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현희가 2009년 3월 부산 벡스코에서 자신에게 공작원 교육을 가르쳤던 다구치 야에코 씨(한국어 가명 이은혜)의 오빠와 아들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북 대립의 골이 깊었기 때문에 당시 반공 교육을 받은 국민들로서는 북한에 대해 무섭고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이라는 관념을 갖고 있었다. 당연히 공작원들도 우락부락한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으나 막상 회견장에 나타난 김현희는 지극히 여성적이고 단아하기까지 하여 놀란 것이다. 감정이 풍부한 국민들은 이번 사건을 민족분단의 비극으로 받아들이고 그녀에 대한 관심과 동정을 아끼지 않았다.
김현희에 대한 폭발적인 반응은 일본에서도 일어났다. 일본의 시사통신은 김현희의 기자회견이 일본에 알려지자 프러포즈 전화와 편지가 쇄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너무 불쌍하다. 저렇게 젊고 예쁜 여자가 어떻게 그렇게 잔인한 짓을 저질렀나. 내가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보겠다.”
시사통신은 관계 소식통을 인용하여 보도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김현희의 기자회견으로 북한에 대한 비난과 성토대회가 연달아 일어나고 세계적으로도 북한을 테러국가로 지정하기에 이르렀다. 당시로선 이보다 더 훌륭한 반공교육이 없었고 김현희는 북한에서 온 어떤 인물보다 가장 강력한 반공교육의 산 증인이 되었다.
“무엇보다 민간비행기에 대한 공격은 비열한 행위다. KAL기가 테러리스트의 폭탄 장치에 의해 파괴됐다는 확고한 이유가 있다. 구조신호가 없었고 잔해가 별로 발견되지 않은 점이 고공에서 잡자기 폭발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미국 백악관의 피츠워터 대변인이 발표했다.
“그 여인(김현희)의 자백을 입증하는 독자적인 정보는 있는가?”
기자들이 피츠워터 대변인에게 물었다.
“우리의 독자적인 분석이 그녀의 자백을 입증해 준다고 말할 수 있다.”
피츠워터 대변인이 대답했다. 미국도 김현희의 자백을 인정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 사건 이후 미국 하원에서는 청문회까지 열고 조사했다. 미정보국에서는 김현희 일행이 동구권에 있는 북한 대사관과 통화한 내용도 녹음되어 자료로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미국, 일본, 마카오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수사기관에서도 면담 요청을 해왔고 언론매체에서도 그녀의 진술을 듣고 싶어 했다. 각국의 수사기관은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이 많았다. 미국은 북한의 전반적인 공작원 양성 실태와 공산국가를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북한의 공작원이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
“김현희를 만나고 싶습니다.”
마카오 수사기관에서도 외교 경로를 통해 면담 요청을 했다.
“무엇 때문입니까?”
“김현희가 마카오에서 직접 활동하였던 만큼 구체적인 활동 내용과 마카오에서 활동하는 북한 인물들과 공작원들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안기부는 그들의 요청을 허락했다. 김현희와 면담이 이루어지자 그들은 북한 요원들의 사진과 이름을 보여주면서 김현희의 확인을 요청했다.
“이 사람을 어떻게 아세요?”
김현희도 매우 놀라는 눈치였다. 그 내용 중엔 우리의 조사 과정에서는 나오지 않았던 인물까지 있어서 수사관들도 적잖이 놀랐고 미국의 정보력에 놀라지않을 수 없었다.
수사발표와 기자회견이 끝나자 수사는 어느 정도 일단락되었다. 수사국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던 수사팀이 해체되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김현희로부터 북한의 대남, 해외 공작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는 것과 신병을 보호하는 일이 남아 있으므로 주무 부서였던 우리 과가 김현희를 전담으로 맡게 되었다.
▲ ‘김현희를 가르친 일여인도 납북됐다’는 제하의 1988년 2월 8일자 동아일보 기사. |
기자회견이 끝나자 수사관들은 어느 정도 안심을 했다.
수사가 끝나자 여느 간첩 사건들처럼 이번 사건에 대한 공적 상신이 있었다. 공적 상신이라는 것은 수사에 공을 세웠기 때문에 그 공적을 보고하여 국가로부터 상훈을 받는 것이다. 다른 기관은 모르겠고 안기부 수사국에서도 고위 간부부터 현장수사관에 이르기까지 몇 명의 이름이 후보로 올랐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수사에 참여한 수사관들 중에서는 나만이 국무총리상을 타고 나머지 상훈은 외무부 등 다른 기관으로 돌아갔다. 워낙 이 사건과 관계된 기관이나 사람들이 많다보니 그들의 공적을 높이 산 것 같았다.
“축하해요.”
사람들이 축하 인사를 건넸으나 나는 조금 얼떨떨했다. 수사에 참여하기는 했으나 나보다 더 고생한 수사관들이 많았는데 의외로 나만이 유일하게 상을 받은 것이다.
“어떻게 해요. 제가 상을 받아서….”
나는 수사관들에게 미안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다른 수사관들이 상을 받지 못한 것은 안기부로서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한 것 같고 나는 내가 한 일보다는 일반에 공개된 안기부 여자수사관이라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여 상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사건 수사에 열과 힘을 아끼지 않고 일한 다른 수사관들에게 미안하기만 했다.
“이은혜에 대해서 자세하게 조사해 봐.”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왔다. 일본도 이은혜에 대해서 비상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우리가 김현희에게서 이은혜라는 존재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북한의 공작원이라는 사실을 자백하고 난 후 북한에서의 공작원 교육에 대해 조사를 할 때였다. 김현희는 자신이 일본인으로 위장한 것은 일본인화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누구에게서 교육을 받았어?”
수사관이 김현희에게 물었다.
“리은혜라는 여자 선생입니다.”
김현희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수사관들은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당연히 이은혜라는 선생이 북한 여성이라고 생각했다.
“이은혜는 어떻게 일본에 대해 그렇게 잘 알고 있지?”
“일본사람이니까 잘 알지 어떻게 잘 알겠습니까?”
김현희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것은 뜻밖의 진술이었기 때문에 수사관이 어리둥절했다.
“일본사람이 어떻게 북한 공작원들에게 교육을 시켜?”
“리은혜는 데려온 일본 여성 같습니다.”
김현희는 머뭇거리다가 겨우 대답했다. 데려왔다니? 수사관들은 처음에는 그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데려왔다는 것이 무슨 말이야? 납치했다는 거야?”
수사관들이 긴장하여 물었다.
“네.”
김현희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는 북한이 공작원의 교육을 위해, 특히 어학 교육을 위해 외국인을 납치한다는 정보는 들어왔지만 실제로 김현희의 진술을 통해 눈앞에서 그 사실을 확인하게 되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래서 김현희가 이은혜와 어떻게 만나게 되었으며 또 어떤 교육을 받아왔는지에 대해 자세히 심문했다.
실제로 북한 공작원에 의한 일본인 납치 사건은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전반에 걸쳐 빈번하게 발생했는데 북한은 납치한 일본인의 인적사항을 이용해서 만든 위조 여권으로 대남 침투공작을 활발하게 벌였고, 납치된 일본인들은 공작원들의 일본인화 교육교사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 경찰은 북한에 의해 납치된 일본인들을 ‘행방불명자’나 ‘실종자’로 처리했다. 확실한 물증이 없어 북한의 소행이라고 단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북한에 의한 납치라는 의혹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김현희가 자신의 일본인화 교육을 위한 교사가 ‘리은혜라는 일본여성이고 일본에서 납치했다’라고 진술하면서 일본이 발칵 뒤집히게 되었던 것이다. 이 일은 북한과 일본 사이의 외교 문제로 비화되었다.
김현희는 1980년 3월경 평양 외국어대학 일본어과 2학년에 재학 중일 때 중앙당(노동당)으로부터 공작원으로 선발된 후 전문적인 공작원 교육을 받다가 이듬해인 1981년 7월 4일 자신의 담당 지도원으로부터 새로운 공작임무에 따라 새로운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지시와 함께 동북리 2층 3호 초대소로 옮기게 되었는데 공작원들 사이에서는 이곳을 보통 특각 3호 초대소라고 불렸다.
김현희는 그곳에서 81년 7월 4일부터 83년 3월까지 약 20개월 동안 수용되어 밀봉교육을 받으면서 이은혜를 만나 함께 생활했다.
지도원으로부터 앞으로 일본인화를 위해 일본어를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전해 듣기는 했지만 지도원이 김현희에게 그녀를 ‘리은혜’라고 소개하여 처음에는 재일교포로 생각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은혜가 일본인이고 김일성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하여 ‘리은혜’라고 이름 지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리은혜 선생이오.”
김현희는 초대소에 도착하여 훤칠한 키에 서구적으로 생긴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하고, 북한에서는 보기 드문 화려한 옷을 입은 이은혜를 처음 만났다.
“김현희 동무는 앞으로 리은혜 선생에게 일본어 교육을 배우시오.”
담당 지도원은 김현희에게 이은혜로부터 일본어뿐 아니라 일본의 풍습이나 사고방식까지 완전히 익혀서 완전한 일본인처럼 될 것을 지시했다. 그때부터 김현희는 이은혜로부터 강의록에 따른 일본어 교육을 받고, 그녀와 함께 녹화한 일본 드라마, 영화와 각종 신문, 잡지를 보았고 일본 노래도 배우기 시작했다.
정리=이수광 작가