 번 등장한다. 해외로 반출된 문화재의 반출경위나 소재를 알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화재의 존재를 재확인하는 것도 중요하다. 잊힌 문화재도 적극적으로 찾아내 연구하고 보존할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참고문헌 「유홍준의 국보순례」, 유홍준, 2014.01.10., ㈜눌와 「조선의 은제련기술과 백자, 경제대국을 만들다」, 홍익희, 2012.11.05., 유페이퍼 「조선백자의 과학」 한국미의 재발견-도자공예, 2004.01.10., 솔출판사 「김대환의 文響(15) - 백자거북이 해시계」, 2015.10.14., 교수신문 「조선백자와 청화백자의 미」, 정양모, 2014.11. 월간조선 「산 하나를 통째 그릇으로…조선도공, 일 도자문화를 빚다」, 2015.10.13., 동아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